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지는 않겠으나 죽음보다 더한 모욕감을 주겠다.’
솟아오른 땅에 묶여있는 카잔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저 모습이 웃겨서 웃는 건 아니다. 다만, 대공 측 자식들의 의도가 너무나도 뻔했기에 웃어 보인 것이었다.
“······ 뭐 하는 짓입니까. 승패가 결정 났으니 그만두십시오.”
카잔의 어미인 2황비는 얼굴을 붉힌 채 겨우 입을 열었다.
만민이 보고 있는 콜로세움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는 건 참기 힘든 처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잔의 상대였던 휘슬은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듯 주변을 돌며 양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승리자의 모습이다.
카를로스 대공은 2황비의 모진 소리를 못 들은 체하였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휘슬을 뿌듯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도리어 여운을 즐기도록 시간을 끌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황비님.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2황비의 울음기 섞인 말에 카를로스 대공이 답했다.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카잔이 정신을 잃었는 데도 경기가 진행 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누가 봐도 경기를 속행할 수 없는 상태 아닙니까?”
“본인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혹은 사망에 이르거나, 주최 측인 폐하와 제가 경기를 중단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번 콜로세움의 규칙은 간단하다.
정확히 세 가지 이유로만 승패가 갈린다.
본인의 패배 선언, 혹은 사망상태, 마지막으로 황제 데우스나 대공 카를로스만이 경기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
카잔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기절한 탓에 졌다고 말할 정신도 없었다.
남은 건 황제 데우스가 직접 말하는 ‘패배 선언’뿐.
쿠르릉!
경기장이 다시 한번 들썩였다.
휘슬이 지팡이에 마나를 집약시키자 카잔을 감싼 대지의 압박이 더욱 조여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놔두면 정말 죽일지도 모른다.
황자니까 죽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저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에 2황비의 간절한 눈이 데우스에게 향했다.
“··· 카잔의 패배다.”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카잔이 졌다고. 같은 7서클이었으나 그 결과는 압도적인 패배였다.
첫 대결.
당연히 카잔이 승리하리라고 믿었다.
알려진 바로 휘슬은 6서클이었고, 카잔은 7서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휘슬 역시 7서클이었다.
같은 서클이라면 남은 건 기량의 차이다.
이번 대결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황실에서 나고 자란 마법사는 전장을 구른 전투마법사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증명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다음 대진도······.’
라우넬도 타베론을 이길 수 없지 않을까.
피닉스 연공법을 대성한 라우넬은 소드마스터의 벽을 넘었다. 평범한 소드마스터와는 궤가 다른 완성체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전장을 경험해본 적은 없었다.
일전에 비록 북방으로 보내긴 하였으나 이는 정보의 수집이 목표였지 전투가 목표는 아니었던 탓이다.
허나 타베론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장을 구르던 전사다.
‘파간을 스무 명 넘게 죽였다지.’
속속들이 들려오는 북방에서의 전투결과.
비록 마지막에 신성군주가 나타나며 전황이 뒤바뀌었다지만 그 직전까지 북방을 종횡하던 타베론의 압도적인 무력에 대한 보고서는 이미 넘쳐났다.
라우넬마저 진다면 라인하르트의 기회는 없다.
2:0으로 황실의 완패가 되는 것이다.
순간 라우넬과 데우스가 눈이 마주쳤다.
―저를 믿으십시오, 폐하.
라우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가에 초점이 없는 인형과도 같았건만.
라인하르트가 돌아온 이후 그 생기가 생겼다.
본인의 트라우마를 이겨낸 것이다.
‘믿기로 하지 않았던가.’
데우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음······?’
헌데 순간 스쳐지나간 라인하르트의 모습에 데우스는 내심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저 웃음기는······.’
라인하르트는 웃고 있었다.
동생이 다쳤다면 마땅히 인상을 찌푸려야 정상이거늘.
라인하르트는 순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저러한 웃음기는, 황제 데우스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자주 보았으니까.
‘광기가······.’
광기 어린 시절, 라인하르트가 자주 지어 보였던 바로 그 웃음이었기에.
*
제대로 잠을 못 잤다.
그게 패배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막중한 책임감에, 첫 번째로 콜로세움에서 휘슬을 상대한다는 생각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을 못 이룬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맙다.’
······ 고맙다고.
칭찬은 질리도록 들어왔다.
천재이니, 신동이니 하는 소리야 귀가 아플 정도로 들어서 칭찬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하지만 고맙다는 소리는 좀처럼 들어본 적이 없다.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달성해봤자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카잔은 천재니까. 황자가 그러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무리해서 노력한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천재가 성과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인데.
‘라인하트가, 나한테?’
그런데 고맙단다.
그것도 라인하르트가.
그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자신밖에 모르던 미치광이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놈은 자신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카잔도 라인하르트를 인정하지 않았다.
운 좋은 미친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럴진대.
자신은 그 정도로 정교한 분석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순수히 인정까지 했다.
‘진짜 미친 건가······.’
사실 이전이 정상이었고 지금이 미쳐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무서웠다.
갑자기 사람이 바뀌면 그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라인하르트도 죽을 때가 되어서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잠을 못 이뤘다.
예측할 수 없다. 분석도 불가능하다. 라인하르트는 틀을 깨고 튀어나왔다.
“카잔. 제발 정신 좀 차리렴!”
“마나 폭주 현상입니다. 그, 그런데 평범한 폭주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평범한 폭주가 아니라니요!”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런 건 처음······ 아, 라인하르트 전하?”
“전하. 제발 우리 카잔을 살려주십시오. 카르몬의 마나 폭주도 잡아주시지 않았습니까?”
주변이 소란스럽다.
카잔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히 들리는데, 반응할 수가 없다.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
따듯··· 하다.
