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넬. 라인하르트가 사라진 지 벌써 38일이 지났다.”
1황비 실비아는 오늘도 라우넬을 찾았다.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라우넬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십시오, 어머니.”
“조사단장의 직무를 저버린 채 도망간 것 아니냐? 폐하에게 아뢰어 조사단장의 자리를 네가······.”
“황태자는 라인하르트입니다. 조사단장 역시 그에게 주어진 직책. 제가 그걸 가로채는 순간 황실의 기강이 무너질 겁니다.”
“기강? 떠나고 싶으면 떠나버리는 게 라인하르트다. 차기 황제가 될 놈이 마음대로 궁을 떠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알고 있다. 말이 안 된다는 걸.
만약 황제가 되고서도 이런 식이라면 제국은 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그런 자각조차 없는지 라인하르트는 매번 손쉽게 궁을 나가곤 사라졌다.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디로 갔는지, 언제 돌아올 건지 기약조차 없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라우넬은 강요받고 있었다.
수많은 귀족과 그의 어미인 실비아에게.
“··· 제발 그만, 그만 하십시오.”
라우넬은 지긋지긋했다.
옛날에는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는 꿈을 꾸었다.
라인하르트에게 밀려났을 때조차 꿈을 버리진 않았다.
하지만 콜로세움에서 라우넬은 패배한 것이다.
그날. 라우넬의 세상은 변했다.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란 말이다.’
라우넬은 귀를 막고 싶었다.
라인하르트처럼 차라리 멀리 떠나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처럼 무책임해질 순 없는 노릇이다. 만약 라우넬마저 자리를 비운다면 황실은, 제국은 그야말로 몰락해버릴 테니까.
실비아를 피해 집무실로 도망간 라우넬은 쌓여있는 서류 더미에 파묻혔다.
라인하르트를 대신하여 그의 책무와 직무를 대신 봐주고 있었다.
부조사단장인 이자르는 변방백 출신이었으니 홀로 조사단을 끌고 갈 저력은 없었다.
만약 라우넬이 나서지 않았다면 조사단은 진즉에 사라졌을 것이다.
‘조사단의 일만이 아니다. 북방에서의 평화협정에서도 소환되었거늘. 대체 넌 어디 간 거냐, 라인하르트.’
일이 쌓여만 간다.
라인하르트가 벌여놓은 일들을 라우넬은 모두 처리하는 중이다.
정작 일만 벌여놓고 사라지는 라인하르트가 짜증 나는 한편, 부럽기도 하였다.
‘··· 자유롭군.’
격식이 없다. 얽매이지 않는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간다.
광증을 벗어던진 라인하르트는 거침이 없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모두 갖고 있으면서, 그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라니.
부럽다. 그래서 화가 난다.
그때였다.
“황태자 전하 납시오-!”
“······ 허.”
바깥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에 라우넬의 정신이 확 깨었다.
라인하르트. 드디어 놈이 돌아왔다.
라우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
용혈회의 본회의까지 궁에서 처리할 일이 있었다.
그건 조사단장으로서의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대놓고 부패한 귀족들은 대부분 정리해뒀지만, 아직 부패하지 않은 척 부패해있는 귀족들의 처리는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사가 격하구나.”
궁으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라우넬이었다.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내 멱살을 쥐고 궁까지 끌고 온 탓이다.
참으로 우애 좋은 형제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라우넬이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라인하르트. 네놈은 책임감이라는 게 결여되어 있는 거냐?”
“무슨 책임을 말하는 것이냐?”
“전부다!”
웬일로 강하게 나온다.
녀석이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라우넬은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네놈의 그 무책임한 태도도 문제다. 황태자로서의 자각이 없는 게 아닌 이상에야!”
··· 황태자로서의 자각이라.
황제로서의 자각은 있지만, 사실 황태자로서의 자각은 적은 편이다.
이곳에서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직접 움직였을 뿐인데, 그게 라우넬의 심기를 건든 모양이었다.
“으음. 자각은 있다만.”
“그런데 왜!”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게냐?”
허나 나는 진정으로 라우넬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사라지면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책임한 황태자를 피력하며 점수를 딸 수도 있을 텐데.
라우넬은 숨을 가다듬더니, 이맛살을 구겼다.
“······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일은 네가 벌이는데 그 뒷감당은 내가 해야만 했어. 너 때문에 나는 정해진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미쳤으니, 너라도 제대로 커야 한다.
황태자가 저 모양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착하게 자라라. 명예를 알아라. 책임감을 느껴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들이다.
올바른 길. 정해진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르트가 미쳤으니, 그 자리를 대신할 존재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라인하르트의 대체재였다.
“황태자로서도. 조사단장으로서도. 왜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 거지? 네가 일을 벌여놓으면 그 뒷감당은 아랫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르는 거냐?”
“··· 알고 있다.”
“그마저도 안 되면! 너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냐? 죽을 수도 있다.”
“사무치게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왜 매번 너는 네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거냔 말이다!”
아아.
그런가.
그런 거였나.
녀석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이젠 알겠다.
“믿고 있었다.”
“······ 뭐?”
“내가 없으면 네가 대신 나서리라는 걸 믿고 있었다.”
조사단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일을 벌여놓은 뒤 내가 사라지면 그 뒷감당은 부조사단장인 이자르와 황룡기사단이 대신해야만 했기에.
