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형이라니?’
라우넬이, 라인하르트한테 형이라니!
지난 몇 년간······ 아니,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꿈을 꾸는 걸까?
현실감이 없다. 살아생전 절대로 벌어질 수 없다고 확신한 일. 그게 바로 라우넬이 라인하르트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일이었다.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카잔은 현실을 부정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칼을 겨누던 둘이다.
콜로세움에서 패배한 이후 라우넬은 반 폐인이 되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미친 듯이 검만 휘둘렀다는 건 궁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사라진 다음에는 미친 듯이 일만 했으며, 항상 어두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피해왔던 라우넬이다.
그런 라우넬이······ 형이라니.
협박이라도 당했나 싶지만 라우넬이 그런 것에 당할 인물은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 흠.”
라우넬이 멋쩍은 듯 침묵했다.
‘대답을 피해?’
카잔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전까지 그렇게 라인하르트를 물고 뜯고 씹어대지 않았나.
이제서 둘이 화해를 했다면 자신의 위치가 애매해진다.
하지만 카잔은 그런 건 별 상관이 없었다.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안빈낙도하며 편안한 삶을 보내는 게 카잔의 꿈이었으니까.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평생 봉합할 수 없는 둘이 봉합이 된 것처럼 보인다.
형이라는 말이 라우넬의 입에서 나올 정도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다.
카잔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평화협정단. 카를로스 대공이 재판을 하는 동안, 라우넬이 북방으로 가서 협정을 체결시킨다고 했지.’
내뱉은 말들로 말미암아 원인과 결과를 추론해본다.
이미 라인하르트로 내정 된 일을 라우넬이 맡는다.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것이라면 이것뿐이 없었다.
“그러니까······ 양보한 일로 그러는 거야?”
평화협정단의 대표 자리를 양보한 것.
고작 그런 거로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느냐며 눈빛을 던지자 라우넬은 고개를 돌렸다.
이런 젠장.
맞나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
“카잔. 네가 나를 못마땅해하는 건 잘 알고 있다. 어려서부터 너는 능력 없는 자들을 무시하곤 했으니.”
“정정해주시길. 단순히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걸맞은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뿐입니다.”
라인하르트의 말을 받아치며 카잔이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라인하르트는 피식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저 웃음. 저 여유.
예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졌다.
라우넬을 대결로 이길 실력조차 갖췄다.
황태자로서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인간의 편견이,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존재해왔던 편견이 깨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하지만 형제끼리 싸움을 할 때가 아니지 않으냐. 이 대결에서 패배한다면 황실의 압박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 또한 맞는 소리다.
콜로세움에서 황제의 자식들과 대공의 자식들이 맞붙는다.
만약 자신들이 패배한다면 대공의 위상을 하늘을 찌를 것이다.
여기에 평화협정까지 성사시킨다면······ ‘유능한 대공, 무능한 황실’로 정치공작을 벌일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지금은 형제들의 분란보단 힘을 합쳐 난관을 타개해야 할 때였다.
당연한 소리를 라인하르트가 하니까 이상할 뿐.
‘내가 이상한 거야?’
카잔의 머릿속은 혼란함 그 자체였다.
어쩌면 저 둘은 정상이고 자신만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가 때였다. 상황이 상황이다.
“······ 알겠습니다. 우선 힘을 합쳐 타개하도록 하죠.”
*
3:3의 대결.
하지만 승부는 1:1이다.
서로가 상대를 지목하여 2승을 가져오는 쪽이 승리한다.
“사실 대진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카잔의 말대로였다.
나와 드예프가, 라우넬과 타베론이, 카잔과 휘슬이 각각 붙을 가능성이 컸다.
대진은 황제와 대공이 직접 정하는 것이니 변수는 없으리라.
카잔이 계속해서 말했다.
“드예프는 ‘사슬검’을 사용합니다. 사슬의 거리까지 오러를 늘리는데 그 길이가 5.2m쯤 되는 것 같더군요. 오러의 진득한 특성까지 더해서 6m 안팎이 그의 영역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같이 식사를 하는 사이에 그런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카잔은 분석력이 좋았다. 눈썰미도 있으니 천재 소리를 듣는 거겠지만.
“전하께선 정령을 다루지만 린치는 훨씬 짧습니다. 영역 안으로 함부로 발을 들이면 그대로 두개골이 터져버릴 겁니다. 만약 3m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한순간에 오러를 무력화시켰던 ‘그 기술’을 사용해 승패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천마군림보를 말하는 것이다.
