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어떻게 생각해?”
“무엇을 말이냐.”
카잔이 조용히 묻자 라우넬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카잔은 눈을 좁힌 채 시선을 돌려 기다란 원탁을 바라보았다.
우걱! 우걱!
“크! 역시 황실의 음식은 맛있군!”
“전장에선 말린 음식만 먹지 않았습니까. 빌어먹을.”
“하, 여기 눌러앉고 싶은데?”
예의 따위는 개에게 던져준 듯 우걱대며 음식을 털어넣는 세 명의 남자들.
원탁의 위에 쌓여있던 수북한 음식들이 순식간에 동이 나고 있었다.
쩝쩝대며 손으로 음식을 퍼담는 통에 주변 기사들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매너에 대한 지적을 할 수는 없었다.
저 세남자는 카를로스 대공의 자식들이었으니.
카잔이 라우넬에게 재차 말했다.
“어렸을 때보다 더 터프해진 거 같지 않아?”
“······ 흠.”
라우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 대공의 자식들과는 몇 번 안면식이 있었다.
말이 터프하다는 거지 상스럽다는 뜻이다.
전장을 구르다보니 생긴 부작용같은 것일는지.
‘얼굴만 봐도 역겹군.’
라우넬이 싫어하는 사람은 한 손에 꼽는다.
그중 넷이 카를로스 대공과 그의 세 자식들이다.
카를로스 대공은 수십의 자식을 두고 있으나 그중 가장 재수 없는 게 저 셋이었다.
물론 실력도 가장 뛰어났지만 인성은 완전히 그 반대였다.
그리고 싫어하는 나머지 한 명은 라인하르트였다.
라우넬은 작게 혀를 찼다.
‘저 셋에 비하면 라인하르트는 귀족이지.’
하지만 최근 라우넬은 라인하르트에 대한 생각이 약간 변했다.
물론 미쳤었던 시절에는 저 셋과 쌍벽을 이뤘지만.
지금의 라인하르트는 저 셋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그나저나 라인하르트 전하는 어디 가신 겁니까? 또 숨으셨습니까?”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일까.
하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제아무리 대공의 핏줄이라고는 하나 이곳을 황실이고 궁의 내부였다.
제아무리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라도 황태자를 보고 ‘숨었냐’니.
라우넬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타베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타베론. 카를로스 대공의 둘째.
하나같이 산만 한 덩치를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타베론은 가장 재수가 없었다.
면박을 들은 타베론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저하. 농담입니다. 저희만 오면 매번 없으시기에. 그렇지 않습니까, 드예프 형님?”
“기세 좋게 소환하더니, 결국 이 모양이군.”
첫째 드예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에게 기세등등하게 소환장을 보내더니 정작 도착하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라인하르트는 겁을 먹고 황제의 뒤로 숨어버린 게다.
‘얼마나 바뀌었을지 기대했건만. 쯧쯧.’
드예프는 비웃었다.
최근 라인하르트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가 북방에도 들려올 지경이었다.
천 년 만에 등장한 정령의 주인이 되었으며 라우넬을 투기장에서 검으로 이겼다고.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허황한 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역시였나보다.
‘겁쟁이 라인하르트.’
미쳐있다며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지만 드예프를 비롯한 대공가의 사람들에게 라인하르트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도리어 자신들을 볼 때마다 겁을 먹고 위축되던 게 황태자였다.
그러니 소환장을 보내어 도발한 게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응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굳이 응한 것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라인하르트에게 다시금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오만한 황실의 콧대를 눌러주기 위해서 말이다.
숨은 걸 보면, 여전히 겁은 많은 모양이었다.
“대공은 법을 어겨서 소환된 것이라는 걸 명심해라.”
라우넬이 강조했다.
대공은 수많은 법을 어겼다.
심지어 황태자 살인교사까지 일삼았다.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하라는 말이었다.
타베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고작 증인 한 명? 명확한 증거도 없이 이러는 건 직권남용이지 않습니까?”
“의혹이 있으면 소환하여 해소하는 건 적법한 절차다.”
“그것도 조사단장이 직접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조사단장의 일을 폐하께서 하고 계시는지?”
