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99화 (99/146)

어두운 지하실.

자스민은 발가벗겨진 채 의자에 묶여있는 플릭을 바라보았다.

이미 심하게 고문당한 듯 플릭의 전신은 성한 곳이 없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눈자위는 초점을 잃었다.

“플릭. 왜 놈을 도왔지?”

“아아······.”

“일국의 왕자라는 놈이 악마 교단과 내통을 해?”

아무리 플릭이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왕자라지만 왕자는 왕자였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리겔 왕국은 한차례 크게 휘청일 것이다.

플릭은 단순히 다크엘프만 탈출시킨 게 아니다.

대죄종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길을 연 장본인이었다.

정말로 악마 교단과 내통이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만한 감량이 안 되는 놈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세뇌다. 그것도 강력한 세뇌.’

그렇다면 아마도 세뇌당한 것이리라.

하지만 세뇌가 풀리질 않는다. 성수를 쏟고 기도문을 외워도 플릭은 제정신으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크엘프를 꺼내주면 너를 왕으로 만들어준다던가?”

“그··· 으으!”

플릭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상처가 벌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밧줄을 풀려고 안 간 애를 쓰기 시작했다.

반응이 있다.

‘특정 단어에 반응하는 세뇌라······.’

계속되는 고문을 통해 특정 단어에 반응한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플릭은 어려서부터 왕이 되고 싶어 했다.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났을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욕망을 이용해 세뇌한 것이었다.

“나약한 놈.”

쯧. 자스민이 혀를 찼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이보다 한심할 수가 없었다.

욕구 하나 못 이겨서 세뇌당하다니. 이런 놈이 왕이 된다면 리겔 왕국은 녀석의 대에서 멸망할 터.

“어차피 죽을 운명이다. 너나, 그 다크엘프나.”

“아··· 아아.”

다시 원상태다.

생존. 삶은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렬한 본능이다. 그 본능조차도 눌러버리는 세뇌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플릭도, 다크엘프도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약을 치사량 이상으로 주입했으니······.’

절대로 살아날 순 없다.

만약 되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일 것이다.

삼신기인 ‘천상의 오르골’로도 뇌가 녹은 걸 복구하진 못한다.

‘그래도 재밌는 사실을 알아냈다.’

진실의 약을 사용해 다크엘프에게서 알아낸 사실들이 있다.

‘그만한 약을 투약하고도 제대로 입을 열지 않은 건 대단하지만.’

물론 온전한 대답을 이끌진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력이다.

다크엘프는 끝끝내 제대로 된 정보를 입에 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한 이야기는 꺼내놓았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건 ‘종’에 관한 것이었다.

‘반드시 지켜야 할 분이라······.’

용병대장 행세를 하며 끌고 다니는 종에 관해서 물었을 때, 그 종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허나 ‘반드시 지켜야 할 분’이라며 짤막하게 대답은 하였다.

대죄종의 알을 필사적으로 사수하던 다크엘프가 종에게 그런 말을 사용했다.

즉, 그 ‘종’이라 불린 남자는 최소 악마교단의 최상부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쩐지. 그만한 몸을 지닌 자가 그저 종일 리 없지 않은가.

‘얼굴을 보았으니 찾는 건 어렵지 않겠지.’

대륙에 있다면 기필코 찾아낸다. 대죄종이 부활했음을 공표하고 신성교에서 대대적인 수색에 나설 것이었다.

대륙의 모든 이들은 이에 협조할 것이고, 그 종을 찾아내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악마 교단. 이 벌레 같은 놈들.’

밟아도, 밟아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벌레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그 씨를 말려버리겠다.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게끔.

그녀가 뒤에 서 있는 성기사를 향해 말했다.

“성하를 직접 알현해야겠다. 그 직후 제국으로 향하지.”

잡지 못했으니, 공론화를 시켜야 한다.

대죄종의 출현은 교황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알현하여 ‘성기사단’의 공식 출전을 확언받고 그들과 함께 제국으로 향할 것이다.