이후로도 카잔은 드예프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늘어놓았다.
나는 그 분석력에 감탄하며 조용히 카잔의 말을 들었다.
“······ 그럼에도 가장 조심해야할 건 역시나 ‘3단계의 벽’입니다. 드예프를 상대해본 기사들은 하나같이 ‘드예프에겐 3단계의 벽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6m, 3m, 그리고 마지막 1m에 가까워질수록 드예프의 반응 역시 더욱 날카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런 건 다 언제 조사한 것이냐?”
“기본이죠.”
기본인가?
하기야 카잔은 주변 모든 것을 분석하여 머릿속에 남겨둔다.
이에 따른 향후의 대책까지 완벽해지면 그제야 마음 놓고 쉬는 타입이다.
카잔이 말버릇처럼 말하는 ‘안락한 삶’이란, 주변의 모든 게 확실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타베론은······.”
카잔은 계속해서 자신이 분석한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그 내용이 신기하다기 보단, 이 상황 자체가 조금 익숙하지 않았다.
승리를 위한 형제들끼리의 화합이라.
그런 게 우리한테도 있었던가.
내게도, 동생들에게도······.
‘그릇된 선택이었나.’
과거 나는 동생들을 모조리 죽였다.
선택지가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의 두통으로 인해 좁아진 사고의 폭, 허수아비 신세인 황제의 삶.
녀석들을 살려두면 제국은 더 잘게 쪼개질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내 생존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역시 내 커다란 실수 중 하나였지 않았을까.
모든 걸 내려놓고 ‘도와달라’고 솔직하게 한 마디만 할 수 있었다면.
그럼, 도와주지 않았을까.
라우넬도, 카잔도, 그 누구보다도 가족을 위하는 녀석들이었으니까.
나만이 꽉 막힌 사고와 편견에 사로잡혀 이 두 녀석을 적으로 본 것이다. 내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내 자존심에 잡아먹혀 결국 파탄에 이르렀다.
사실은 한 마디면 충분했을텐데.
“······ 타베론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대처하는 능력이 다소 떨어집······.”
“고맙다.”
“······ 니다?”
말을 하던 카잔이, 이맛살을 구기며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순간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나는 재차 말했다.
“나를 대신해 분석해줘서 고맙다. 나라면 이 정도로 구체적이게 하지는 못했을 게다.”
“어······.”
카잔이 눈을 깜빡거렸다.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 또한 역력하다.
하기야 내가 녀석에게 ‘고맙다’거나 이 비슷한 말을 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카잔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말을 이어나갔다.
“······ 다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타베론은······.”
*
황실가와 대공가의 대결.
콜로세움에서 맞붙는다는 소문이 수도 전역에 퍼지기까지, 정확히 여섯시간이면 충분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기 전에 이미 수도의 모든 시민들은 이 내용에 대해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콜로세움은 만석이 되었다.
라인하르트와 라우넬이 조사단장의 자리를 걸고 싸울 때보다 더 큰 열기가 콜로세움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황제 데우스는 침착한 눈빛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하는 쪽이 승기를 잡겠지.’
카를로스의 야욕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는 황실을 ‘무능력의 대가’로 여기고 있었으며 자신이 진정한 황제의 자격을 지닌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통성 없는, 핏줄을 잇지 않았기에 황제에 즉위하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능력 없는 황제를 꼭두각시처럼 부리려고 수작을 부린 게다.
‘이번 기회에 그 콧대를 눌러주마.’
데우스는 자식들을 믿었다.
카잔, 라우넬, 그리고 라인하르트.
셋의 능력 모두 출중하니,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물론 대공가의 자식들도 천재였다. 그들의 천재성은 이미 수많은 전장에서 증명되었다. 단순히 누가 승리할 것 같느냐고 묻는다면 열 중 아홉은 대공가의 손을 들겠지.
그러나 믿는다. 믿어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황실가의 우수함을 천하에 보여주겠다.
카를로스 대공의 콧대 역시 납작게 눌러주겠다.
“첫 대결은 어찌하시겠습니까, 폐하?”
먼저 고르라.
카를로스 대공이 말했다.
그에 자신이 맞추겠다는 뜻이다.
“카잔. 실력을 보이거라.”
“예.”
뒤에 있던 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를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휘슬로 하겠습니다. 휘슬, 최선을 다하거라.”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정해진 대진이었다.
