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렐. 무슨 생각해?”
아렐은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작은 동산 위.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동산 위 꽃밭에 그녀는 누워있었다.
“넌······.”
“뭐야, 내 이름도 잊었어? 갈라틴. 네 친구잖아.”
“갈라틴······?”
갈라틴. 이 역시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것은 검이었다. 눈앞의 인간이 아니라. 기억이 날 때부터 가족처럼 품고 다닌 정령검의 이름.
다크엘프인 그녀와 달리 인간인 소녀는 햇살처럼 웃어 보이며 아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멍청이. 넌 왜 이렇게 내 이름을 못 외우는 거야?”
“갈라틴······ 드 데바론.”
“오, 웬일로 풀네임을?”
기억이 돌아왔다.
소녀의 이름은 갈라틴 드 데바론.
남자같이 짧은 머리카락, 순백의 피부를 가진 아이.
가문에서 소녀는 소년처럼 키워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갈라틴은 아렐의 긴 머리카락을 부러워했다. 항상 아렐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땋아주기도 하였다.
“부럽다. 검이 되기 전에 머리를 길러보고 싶었는데.”
“정령검······?”
“벌써 내일이야! 검이 되면 우리 가문을 무너트린 용도 죽일 수 있겠지. 인류가 승리할 날이 머지않았어. 그러니까 아렐, 네가 나를 써주라.”
정령검은 특별한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인간의 생명력을 토대로하여 검을 담금질하고, 그 위에 ‘인공 에픽’을 입혀 권능과도 같은 힘을 갖게 만든다.
그리하여 정령검은 용조차도 벨 수 있다.
그러나 아렐은 혼란스러웠다.
정령무기가 만들어진 건 천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런데 왜 갈라틴이 정령검이 되기도 전에 함께한 기억이 존재한단 말인가.
애당초 정령검의 재료가 인간이라는 건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사실이었다. 어떤 마법사도, 어떤 지식인들조차도 주재료에 대한 의견은 첨예하게 갈렸다.
그러한 지식이 왜?
“정령왕이 되어줘. 너라면······ ‘애시르 신족’의 ‘발키리아’인 너라면 분명히 가능할 거야.”
애시르 신족.
그것은 다크엘프를 뜻하는 단어다.
신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신을 배신하여 지상으로 내려온 종족.
하늘을 내려오며 타락해 피부가 까맣게 변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신의 지식과 강력한 힘을 이용해 용과 악마를 죽이는 사냥꾼이다.
그리고 아렐은 그중에서도 특출난 ‘발키리아’였다.
감정이 없는 무기.
“걱정마. 전쟁이 끝나면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대. 그럼 가문의 사람들도 나를 영웅으로 취급해주겠지?”
아니다.
전쟁은 인류의 패배로 끝난다.
정령검은, 모든 정령무기는 쓰레기처럼 내버려진 채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인간으로 되돌아오기는커녕 본래의 존재조차 망각해버리는 검들이 대부분이다.
시간이 흘러간다.
다음날, 소녀는 검이 되었다.
발키리아인 아렐은 검을 들고 전장으로 나섰다.
그곳에서 최강의 용을, ‘절대자’라 불렸던 존재를 만났다.
“감정이 있는 발키리아라. 영겁을 살면서도 처음보는군.”
용의 주변으로 백에 달하는 발키리아들이 죽어있었다.
실패한 것이다.
가장 강력한 용을 죽이는데 백의 발키리아와 백의 정령검이 달려들었음에도.
하지만 쓰러진 아렐을 그 용은 즉시 죽이지 않았다.
다른 발키리아는 모두 죽였지만, 오직 아렐만은 살려두었다.
“벌써 열 두 번째다. 이제는 지긋지긋하군.”
그는 전쟁에 신물이 난 듯 보였다.
다른 용과는 다르다. 학살을 일삼으며 어떻게든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용들과는 확실하게 대조적이었다.
“태초부터 신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알아버렸으니, ‘위업’을 일부러 달성하지 않고 있었다만······ 감정이 있는 발키리아여, 너에게 묻겠다.”
절대자가 재차 말했다.
“인간을 지우는 게 이로운가? 아니면 신을 지우는 게 이로운가?”
아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특이점’인 너조차도 저들을 지우는 게 맞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절대자가 웃어보였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듯.
자신있는 목소리로.