아마도 체급 차이 때문일 것이다.
황태자가 직접 대공을 조사하는 건 여러모로 체급의 차이가 컸다.
하지만 갑자기 황제 데우스가 이러는 이유는 라우넬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다. 우리가 떠들 게 아니야.”
“라우넬 저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 전장을 오가다 보니 이 말처럼 정확한 게 없더군요. 그러지 말고 검으로 해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전처럼.”
“······ 하.”
라우넬이 모멸감에 몸을 한 차례 떨었다.
타베론과 검을 섞은 건 족히 10년도 더 된 일이다.
어릴 적 대련의 형식으로 싸웠고, 졌다.
천재라고 칭송받던 라우넬이 비슷한 또래의 아이에게 패배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진검승부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저도, 라우넬 저하도 소드마스터이니 꽤 괜찮은 싸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타베론의 입발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질 수도 있다는 생각 따위는 아예 없는 것 같았다.
확실히 타베론은 천재였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재능이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개화되었을 것이다.
자신과 달리 수년 전에 타베론은 이미 오러를 방출할 줄 알았다.
그의 형인 드예프는 그런 타베론도 어쩌지 못할 괴물이었고.
‘오만방자한 놈이······.’
타베론은 고의로 라우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허나 황제 데우스와 대공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얌전하게’ 있는 것도 라우넬의 사명이었다. 물불 못 가리고 뛰어들면 궁 내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그때 옆에 있던 드예프가 타베론을 저지시켰다.
“타베론. 무례하게 굴지 마라.”
“······ 죄송합니다, 형님.”
“온실 속의 화초는 꺾어선 안 되는 게다. 보고 감상하는 ‘관상용’에 지나지 않지.”
“맞습니다.”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것인가.
라우넬 자신을 ‘온실속의 화초’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드예프. 카를로스 대공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며 ‘신의 재능’을 지닌 천재였다. ‘강자 서열첩’에도 10위로 기록되어있을만큼 최강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타베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진정한 괴물.
검을 부딪히면 승산은 없으리라.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타베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세 손가락에 꼽을 테니.
드예프가 피식 웃었다.
“제때 물을 주고, 빛을 보게 해주어야만 겨우 클 수 있는 게 화초이지 않나. 이 황실은 확실히 아늑하고 빛도 잘 드니······내실 없이 겉만 요란하게 크는 게 가능할 테지.”
“그러니까 겁도 없이 소환장을 보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헌데 정말로 우리가 올 줄은 몰랐나 봅니다. 하하!”
꽈득!
라우넬이 쥐었던 포크를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죄가 확정될 때까지 얌전히 이들을 맞이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무력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저들을 눌러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황자인 자신을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대는 저들을 존중할 필요가 어디있단 말인가.
“겁대가리를 상실한 게 누구인지 모르겠군.”
그때였다.
뚜벅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기사들의 사이를 가로질러오고 있었다.
찬란한 은빛의 투구와 붉은 망토를 두른 기사들과 함께.
오십이 넘는 황룡기사단이다.
진즉에 해체되었다고 전해지던 저들이 어느덧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건······.
“라인하르트?”
드예프가 중얼거렸다.
그것을 보며 라인하르트가 대놓고 혀를 차버렸다.
“전하다. 호칭은 어디다가 빼먹었느냐,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버르장머리······?”
“전쟁터를 구르느라 기본적인 소양도 배울 시간이 없었나보구나. 하기야, 물과 빛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게 자랑은 아닐 테니.”
드예프를 비롯한 삼형제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저놈은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불현 듯이 나타나 도발하고 있었다.
‘숨어있던 게 아니었나?’
무서워서 숨은 줄 알았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라인하르트의 어디에도 두려움은 없었다.
도리어 자신들을 도발하고 있다.
“··· 전하. 실로 오랜만입니다.”
“역겨운 면상은 여전하군.”
······ 미친 건가?
자신의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던 라인하르트다.
미치지 않고서야.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오, 의외구나. 예의라는 어려운 단어는 안 배운 줄 알았는데.”
“······.”
진짜로 미쳐버린 건가?
드예프를 비롯한 삼형제들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그때 라인하르트가 삼형제를 번갈아보며 입을 열었다.