둘은 고개를 숙이곤 천천히 콜로세움으로 내려갔다.
둘 다 가벼운 경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검이 아닌 지팡이를 든 건 카잔과 휘슬 모두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서로 마주보자 휘슬이 말했다.
“저하, 오랜만이죠? 마법대결은.”
“11년 만이지.”
어렸을 때 휘슬과 카잔은 마법으로 붙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엔 둘 다 어려 고작 3서클 수준이었지만.
“아쉽게도 무승부였죠.”
승패가 나지 않았다.
3서클에서 발휘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 해봐야 한정적이니까.
게다가 그땐 서로가 서로를 죽일만큼 싫어하지 않았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바람이여.”
“땅이여.”
휘이이익!
쿠르르릉!
바람이 분다.
땅이 흔들린다.
“맹렬하게 휘몰아쳐라.”
“맹렬하게 솟아올라라.”
세 어절의 영창.
똑같은 수준의 마법이 발휘됐다.
카잔의 마법어미를 휘슬이 따라한 것이다.
같은 수준의 마법이 발현될 때 승패를 가르는 건 속성, 그리고 사용자의 마나차이였다.
허나 땅과 바람은 크게 상성이라 할 게 없었다.
결국 남은 건 사용자간의 마나 질량과 순도 차이.
하지만 카잔의 태풍은 솟아오른 땅을 뚫어내지 못했다.
솟아오른 땅 역시 태풍을 완전하게 밀어내며 나아가지 못했다.
“오, 7서클에 오르신 것 같군요.”
“그러는 너도······.”
서로가 같은 7서클이다. 마나의 질과 양에 큰 차이가 없다.
카잔은 내심 당황했다.
자신이 알기로 휘슬은 6서클이었다.
반면 자신은 얼마 전에 겨우 깨달음을 얻어 7서클의 벽을 넘었다.
서클의 차이가 확연하다면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다.
이만한 중압감.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하지만 중요하기 그지 없는 싸움.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길 수 있다.
계획대로만 한다면, 충분히.
*
“······.”
모두가 침묵한 채 콜로세움의 정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천재지변이 일어난 듯 시끄러웠으나 어느덧 고요해졌다.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허······.’
데우스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카잔이 땅에 붙잡혔다.
바람도 더 이상 불어오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해진 상태로 카잔은 기절해버린 것이다.
마나고갈과 수많은 상처들로 인해.
게다가 저 모습은 치욕적이다.
황실의 명예를 송두리 째 박살내는 일이었다.
땅에 붙들려 양 팔이 벌려진 채로 속박당해 마치 고해를 하듯 사람들에게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단순히 승리와 패배를 나누는 게 아니라 패자를 더욱 치욕적으로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첫 대결은 제 승리인 것 같군요.”
카를로스 대공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첫 대결의 승패가 정해졌다.
애당초 전장에서 굴러온 전투마법사와 황실의 온실 속에서 자란 일반 마법사가 서로 대결을 하는 것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도 막상막하였는데 아쉽습니다. 제법 볼만 했는데 말입니다.”
아쉽다고?
아니다. 비웃는 것이다.
카잔의 상태와 달리 휘슬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막상막하는커녕 일방적으로 몰아졌다.
몰이사냥을 당하는 가여운 짐승처럼.
이로써 0승 1패.
만약 다음 경기마저 패한다면······ 패배가 확정된다.
데우스의 전신이 미약하게 떨렸다.
*
“······ 아.”
카잔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땐 전신이 바닥에 붙잡혀 있었다.
마나고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같은 7서클이지만 휘슬은 전투마법사였다. 지닌 기량 자체가 달랐다. 사람을 상대하는데 최적화되어 있었으니,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카잔에겐 버거운 상대였다.
그래도 완벽하게 분석하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이 터지며 피가 줄줄 흐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할 것을 그랬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다.
시선을 돌려 황제 데우스를, 그 뒤에 선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눈을 감아버렸다.
볼 면목이 없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땅에 전신을 붙잡혀 모욕당하고 있었다.
콜로세움의 모든 이들이 무력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의도한 것이다.
휘슬이 카잔을 욕보이고자 일부로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이만한 굴욕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굴욕 따위야 감내하면 그만이다.
감내하지 못하는 건 라인하르트와 라우넬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자신이 이기지 못했으니 둘의 책임감 역시 배가 되었을 터.
“미안······.”
이윽고, 카잔의 정신이 멀어졌다.
< 조우(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