용.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존재.
열두 개의 위업을 달성하면 초월하여 ‘신’이 된다.
용혈회는 ‘신’이 될 가능성이 큰 용들을 모아놓은 특수한 집단이었다.
이들만으로도 ‘세계의 멸망’에 도달하는 게 가능하리라.
하지만 그러한 힘이 있음에도 회의를 통해 나름의 시기를 정한다.
‘이 얼마나 오만한 놈들인가.’
멸망을 논하면서 세계의 균형을 지킨다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위선은 없다.
오만하다.
역겹다.
용들을 마주하는 솔직한 나의 감상이었다.
말피엘과 비교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이 바로 용혈회다.
‘위선’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크게 몸집을 부풀린 곳.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놈들의 잣대에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하기야 그런 곳이니 말피엘을 입회시키려고 한 것일 테지만.
“······ 그렇게 생각한다.”
장단을 맞췄다.
마지막 위업의 시기를 정확하게 알아내야만 했다.
더불어 저 번개의 장막을 넘어 마계로 향할 방법도 알아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절대로 내가 저들이 말하는 ‘특이점’임을 들켜선 안 된다.
만약 들켰다간 나를 비롯한 제국 전체가 사라질 것이기에.
이곳에 있는 용들은 말피엘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강력한 ‘고룡’들이었다. 말피엘은 이제 막 성룡이 된 성체였으니 그 힘과 지식 모두가 상대가 안 될 터였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맞붙는다면 나 역시도 같은 처지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군.’
이게 바로 격의 차이인가 싶었다.
일전에도 느꼈지만 이들의 ‘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마도 북부의 용이 전성기의 힘을 되찾으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원죄의 힘을 흡수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Lv. 190】
【Lv. 187】
【Lv. 185】
제로가 스캔하여 파악한 레벨은 얼추 비슷했다.
말피엘이 150이었음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게 높다.
원죄의 힘을 개방했을 때 말피엘을 압도했으나 다시 한번 반복된대도 여기 있는 용 하나를 제대로 상대하긴 힘들 것 같았다.
원죄의 모든 힘을 온전히 흡수한다면 또 모를까.
레벨이 높아질수록 1의 차이도 더 극심해지니······.
물론 답은 있다.
‘닿는’ 것.
저들은 인공지능 A.I다.
버전업 한 제로의 나노머신을 닿아서 흘릴 수만 있다면 죽일 수 있다.
그저 닿기만 하면 되니 난이도가 확 내려가는 셈이다.
그러니 1:1이라면, 죽이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천 년 만에 깨어났어도 용으로서의 자각은 아직 남았나 보군.”
입회를 위해 용혈회에 왔을 때보다 알렉은 다소 공격적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데려왔던 말피엘이 죽은 것이 영향을 준 모양인데.
하기야 말피엘은 무려 ‘로드’가 승인하여 시험 없이 합격한 용이다. 그런 용을 데려온 알렉의 자부심도 대단했을 것이다.
다른 용들도 모르는 ‘말피엘의 죽음’을 혼자 알고 있던 걸 보면 말이다.
‘들키면 죽겠군.’
내가 말피엘을 죽인 당사자라는 게 알려지면 가장 먼저 내 목을 따러 달려올 게 저 알렉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죽음의 용. 이곳에 모인 모든 용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강자.
그가 재차 내게 말했다.
“북부의 용이여, 하나 묻겠다. 대죄종이 깨어났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지?”
“그런 걸 묻는 저의가 무엇이냐?”
나는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알렉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음의 용’이라 불리는 이유는 모든 ‘죽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인식’하는 존재의 죽음은 보다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지.”
······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단순히 용언 따위를 잘 다뤄서 죽음의 용이었던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알렉은 죽음을 인지할 수 있다. 말피엘에게는 더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을 테니, 말피엘이 죽는 순간 자연스럽게 인식했다는 뜻이었다.
‘알렉은 말피엘의 죽음을 조사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내심 당황했으나, 겉으로는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일말의 흔들림조차도 간파당할 가능성이 크다.
하물며 이곳에 모인 용들이 어떤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지 모른다.
절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
“말피엘의 죽음에 내가 관여하기라도 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말피엘이 죽는 순간 나는 더없이 강렬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이상한 것은, 그 냄새가 너에게서도 나고 있다는 것이다.”
냄새?
문자 그대로 코로 맡아지는 냄새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특이점··· 대죄종인 걸 알아차린 건가?
아니, 아니다. 그러진 않을 것이다.
알아차렸다면 입성하기 전에 공격했을 테니까.
이곳에서도 얌전히 묻고만 있는다는 건 ‘확신’은 못한다는 의미다.
웃자. 웃는 거다.
위기일수록 여유를 보이는 것이 가장 강력한 생존의 비법이다.
“강렬한 죽음의 냄새라······. 내가 죽인 존재들의 냄새를 말하는 거라면 그야 당연하지 않느냐? 역겹을 살며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을 맛보았으니.”
“흠. 말피엘을 죽인 ‘특이점’과 비슷할 정도로, 죽여왔다는 것이냐?”
그러니까 알렉은 대상이 죽인 ‘숫자’ 따위를 감별할 수 있는 것 같다.
대죄종이 풍겼던 죽음의 냄새.
그것이 내게서도 풍겨왔기에 넘겨짚은 거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내가 죽인 숫자가 천만이 넘는다면 그것은 회귀 전의 과거를 포함한 것일 테다. 어찌됐든 폭군으로서 수없는 전쟁을 조장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허나 이전에 봤을 땐 이런 기미가 없었다.
그때 당시엔 내게서 그만한 죽음의 향이 나지 않았었다는 말이다.