실질적인 권력자인 내가 삼십 일을 넘게 자리를 비웠으니, 귀족들이 조사단을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나 있었을 터.
그것을 라우넬이 나서서 무마해주었다.
그럴 거라고 믿고 있었다. 라우넬은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었으니까.
라우넬은 순간 잘못 들었다는 듯 되뇌었다.
“나를··· 믿었다고? 네가?”
“어려서부터 너는 책임감이 유독 강했지.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이곳 황실을 라우넬이 절대로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나와 달리, 라우넬은 이 황실이 전부인 것이다.
황제를 비롯한 황비와 황자들 전부를 가족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영역엔 나조차 들어가 있을 것이었다.
라우넬은 그런 녀석이었다.
“라우넬.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굳이 화를 낼 필요도 없었을 게다. 그렇지 않으냐?”
화라는 것도 상대를 인정했을 때에나 내는 거다.
인정하지 않으면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라우넬은 진심으로, 생에 처음으로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이게 의미하는 건 녀석이 나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 개소리.”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고 있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북방으로 가거라.”
“또 무슨 헛소리를······.”
“협정단을 대표해 평화협정을 끝내고 오라는 소리다.”
“······!”
라우넬이 움찔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나는 마저 첨언하였다.
“카를로스 대공이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네가 해낸다면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칭송할 게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냐?”
“글쎄. 내가 가서 성공시키면 황제의 자리가 공고해질 거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만.”
라우넬의 표정이 굳었다.
협정단의 물밑작업이 시작되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대표로 이미 라인하르트가 주목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성공시키면 명실상부 차기 황제로 낙점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자신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그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나는 황제의 자리에 미련이 없다.”
“그게······ 무슨······?”
라우넬이 정지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곱씹기라도 하듯.
허나 사실이었다.
더 큰 목표가 생겼다.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저 빌어먹을 신들을 제거하는 것.
그러니 도리어 이 황제라는 자리는 내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본회의에서 정체를 들켜 죽거나, 신들에게 발각되어 죽거나, 마계에서 죽을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외의 수많은 변수가 내 목을 죄어온다.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생존을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고해도 앞으로도 운이 좋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러니.
“형이라고 불러보거라. 그리하면 이 자리가 너의 것이 될 수도 있을 테니.”
“······.”
침묵이 맴돌았다.
피식 웃었다.
그야 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원수로 살았으니까.
나도 절반은 장난으로 해본 소리였다.
라우넬과 우애 좋은 형제가 되는 상상?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그러기엔 둘 다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비록 지금의 라우넬은 겪지 않았다지만, 나는 라우넬과 실비아 황비를 직접 내 손으로 죽였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이렇게 지내는 것만 해도 기적이다.
“흐음. 그럼 없던 일로······.”
“······ 형.”
“······.”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닭살이 다 돋는군.’
피부가 올라왔다. 정말로 닭살이 돋았다.
나를 형으로 대우하는 건 죽어도 싫을 줄 알았거늘.
확실히 라우넬은 재능이 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능이.
이는 독이 되기도 하지만 잘만 사용하면 제국을 더욱 번성시킬 수도 있는 악마의 재능이었다.
라우넬의 욕망은 익히 알고 있었다.
언제든 저 욕망이 내 등을 찌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죽였으나, 이번 생에선 다른 결과를 맞이하고 싶다.
“라우넬. 그토록 황제가 되고 싶었던 거냐······?”
“제국이 무너지는 걸 볼 수는 없으니······.”
“하하. 내가 황제가 되면 제국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
침묵의 긍정이다.
입 안이 썼다.
이미 한 번 거하게 말아먹은 전적이 있었으니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나는 라우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평화협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이 자리는 네것이 될 것이다.”
*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라우넬은 방금 전의 일들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 또한 변덕이겠지.’
허나 100% 믿지는 않는다.
라인하르트의 변덕이 어디 하루이틀이던가.
이번에도 언제 그랬냐며 모르쇠할 수도 있었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런 말을 한 건 처음이다.’
황제의 자리에 미련이 없다는 말.
황태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직접 그런 의사를 내뱉은 건 처음이었다.
믿기지 않지만, 믿지 않기도 어렵다.
그래서 형이라고 불렀다. 그 역시 처음이다.
··· 서류로라도 남겨놓을 것을 그랬나.
아니다. 그 역시 위조되었다고 우긴다면 답이 없다.
‘황제.’
되기 싫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몇 번이나 벽에 부딪혀 좌절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라인하르트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런 꿈도 꾸지 않았을 터였다.
꿈을 꾸게 해놓고, 정작 라인하르트가 벽을 만들어 막아섰으니 울화통이 터졌다.
그런데 양보하겠단다.
그 자리를. 자신의 꿈을 이루게 해주겠단다.
“흠.”
라우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근 몇 달 동안 처음으로 웃어보는 기분이었다.
라인하르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라인하르트가 약속을 지킨다면.’
평화협정단의 대표로 자신을 내세우는 것.
그게 약속이었다.
만약 정말로 약속을 지키면 그때엔 라인하르트의 말은 온전하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도 약속을 지켜야겠지.’
서로가 약속했다.
그 약속의 내용을 떠올린 라우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닭살이 돋았기 때문이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싶었다.
그도 그럴 게.
―앞으론 형이라고 부르거라.
······ 이 약속을 대체 어떻게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
< 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