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깨달음이라는 건가?’
카잔은 생각했다.
개인 연무장의 중심부에 앉아 마나에 대한 고찰을 이어나가던 중의 일이었다.
8서클로 향하는 희미한 윤곽 같은 게 잡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휘슬과의 대결 이후 생사를 넘나들었던 카잔은 깨어난 직후 신체의 변화를 느꼈다.
마나가 훨씬 안정된 느낌.
마나가 자신을 인도하고 있는 느낌이 든 것이다.
이후 연무장에 틀어박혀 명상을 이어나갔다.
‘라인하르트가 폭주를 잡은 이후 생긴 변화인 거 같은데.’
마나 폭주 현상.
폭주한 대상은 높은 확률로 죽거나 반신불수가 된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손에 의해 폭주가 잡혔다.
과거 카르몬의 폭주를 다스린 것처럼.
이 변화 역시 그 후에 생겨난 것이라고 봐야 할 터다.
‘··· 마나란 무엇일까.’
카잔은 마나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노력이라는 것을 그다지 해본 기억이 없었다.
타고난 재능.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늘어났으니까.
어차피 황제가 되지도 못할 운명. 아무런 욕심도 없으니 편하게 사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었던 탓이다.
하지만 휘슬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카잔은 후회했다.
조금이라도 노력해볼걸. 조금이라도 열심히 살아볼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지.’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처음으로 카잔은 고민을 이어나갔다.
마나. 초자연적이며 세상 전체에 수놓아진 기운들.
하지만 자연적인 그 무엇도 인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마나만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 입력되고 수행한다.
‘인위적이라면.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게 마나라면······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십이주신.
신성교의 교리에 따라 생각하면 마나 역시 주신이 만든 것일 터.
마나의 기능은 ‘변화’다. 입력된 명령에 따라 그 성질을 변화시킨다.
대표적인 예가 사대 원소다.
불, 물, 바람, 땅.
여기에 추가로 빛, 어둠, 얼음 같은 희소한 영역까지 변화할 수 있다.
그야말로 완전체. 만능의 도구 아닌가.
‘신은 마나라는 만능의 도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알기에 지상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폭주하게 된다. 애당초 만능의 도구는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나로 인한 폭주 현상.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인간은 현세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없었다.
수많은 도전과 노력이 있었지만 폭주한 인간을 치유했다는 이야기는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라인하르트는 폭주를 다뤘다. 신이 만든 도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성찰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인하르트는 마나가 무엇인지 안다.’
도구의 정확한 정체를 알고 있기에 오류도 잡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기술자인 양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진짜 기술자라면 도구가 고장났을 때 수리할 줄도 알아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건 매한가지다.
그럼 라인하르트만이 인간 중 유일하게 그 진리에 닿았다는 말인가?
‘아.’
그 순간이었다.
마나가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
마나가 다른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의문이 들자, 손끝으로 마나가 만져지는 것만 같은 감각이 들었다.
카잔은 눈을 감고 손을 움직였다.
그에 따라 마나가 따라오고 있다.
카잔은 오페라의 지휘자처럼 리듬에 맞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더 많은 마나가 빛을 발하며 카잔의 주변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만능의 도구, 세상을 지배하는 힘. 마나란 그런 것이다.’
마나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지배’한다는 것은 마나를 그저 도구로 여긴다는 것이다.
자연적이고, 숭배해야할 대상 따위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다루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명령 따위도 본래라면 필요없는 행위다.
부르르르!
카잔이 몸을 떨었다.
동시에.
······ 벽을 넘었다.
8서클.
이는 마탑주들과 비견되는 경지.
최연소의 8서클 대마법사가 탄생한 순간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카잔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서 눈을 뜨고, 물결치는 마나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다른 마나보다 더욱 큰 빛을 내뿜고 있는 것.
마나들을 주도하며 따르게 하는 가장 큰 힘.
‘이건 라인하르트의 마나다.’
폭주를 치유한 이후 라인하르트가 자신에게 심어놓은 마나의 존재를 깨달은 것이다.
폭주를 치유하고 몸을 재생시킨 절대적인 원인.
그러고 보면 카르몬도, 라우넬도······ 모두 라인하르트를 겪은 이후 벽을 넘었다.
카르몬은 그 어린나이에 벌써 5서클이었고 라우넬도 소드마스터가 되지 않았던가.
‘라인하르트의 마나는 인간을 진화시킨다.’
이내 카잔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정정했다.
‘라인하르트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마나가 아니라 라인하르트 자체가 그러한 영향을 끼친다.
‘그는 마나의 주인이다.’
마나의, 도구의 주인이다.
카잔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구의 진짜 정체를 그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모든 마법사들이 염원하는 ‘9서클’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무영창. 마나의 지배자!
그러니 알아내야겠다. 확인해야겠다.
“······ 사라졌다고?”
“예. 저하. 전하께선 3일 전에 갑자기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대대적으로 수색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후우.”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집사인 제르민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라인하르트가 ‘또’ 사라졌다는 것이다.
카잔은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의문에 대해 묻지 못해서?
마나가 무엇인지, 정말 9서클에 오른 건지 묻지 못해서?
아니다. 그런 아쉬움과 후회가 아니었다.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그냥, 그 한 마디를 못한 게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
“그대가······ 1군주인가?”
라우넬이 꿀꺽 침을 삼켰다.