“검으로 이야기하자고 하였느냐?”
“우스갯소리입니다, 전하.”
“아니, 좋은 생각이다. 마침 콜로세움도 재건하였으니 우리끼리 붙어보자꾸나.”
“‘우리끼리’라면, 전하도 포함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않느냐.”
그래.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저따위 망발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황자들이 천재라고는 하나, 자신들에 비하지는 못한다.
이미 동생들이 한 번씩 이겨보기도 했거니와.
드예프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는 격이었다.
“황제 폐하와 대공 각하께서 합의하셔야 할 일입니다.”
“걱정마라. 모두 합의한 사항이니.”
“······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라인하르트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곳엔 황제의 인장과, 대공의 인장이 함께 찍혀있었다.
“내일. 시민들이 모두 보는 콜로세움에서 나를 포함한 두 황자와 너희는 대결을 펼치게 될 것이다. 승패여하에 따라 대공은 재판대에 서거나, 무혐의로 귀결될 터.”
황제와 대공의 한판승부.
대공의 처우를 두고 결판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
콜로세움에서 3:3의 매치로 진행되며 이 결과에 따라 관련 된 의혹은 무혐의로 처리되거나, 재판대에 서게 된다는 의미였다.
“크하하! 대결, 대결 말입니까? 그걸 황제폐하께서 승인하셨다고요?”
옆에서 듣고만 있던 타베론이 박장대소를 흘렸다.
질 리가 없다.
이미 타베론은 라우넬을 상대로 이겨보았다.
심지어 소드마스터가 된 시기도 더 빠르다.
하물며 자신의 형인 드예프까지 참가한다면 이 대결, 질 수가 없다.
그것을 황제가 직접 승인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내용도 가관이었다.
“‘상대를 죽여도 되는 데스매치’라는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당연하다마다.”
“크흐흐흐! 라우넬 저하. 정말 괜찮겠습니까?”
타베론은 잔뜩 흥분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대련도 아니고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대련도지지 않을진대 수많은 전장을 오간 자신이 패배할 수가 없는 싸움인 것이다.
라우넬은 표정을 굳힌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조차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아. 정말 미칠 듯이 기대되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드예프의 시선이 라인하르트에게 향했다.
자신에게 막말을 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대공 외엔 없다.
역겹다니. 예의를 안 배웠다니.
드예프가 짙게 미소를 지었다.
“······ 정말로 기대되는구나. 내일이.”
*
“······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말씀좀 해주시지요, 전하.”
한 차례 폭풍이 들이닥치고 이후 카잔이 나를 불러세웠다.
카잔과 라우넬은 복잡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말 그대로다. 폐하께서 대공과 합의했다. 이번 대결의 결과에 승복하기로.”
“드예프, 타베론, 휘슬. 셋 다 괴물입니다. 우리 중 두 명이 이겨야하는데 저는 이길 자신이 없거든요?”
최소 둘이 이겨야만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카잔은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안빈낙도하는 게 자신의 목표이거늘. 이러다간 정말 죽게 생긴 것이다.
“이길 터이니 걱정마라. 그리하면 카를로스 대공을 재판대에 세울 수 있다.”
나는 천천히 라우넬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카를로스 대공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너는 북방의 ‘평화협정단’으로 파견될 것이다. 대공이 없는 사이에 그곳에서 나머지 일을 해결하면 된다.”
“··· 그것도 우리가 이겨야만 성립되는 일 아닙니까, 형.”
“질 것 같으냐?”
“······.”
라우넬은 입을 닫았다.
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뿐.
그때, 카잔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기겁을 했다.
“아~ 아니, 잠깐만.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거야? 형?”
셋 중 카잔은 막내였다.
라우넬에게는 형이라고 불렀지만, 라인하르트에겐 항상 벽을 세웠다.
그것은 라우넬도 마찬가지였는데.
도리어 자신보다도 더 라인하르트를 혐오하지 않았나.
그런데 뭐?
“지금 전하에게 형이라고 한 거야, 라우넬 형?”
이런 미친.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카잔이 손가락을 들어 귀를 후벼팠다.
< 조우(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