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교단.
비록 과거에 비하면 그 세가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한때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저력이 있는 집단.
발자크는 그런 교단의 다섯 검 중 하나다.
교단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강자 중의 강자!
‘라인하르트 황태자. 넌 독 안에 든 쥐다.’
발자크는 노린 사냥감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발자크가 가장 자신 있는 건 ‘은신’이었다.
숨으면 찾을 수 없다.
수많은 황실의 기사단과 병사들이 자신을 찾으려 했지만 정작 수도에 있음에도 찾지 못하는 건 단순한 변장술 때문만은 아니다.
발자크는 생명체의 ‘맹점’을 이용할 줄 알았다.
‘사선 안에 놓였을 때 나는 사신이 된다.’
그래서 발자크는 맹점을 사선(死線)이라고 불렀다.
은신과 동시에 그 영역 안에 들어가면 죽이지 못한 이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발자크는 라인하르트 황태자의 사선 안에 들어왔다.
······ 고 생각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 한순간을 위해 한 달이 넘도록 변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회를 잡았건만.
그 뒤의 기억이 없다.
발자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정체 모를 지하실 안이었다.
“······ 라인하르트 황태자?”
발자크가 기함하며 눈앞에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라인하르트 황태자였다.
급히 혈법을 사용했다.
한순간 액체화되어 모든 마법으로부터 면역을 얻는 비전.
‘뭐, 뭐야. 왜 혈법을 쓸 수가 없지?’
그런데 혈법이 써지질 않는다.
마치 피가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혈법은 피를 마나처럼 이용하고, 피부에 영창 할 내용을 고대어로 새겨놓아 적용하는 술법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새겨놓은 혈법이 발동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고농도의 나노머신을 피에 함유시키고 신체 자체를 영창의 한 가지 도구로 사용한다······ 그게 혈법의 원리인가 보군.”
“어, 어떻게 된 거냐? 왜 내가 이런 곳에 묶여있는 거냐?”
당황한 발자크가 호소했다.
왜 이런 곳에 묶여있느냐고?
그야 발록이 모기 잡듯이 때려잡았기 때문이다.
애당초 이상한 낌새를 가진 녀석이 따라붙었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인간의 ‘맹점’을 파고든 것 같은데, 제로가 있는 한 내게 맹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제로가 아니더라도 초감각에 의해 이미 읽히고 있었다.
그나저나.
‘흥미롭군.’
용언에 의한 세뇌가 풀렸다.
피에 초 고동노로 함유된 나노머신이 자정작용을 한 탓이다.
이는 일반인의 1,000배에 달하는 함유량이다. 대마법사나, 심지어 내가 지닌 혈류의 나노머신보다도 수십 배 농도가 진하다.
아예 몸과 피 자체를 사람의 것이 아닌 마법의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전신에 혈법의 영창을 고대어로 적어놓은 건 정령무기와 비슷했다. ‘시동어’를 이렇게 정교하게 몸에 새기는 놈들은 악마교단 뿐이었다.
‘실버팽도 혈법을 사용했지.’
피를 이용한 술법.
실버팽은 자신의 피와 적이 흘린 피를 모조리 모아서 파괴광선처럼 쏘아냈다.
겨울의 활에 비견할 파괴력이었다.
혈법은 그것을 구체화해 기술로 접목한 것이다.
게다가······ 발자크의 ‘피’에 내가 흡수한 실버팽의 인자가 반응하고 있었다.
‘피가 끓는군.’
발자크를 보면 피가 끓는다.
정확히는 피의 ‘당김’이 있었다. 아무래도 실버팽을 흡수한 영향인 것 같았다.
뚝.
단검을 꺼내어 손가락에 상처를 내자 피가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
발자크의 두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발자크가 발록에게 얻어맞고 흘린 이마의 피가 마치 자석처럼 떨어진 피에 모여들기 시작한 탓이다.
이내 내가 흘린 피와 발자크의 피가 한데 뭉치더니, 괴물이 입을 벌리듯 내 피가 발자크의 피를 집어삼켰다.
대충 알겠다.
그것을 보며 씽긋 미소를 지었다.
‘과연. 실버팽과는 종속관계인가 보군.’
혈법을 사용하는 악마교단은 실버팽의 피를 매개체 삼아 계승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혈귀 같은 것이다.
그래서 피가 당긴 듯싶다.
“나, 나보다 높은 계급의 혈종······?”
혈종?
혈법 사용자를 말하는 은어 같은 건가?
발자크가 횡설수설했다.
“아, 아니, 황태자가 어떻게······?”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지.
혈법 사용자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발자크다.
혈법은 ‘시조’의 피를 이어 계승되고, 계급이 높을수록 더 진한 시조의 피를 갖고 있다.
이를 혈종이라 하며, 계급이 높은 혈종은 아래 계급의 혈종을 부리는 게 가능하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피와 피가 반응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아래 계급의 혈종은 자연스럽게 잡아먹히는 탓이다.
그런데 자신의 피를, 라인하르트 황태자의 피가 잡아먹었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라인하르트 황태자 역시 혈법 사용자, 혈종이라는 것!
그것도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혈종이라는 것!
‘나보다 높은 계급의 혈종은 블러드 마스터 뿐일 텐데······?’
블러드 마스터. 그만이 자신보다도 높은 계급의 혈종이다. 또한 가장 ‘진조’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악마교단과 관계가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최상위의 혈종이라니······!
“교단에서 나오셨습니까?”
발자크의 말투가 공손하게 변했다.
자신보다 높은 계급의 혈종이라면 필시 교단에서 나왔을 것이다.
“본단에서 나왔다.”
“아······! 모, 못알아봐서 죄송합니다!”
엄청난 태세전환이었다.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읍한다.