제국이 협조하면 대륙 전역이 알아서 협조하게 되어있으니.

일전에 악마교단을 처리할 때도 발 벗고 나선 전례가 있는 만큼 제국도 거절하진 않으리라.

성기사가 말했다.

“저놈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저놈.

악마교단과 연관된 이상 놈은 왕자로서의 취급을 못 받는다.

하물며 신성교의 성기사인 이상에야.

“살려만 두어라.”

살아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저질러도 된다는 말.

다크엘프가 사라진 탓에 욕구를 풀지 못한 성기사의 눈이 번뜩거렸다.

*

제로투가 뇌를 수복하고 깨우는 과정에서 아렐은 봉인되어 있던 과거를 엿봤다.

다크엘프에 관한 비사와 자신에 관한 이야기까지.

그녀는 과거의 기억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땐 정령검 길라틴과 함께 도망치고 있었을 따름이다.

자신의 진짜 부모가 누구고 그 전에 무엇을 해왔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우연히 페르세포 대공에게 입양이 되긴 하였으나, 다른 다크엘프들과 달리 자신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자신은 같은 다크엘프이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섬에 있는 다크엘프들과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전투에 특화된 습득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었다.

‘발키리아.’

그 이유는 자신이 발키리아였기 때문이다.

전투를 치를 때마다 무감각, 무감정해지는 이유 또한 발키리아여서다.

발키리아는 애시르 신족을 수호하는 무기다. 무기는 감정이 섞여선 안 된다. 전투에 나설 때 자신의 생명조차 도외시한 채 적을 베어 죽이는 게 그녀의 사명이었다.

‘갈라틴.’

언덕 위 소녀의 이름이다.

소녀는 검이 되었다.

이후 검은 깨어났으나, 깨어난 검은 엄밀히 말하면 소녀가 아니었다.

소녀의 이름을 하고 있는 새로운 존재일뿐.

허나 갈라틴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봉인되어 있었다. 정령검 갈라틴의 기억 역시 온전하지는 않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렐을 지켰다. 지켜왔다.

“갈라틴 드 데바론.”

화아아아악!

세상에 빛이 번져나갔다.

새하얘진 세상 속에 짧은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오랜만이야.”

아렐은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소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한테 집중해. 넌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건 제대로 기억도 못하잖아.”

왜 잊고 있었을까.

잊어선 안 될 이를 잊고 있었다.

친구를.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을.

“정령왕이 되겠다는 약속, 잊은 거 아니지?”

아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정령무기들의 왕이 되는 것.

그리하여 정령들을 해방시켜주는 것.

그것이 그녀가 소녀와 약속한 내용이었다.

소녀가 씽긋 웃었다. 그거면 되었다는 듯.

“그럼··· 이제 깨어날 시간이야. 네 소중한 사람한테 가렴.”

*

몸이 가볍다.

아니, 가벼운 수준을 넘어서 몸이 날 것만 같았다.

잠에서 깨어난 아렐은 뒤뚱이며 겨우 바닥을 걸었다. 몇 차례 넘어진 뒤에야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몸의 상태가 예전과는 명백하게 다르다.

‘각성······.’

어떻게 자신이 살아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각성한 건 분명해보였다.

발키리아로. 전성기의 그 시절로.

자신을 가두었던 봉인의 빗장이 풀린 탓이다.

‘여기는?’

익숙한 방이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침실.

그렇다면 이곳은 섬일 것이다. 엘프들의 섬. 팔몬토 공방이 있는 곳.

하지만 집 어디에도 다른 엘프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자, 전신의 모든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용······!”

이 기운은 용이다.

발키리아와 용은 천적관계였다.

서로가 본능적으로 공격하게 되어있었다.

용은 신의 하수인이고, 발키리아는 신을 배신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애시르 신족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아렐이 갈라틴을 깨웠다.

화르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갈라틴은 스스로를 태워 그녀에게 응답했다.