북방의 평화협정단의 책임자로 출발한지 어언 한달.
마침내 북방에 도착해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그런 라우넬의 반대편엔 1군주가 있었다.
1군주.
북방의 최강자.
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안다.
모든 군주를 통틀어 가장 완고하기로도 유명했다.
그간 카를로스 대공과 그의 부하들을 상대로 한 치의 양보없이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내가 1군주인 건 맞다만. 그쪽은 라우넬 황자인가?”
“그렇다.”
“원래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오기로 하지 않았나?”
“······ 그렇게 됐다.”
“흐음. 막판에 와서 바꿔치기라······ 게다가 격도 안 맞군. 제국은 정녕 끝나지 않는 전쟁을 원하는 건가?”
타앙.
1군주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동시에 마나의 기파가 우웅- 대며 라우넬의 전신을 잠식했다.
‘미친.’
라우넬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소문 이상의 마나다. 기파만으로 주변의 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을 지경이다.
단순한 소드마스터가 아니다.
1군주는 자신보다 적어도 한 수 이상 강한 강자였다.
굴하지 않으며 라우넬은 품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이걸 전해달라더군.”
“이건······?”
물건을 받아든 1군주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라우넬은 좌불안석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전해달라고 해서 전해주긴 하겠지만, 이 물건이 평화협정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다.
‘포션······.’
전한 물건은 포션이었다.
파간의 치료를 위해 신성대군주가 만든 물약 말이다.
“융. 위대한 파간이여.”
1군주가 융을 불렀다.
곧이어 ‘위대한 파간’이라 불리며 북방민들의 존경을 받는 그가 자리에 나섰다.
일전 포션에 의해 어느정도 치료가 되었으나 완치는 되지 않았다.
특히 성지의 영향을 크게 받은 ‘위대한 파간’이었기에 아직 피부를 비롯한 장기 따위가 완전히 수복되진 못한 것이다.
융은 포션의 뚜껑을 열어 그대로 입에 머금었다.
꿀꺽!
“으음······.”
융이 침음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 신성대군주께서 보내신 게 맞나보군.”
1군주는 인정했다.
마시자마자 융의 마저 치유되지 않은 부분들이 치유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만한 이적을 일으킬 사람은 ‘신성대군주’뿐이다.
그것을 라우넬이 보냈다.
이 협정을 이제 종결시키라는 신성대군주의 의지일 터.
“싸인하지.”
“······?”
라우넬은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던 탓이다.
오랜시간 카를로스 대공과 척을 지며 지지부진하게 끌어온 협상이었다.
그것을 저 포션 하나가 성사시킨다고?
‘······ 신성대군주?’
북방을 일통한 신성.
갑작스럽게 나타나 이 전쟁을 여기까지 이끈 주역.
그게 바로 신성대군주다.
그런데 포션을 건네라고 한 것은 라인하르트였다.
포션을 건네면 협정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반신반의했는데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그것을 어찌 알았으며, 신성대군주의 의지와도 같은 포션을 어찌 갖고 있었단 말인가.
‘설마······.’
불현 듯 든 생각에 라우넬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설마.
북부의 주인, 북부의 황제와도 같은 신성대군주가······ 라인하르트일 리 없지 않은가.
*
“호오라. 저게 그 ‘북부의 용’이라고?”
“천 년 전에 인간에게 봉인 당한 용?”
“북부 전체를 자기 둥지로 쓰던 그 용?”
······ 소란이 일었다.
나는 발록의 전신을 제어하며, 용혈회로 입성했다.
발록의 모든 것을 제어하고 지배했기에 현재 나는 발록 그 자체가 되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용들의 시선.
거대한 본체로 흘기는 용들의 위압감에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
‘열넷.’
자그마치 열네 마리.
용혈회의 모든 용이 이곳에 모여있었다.
오늘 있을 ‘본회의’를 위해 자리한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첫 단계는 통과했다.’
별다른 의심 섞인 눈초리는 없는 듯싶었다.
다만, 조소하며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천 년 만에 등장한 용이라고 소개됐을 터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런데 한 명 더 있지 않나?”
“말피엘······ 이번에 입회한 이름 중에 말피엘도 있었을 텐데.”
말피엘의 이름이 거론됐다.
북부의 용과 함께 동시에 입회한 용.
아직 말피엘이 죽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싶었다.
“말피엘은 죽었다.”
······ 한 명을 제외하곤 말이다.
알렉.
말피엘을 용혈회로 데려온 당사자. 죽음의 용!
아마도 말피엘을 가장 예의주시했을 용이 바로 그다.
그 용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죄종이 부활해 말피엘을 죽였다는군.”
“아아, 그 ‘특이점’?”
대죄종을 그들은 특이점이라고 불렀다.
특이점이라는 소리에 용들이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 감정은 분노에 가깝다.
본능적으로 특이점에 대해, 대죄종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지 않고서야 이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그것에 알렉은 쐐기를 박았다.
“‘특이점’은 우리 용혈회가 가장 우선시하여 제거해야 할 제거 대상이다. 모든 시련을 접어두고 멸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시 ‘그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그 일?
특이점으로 생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알렉이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 않나, 북부의 용?”
······ 그런데 아까부터 왜 나를 저렇게 똑바로 쳐다보면서 얘기하는 거지?
의심에 찬 눈초리.
마치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 용들의 회의(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