‘원죄를 흡수한 다음에야 놈이 말하는 죽음의 향이라는 게 비로소 나타난 모양이군.’
이유가 있다면 그뿐이었다.
어쨌든 놈이 넘겨짚었다는 걸 알아냈으니 남은 건 허세였다.
“그 ‘특이점’이 얼마나 죽여왔을 지는 모르겠으나 나보단 못할 것이다.”
“······ 허.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군.”
알렉을 포함한 주변 용들이 떨떠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죽여대는 연쇄살인마마냥.
진짜 미친놈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이가 없었다.
고고한 척 하지만 진짜 살인기계들은 저 용들 아니던가.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나를 ‘특이점’이라고 생각한 거냐?”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특이점’은 존재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니.”
“단순한 ‘죽음의 향’ 따위로 가능성을 따진다면 너야말로 ‘특이점’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나? 죽음의 용, 죽음 그 자체인 용이여.”
“내가 특이점이다······? 재밌는 발상이로군.”
그제야 알렉은 의심의 눈초리를 아주 약간 치웠다.
그리곤 계속해서 말했다.
“섣불리 의심한 건 사과하마. 너는 모르겠지만 ‘그 일’을 겪은 이후 특이점에 대한 의심과 증오심이 커져 어쩔 수 없었으니.”
“그 일?”
“천 년 전, 용혈회의 용 하나가 ‘특이점’이 됐다.”
과연.
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특이점’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있었다.
그나저나 천 년 전이라.
내 궁금증을 눈치챈 알렉이 이어서 말했다.
“아마 너도 알고 있을 게다. 절대자라 불렸던 최강의 용. 용혈회의 배신자이지.”
······ 제국을 세운 전신. 그 절대자가 용혈회의 용이었다?
현 황실은, 나는 그의 피를 잇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곳에서 그는 배신자라 불렸다.
“하여간······ 용혈회에 입회한 이상 쓸데없는 살생은 금지다. 앞으로는 적당히 죽이고 다녀라.”
“생각해보마.”
용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하지만 지금 알렉을 비롯한 용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읽혔다.
극히 혐오하는, 제대로 미친놈을 바라볼 때의 그런 표정이다.
알렉이 신경쓰일만큼의 죽음을 몰고다니는 내 존재가 저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듯싶었다.
차라리 잘됐다.
제정신이 아닌 놈으로 취급받는 건 익숙했으니까.
나는 자리를 옮겨 한 용의 앞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이군, 아돌프.”
“······.”
“······!”
아돌프.
라우넬과 콜로세움에서 대결한 직후 나를 용혈회로 데려온 용.
그에게 인사하자 용들이 놀란 낌새를 보였다.
“··· 놀랍군. 본체인 아돌프를 ‘인식’하다니.”
“그건 로드만 가능한 거 아니었나?”
“본인이 나서기 전에 알아차리다니······.”
그들이 놀라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돌프의 본체는 ‘투명’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조차 불가능하다.
본체가 아닐 땐 셋으로 나뉘어 힘을 분산시키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러한 본체 때문인 것 같았다.
합쳐지는 순간 투명해져 존재감이 사라지니.
저들의 반응으로 보아, 이곳에 있는 고룡조차도 이 상태의 아돌프를 인식하는 건 힘든 모양이었다.
나야 ‘제로’에 의해 알아차렸을 뿐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용들의 입장에선 내가 신기해보일 터였다.
“··· 오랜만이군.”
아돌프의 눈빛 또한 살짝 흔들리는게 보였다.
아돌프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게 아닌 이상, 오직 로드를 제외하곤 그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아보았다. 단번에 특정하며 인사까지 건넸다.
‘특별한 권능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봉인당했었다고 무시할 존재는 아닌 것 같군.’
용들은 다시 생각했다.
솔직히 북부의 용에 대해 무시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새로 입회한다고는 들었지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무려 천 년이다.
천 년간 봉인당한 상태라면 약화되었을 게 분명하다.
하물며 그 봉인도 인간에게 당한 것 아니던가.
그러나 알렉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진한 ‘죽음의 향’을 흩뿌리고 다니며, 아돌프를 인식할 정도의 ‘눈’을 지녔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법.’
‘생각보다 쓸만한 놈이군.’
쓸만하다.
용혈회에 입회할 자격으로는 충분하다.
오히려 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할 ‘라이벌’이 새로 나타난 셈이다.
완전히 인정받은 건 아니지만 ‘슈퍼 류키’ 정도로 분류된 건 분명해보였다.
알렉의 의심도 어느정도는 회피했으니 위험한 고비는 거의 넘긴 셈이다.
‘남은 건 로드와 회의다.’
그렇다고 안심하긴 이르다.
드래곤 로드.
이곳 용혈회의 주인인 그녀와의 접전이 아직 남아있었다.
제로의 존재와 내가 인간임을 어떻게든 숨기긴 했지만, 알렉이 내 변화를 알아차렸 듯이 로드인 그녀도 내 무언가를 알아차릴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더불어 회의의 내용과 그 진행 또한 지켜봐야 함이었다.
화아아악!
그 순간이었다.
바람이 회의장을 감싼다.
공기가 달라졌다.
무겁게 어깨가 짖눌리는 느낌.
“로드께서 입장하신다.”
알렉의 말에 따라 모든 용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나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드래곤 로드가 있었다.
거대한 사슴의 뿔을 지닌 여자.
용의 본체가 아닌, 유일하게 그녀만은 이전에 보았던 인간 형태의 모습으로 이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가공할 압박감이다.
홀로 이곳에 있는 모든 용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용들도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본체가 아닌 상태로도 이 모양일진대, 본체일 때의 모습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녀가 용들을 훑어보았다.
“······.”
이윽고 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 용들의 회의(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