그녀가 쏘아지듯 땅을 박찼다.

이어 섬의 중심부에 다다르자 ‘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색의 전신갑주를 한 인영.

검은색의 망토를 휘날리며 무감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용의 본모습은 아니지만 인간형태의 용이 분명했다.

아렐의 등 뒤로 발키리아의 날개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하얀색의 날개는 메테리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전, 말피엘이 축복을 받은 이후 얻었던 신의 날개가 바로 이것이었다.

파아아아아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렐이 용을 향해 쏘아졌다.

검은색의 용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글자가 적힌 거대한 직각의 방패가 생성되었다.

쿠우우우웅!

방패와 갈라틴이 닿자 곧 그 여파로 인해 천재지변과도 같은 울림이 생성되었다.

용을 중심으로 땅이 움푹 파여나가자 방패의 위로 글자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악마의 이름들이었다.

40여개의 이름이 더 떠오른 뒤에야 아렐의 속공이 멈췄다.

스팟-!

하지만 아렐은 멈추지 않았다.

자세를 바꿔 검을 휘두르며 용을 압박해나갔다.

전투를 벌일 때의 발키리아는 오직 적을 베는 데에만 집중한다. 베어내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용은 반드시 멸해야만 하는 적이다.

보이지도 않을만큼 빠른 검격에 방패에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용은 등 뒤에서 랜스를 꺼냈다.

구오오오오오.

용의 두 눈이 붉게 변해간다.

용의 주변으로 붉은 기운들이 수없이 피어올랐다.

그 기운만으로도 섬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전투를 치를 생각인 것이다.

섬 자체가 사라질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둘은 이성을 잃고 격분한 상태였다.

“그만.”

툭.

하지만 그러한 격분도, 한 마디에 의해 거짓말처럼 멈췄다.

“······ 전하?”

아렐은 전투를 멈춘 채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서로 인사하거라. 이제부터 동료이니.”

동료?

동료라니.

분명히 저 검은색 존재는 용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용이었다.

발키리아인 그녀가 어떻게 용과 친분을 다진단 말인가.

상극이다.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발록, 아렐이다.”

“······.”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싸우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동료라니.

발록이라 불린 용과 아렐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

“······.”

*

껍데기뿐이었던 녀석에게 룬을 넘기자, 룬과 일체화한 존재가 마침내 눈을 떴다.

룬에 모인 극한의 생명에너지와 수많은 ‘이름’들이 그에게 존재감을 부여한 것이었다.

“서, 성공했다! 드디어! 드디어 성공했습니다아아악!”

팔몬토가 목이 쉴 정도로 환희의 함성을 내질렀다.

인공생명체 호문클루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성공시킨 것이다.

물론 본 드래곤의 육체와 바알에게서 얻어낸 복제된 현자의 돌, 그리고 룬까지. 단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이 성공은 없었을 터였다.

하나의 생명창조를 위해 들어간 공이 어마어마했다.

마침내 눈을 뜨자 나는 자연스럽게 녀석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발록.”

“······ 그게 내 이름인가보군.”

발록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러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느껴진다. 내 안에 깃든 52개의 ‘이름’들이. 그들이 너를 무엇이라 부르는 지도.”

“무엇이라 부르더냐?”

“마왕.”

제대로 들었나보다.

어깨를 으쓱하자, 발록의 형태가 변했다.

두꺼운 검은색의 전신갑주를 입은 인간형태로 말이다.

이어 발록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사명은 하늘을 부수는 것. 내게 생명을 준 너를 그때까지 주인이라 부르겠다. 하지만 그 이후 나는 나의 자유를 위해 떠날 것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때까진··· 너의 명령을 듣도록하지.”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발록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커넥팅(connecting) 완료.]

[A.I ‘발록’의 모든 제어권한이 승인되었습니다.]

[감각을 비롯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제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미소지었다.

비로소 용혈회의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그리하여 마계로 향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이 난 것이다.

< 발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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