‘세뇌가 필요없겠군.’
그래도 유익한 정보는 얻었다.
발자크가 악마교단 소속의 검이라는 것.
물론 마계에 있는 칠죄교는 아니다.
예전에 신성교와 제국에 의해 소통된 악마교단의 ‘잔당’들이 모여 몇 개의 분파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카를로스 대공이 나를 죽이라고 하더냐?”
“그, 그렇습니다. 하, 하지만 본단과 관계되어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로 이런 의뢰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 그럼 증언할 수 있겠느냐?”
“예······?”
“카를로스 대공이 교단에 의뢰해 나를 죽이려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즈, 증언이요? 그럼 교단의 존재가 위태로워지지 않겠습니까?”
“너와 네가 속한 교단의 안전은 내가 책임지마.”
꿀꺽!
발자크가 긴장했다.
매수 행위를 고발했다간 자신의 생명은 물론 숨어있는 교단이 위태로워질 게 자명했다.
하지만 상대는 황태자였다.
어떻게 제국의 황태자가 교단과 관련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한 자리에 있는 자가 허언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저, 전하께서 본단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확신을 주신다면······.”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
실버팽은 혈종들의 주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분노’가 혈종의 원조다.
[‘극멸신 – 분노’가 전개됩니다.]
피부가 그림자로 물든다. 이마 위로 세 번째 눈이 개안(開顔)했다.
제로가 업데이트를 완료한 뒤 안정적으로 나는 ‘분노’의 형태로 변할 수 있었다. 이 세 번째 눈은 그 증명이었다.
피에 반응하며, 더 많은 피를 볼수록 강화되는 핏빛의 눈.
“부, 분······ 노······?”
덜덜덜덜!
발자크의 몸이 새차게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조보다 상위의 존재이며, 혈종들의 주인이 바로 분노인 것이다.
저 세 번째 눈은 ‘분노’만이 지닌 고유의 특색이었다.
그것을 최상위 혈종인 발자크가 못알아볼 리 없었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시조님을 뵙습니다. 아아······!”
시조.
그것은 ‘칠죄종’을 부르는 또 다른 말이다.
그리고 사라진 칠죄종 중 하나인 분노가 지금 이곳에 있다.
칠죄종은 등장할 때마다 대륙에 큰 위험을 야기했다.
예컨대 이전 제국과 신성교가 힘을 합쳐 악마교단을 쓸어버릴 때, 칠죄종 중 하나인 ‘질투’는 일만에 달하는 병사들과 함께 자폭했다.
도합 십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질투’가 이끄는 악마교단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죽어나갔다.
칠죄종 중 하나인 질투만이 참전했음에도 이정도인데 다른 칠죄종이 함께 합세한다면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이후 악마교단은 숨을 죽인 채 질투를 비롯한 또 다른 칠죄종이 나타나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는 지난 천 년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분노의 시조께서 마침내 나타나셨다!’
발자크는 전율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뻐하고 있었다.
칠죄교는 그 이름처럼 일곱 분파로 나뉘어 있으나, 혈종들의 분파는 천 년간 그 주인인 ‘분노’가 나타난 적이 없기에 소외되었다.
다른 분파들은 백년에서 이백년 단위로 그 시조들이 나타나 그들을 강화하고 부흥시킨 것에 비하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덜컹! 덜컹!
잔뜩 열을 올린 발자크가 발작하듯 묶인 몸을 흔들며 말했다.
“시키시는 모든 일을 하겠습니다. 저는 시조님의 충실한 종일지니! 제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부디 마음껏 부려먹어주소서!!”
*
카를로스 대공은 황실에서 들려온 소식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감히, 나를 재판대에 세우겠다?”
어이가 없었다.
근 몇 년 동안 겪은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재판에 출석하라니. 나를?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을 재판대에 세울 수는 없다.
그건 내전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니 전쟁을 죽도록 싫어하는 황제 데우스가 자신을 재판대에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 ‘의혹’만으로 말이다.
이야기를 전달한 기사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했다.
“정보에 의하면 교단에서 보낸 암살자가 직접 증언을 하겠다고 합니다.”
“정신이 나갔나보군. 허나 데우스가 이를 허락할 리 없다.”
카를로스 대공은 자신했다.
단 한 번도 그는 재판대에 서본 적이 없었다.
수많은 불법을 저질러도 그를 재판에 세울 간 큰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애당초 그가 보유한 군사력으로 인해 제국은 유지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하지만, 기사는 우물쭈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 허락했다고 합니다.”
“······ 단체로 미치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미친 게 분명하다.
자신을 재판에 세우려면, 황제 데우스가 허락해야만 한다.
그런데 허락했다는 말이다.
심지어 소환장까지 보냈다.
카를로스 대공이 마치 청첩장처럼 꾸며진 분홍색의 편지봉투를 바라보았다.
붉은색의 하트를 새겨놓고 그 하트를 화살이 관통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안에는 황태자 라인하르트가 자필로 보낸 ‘소환장’이 있었다.
「친애하는 카를로스 대공. 잘 지내셨소?
나는 잘 지내지 못했소. 누군가가 보낸 암살자 덕분에 목이 가려워서.
하여간 조사단장으로서 조사해야할 일이 있으니 당장 궁으로 달려오길 바라오.
본인이 직접 와서 해명하지 않으면 의혹이 모두 사실인 줄 알고 알아서 진행하겠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판날 전까지는 당도하길 바라오.
참. 오랜만에 재회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뜨거워는 것 아니겠소?
매일 그대를 생각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다오.
마침 이 상황에 걸맞은 시 구절 하나가 떠오르는구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미친새끼.”
쫘아악!
카를로스 대공이 소환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 카를로스 대공을 소환하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