누구의 손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포근한 느낌이었다.
손이 얹힌 순간 전신이 나른해지며 편안해졌다.
잡생각이 사라지고 구름에 뜬 기분만이 남았다.
어렸을 적 느껴본 엄마의 손길이다.
별다른 규율과 책임으로 무장되지 않았을 때. 천재라며 칭송받지 않았을 정도로 어린 시절.
순수하게 그저 카잔을 카잔으로 보아주던 부드러운 엄마의 손길이었다.
‘마나가······.’
동시에 심장을 두른 마나가 전신으로 뻗쳐나가는 게 느껴진다.
심장 소리가 빨라지며 마나의 순환은 배가 되었다.
이윽고 마나의 고리를 억압하던 불순물이 순식간에 빠져 나왔다.
눈을 뜨자 카잔의 시야에 누군가가 보였다.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
그가 왜 이곳에 있는가.
꿈인가 보다. 꿈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저런 걱정한다는 표정, 지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한 번 있었지. 라인하르트를 형이라고 불러본 게.’
라인하르트에게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라인하르트를 처음 본 날이었다.
어려서부터 광증으로 인해 라인하르트는 궁에 갇힌 신세였다.
그래서 라우넬이 아닌 자신의 ‘또 다른 형’을 만난다는 생각에, 카잔은 기뻐했던 것 같다.
아무리 주변에서 미쳤으니 조심하라고 해도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나.
그냥 형이 또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을 뿐이지.
하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형?
형이라고 부른 순간, 라인하르트의 표정은 흉신악귀처럼 변했다.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라. 머리 아프니까.
오만상을 찌푸리며 내뱉는 일갈에 카잔은 상처를 받았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눈빛.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것 같지 않은 그 눈빛에 카잔은 무서워서 울어버렸던 것 같다.
그 이후일 것이다.
라인하르트를 싫어하게 된 건.
별다른 능력도 없는 놈이 입만 험할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고생했다, 카잔.”
역시 죽을 때가 된 게 분명하다.
아니면 진짜 여기가 꿈속 세상이거나.
그도 그럴 게 라인하르트가 고생했다느니 하는 말을 맨정신으로 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왜일까.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
재밌다. 아주 재밌었다.
『해독 완료. 고독(蠱毒)을 배출했습니다.』
고독.
독을 품은 벌레 따위를 칭하는 말이다.
옛 동방에서 사용되었다는 금기된 술법이며 악마교단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저주였다.
그것을 카잔에게 심은 것이다.
그래서 순식간에 마나 고갈이 되며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배한 것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마나 폭주까지 일으켰다.
‘경기 도중에 풀었다. 땅 속에 숨겨두고 사용한 것이다.’
고독을 땅 속에 미리 파묻어둔 채 사용했다. 대결 도중 휘슬은 땅을 뒤집어 고독을 풀었고 그 결과 그중 한 마리가 카잔에게 들어간 셈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겠다······.’
과연. 대공의 의도는 잘 알겠다.
어떻게 해서든 이겨서 황실을 추락시키겠다는 의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황태자 전하 아니십니까. 왜 단상에 있지 않으시고 이곳에 계신지요?”
휘슬이 나타났다.
아마도 카잔의 경과를 보고자 일부러 발걸음한 것이리라.
카잔이 제대로 죽어가는지 보려고.
“훌륭한 경기였다.”
“허! 영광입니다. 전하께서 칭찬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악수나 하지.”
휘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카잔을 보고 나온 게 분명했다.
지금쯤이면 카잔이 죽어갈 텐데 악수나 하자고?
이런 천하태평한 놈이 황태자라니.
모질이 같은 놈. 우습기 그지 없다.
동생에 대한 측은지심도 없는 건가?
아니, 아직도 광증이 다 낫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대응을 할 리가 없으니까.
“전하.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휘슬이 손을 맞잡았다.
응원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황태자의 처절한 패배를. 황실의 추락을 말이다.
이어 휘슬이 고개를 한 차례 숙이곤 태연하게 지나갔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제로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배출한 고독의 독소 생성을 촉진했습니다.』
『고독을 피부 안으로 삽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상 : 휘슬.』
그래.
응원한다. 진심으로.
제 꾀에 살아남기를.
*
카잔의 상태는 생각보다 정상이었다.
호흡은 안정적이고 마나폭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멀쩡해?’
분명히 고독을 심었다.
확실하게 흡입한 걸 확인했다.
고독. 수만 마리의 독이 있는 곤충을 한곳에 몰아넣으면 그중 살아남는 한 마리는 어마어마한 독성을 지니게 된다.
그것을 몇 차례나 정제하고 강화시킨 ‘저주’를 품고 있는 충이다.
고독에 대한 내성 따위를 인간이 지닐 수는 없었다.
그런데 카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으음?”
휘슬은 순간 휘청거렸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신체가 창백해진다.
마나가 제대로 돌지 않는다.
‘마나폭주?’
갑자기 왜?
쿵!
휘슬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아, 하아악······!”
죽는다. 죽어간다.
이런 현상에 대해 휘슬은 잘 알고 있었다.
‘고독이 나한테 들어왔다고?’
그건 불가능하다.
철저하게 고독에 대한 방비 또한 해왔기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왜 카잔에게 가있어야할 고독이, 자신에게 들어왔단 말인가.
“사, 살려······!”
폭주한다.
마나가.
전신의 피부가 울긋불긋하게 솟아올랐다.
마치 터질 듯이 부글거렸다.
준비한 고독보다도 더 강력했다.
“휘, 휘슬님?”
“휘슬님을 모셔라!”
“거어어··· 어억!”
휘슬은 피를 토했다.
대공가의 기사들이 발견하여 옮겼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 조우(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