“나는 ‘제국’을 세우겠다. 시간은 걸릴지언정 나의 피를 이은 자들로하여금 신을 죽이게 만들겠다. 그때엔 내 머릿속의 이것도 오랜 잠에서 깨어날 테니.”
절대자가 웃었다.
“그리고 너는 그 증명이 되어라. 나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은 자가 ‘이것’과 함께 깨어났을 때 너 역시 깨어나 산증인이 되리라.”
특이점과 특이점이 만나면 썩 재밌을 것이라며 절대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순간 아렐은 잠들었다.
갈라틴과 함께.
긴, 긴 잠에 빠져들었다.
*
다시 눈을 뜨자 시원한 바람이 아렐을 맞이하고 있었다.
몸이 무겁지만 이곳은 현실이다.
눈을 뜬 아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이번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깨어났느냐?”
그 앞에······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헬라와 함께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여기는······?”
“곧 팔몬토 공방에 도착할 테니 안심하거라.”
아게우스의 영지를 벗어났다.
그리고 이 방향은 팔몬토 공방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렐의 눈빛이 흔들렸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도 기억이지만, 그 전에 자신이 어떻게 깨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약을 먹고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엇을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전하에 대해서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진실의 약.
그 약은 뇌에 구멍을 낼 정도로 강력한 마약이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자라도 사실을 불게 만든다.
만약 자스민에게 라인하르트에 대해 말했다면 큰일이다. 제국의 황태자가 악마교단과 엮였으니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허나 라인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개의치 않는다.”
“예······?”
개의치 않겠다니.
이만한 중대사안을 가만히 넘어갈 생각인 걸까?
만약 사실을 알게되면 신성교는 반발할 것이다. 제국도 그 반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황태자 라인하르트를 두둔한다면 전쟁이 벌어질 건 당연지사.
신성교를 따르는 수많은 왕국들이 이 기회를 틈타 제국의 몰락을 노리리라.
“신성교는 나를 건드릴 수 없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자신만만했다.
오만하며, 호탕한 저 모습은.
‘절대자.’
제국을 세웠다고 전해지는 절대자와 같았다.
천년 전 가장 강한 용이었으며, 수없이 많은 ‘신’이 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차버린 존재.
자신의 피를 가장 많이 이은 자가 깨어날 때 그녀 역시 깨어나리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쩌면 허황된 착각일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꿈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천년 전의 발키리아라니.
갈라틴이 사실은 인간이고 친구였다니······.
그렇다면 라인하르트는 절대자의 전신과도 같은 존재 아닌가.
“조금 더 쉬거라.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
아직 그녀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니, 회복될 수가 없었다.
신성교가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극약을 먹었으니 돌아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자신을 되돌린 걸까.
그 순간 아렐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사용자의 정신과 육체를 책임지는 서포터 나노머신 ‘제로투(Zero Two)’입니다.』
『사용자가 건강할 수 있도록 저 ‘제로투’가 평생 전심전력으로 서포팅하겠습니다.』
『파괴된 세포를 재생합니다.』
『파괴된 세포를 ‘메테리얼’ 구조로 변화시킵니다.』
······.
···.
*
제로의 버전이 올라가며 생긴 기능 중 하나.
자신의 복제품인 ‘제로투’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복제할 순 없었다.
딱 하나.
이전 버전의 제로를 모방하여 단 한 번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면 과거의 나처럼 회복 불가능한 경우에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기능이 온전한 제로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아렐을 살리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신성교.’
악마 교단?
그들이 사용하는 약은 귀여운 수준이다.
반면 신성교에게 악을 멸한다는 명분으로 사용하는 약은 존재 자체를 말살해버릴만큼 극독이었다.
그런 주제에 대죄교를 악으로 규정하고 처벌한 것이 웃길 따름이다.
‘없애주마.’
신성교는 필요가 없다.
필요에 의한 악이 아니라, 그냥 악이다.
그러니 처참하게 밟아 없애버리리라.
물론 그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아렐의 상태도 한몫했다.
플릭이 데려온 아렐의 상태는 처참했다.
약에 의해 피부가 녹고, 눈도 한 쪽이 녹아버렸다.
뇌기능도 거의 멈춰서 식물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상태를 되살릴 수 있는 약은 없다.
엘릭서라 칭해지는 것조차도 아렐을 원상태로 돌려놓진 못할 것이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제로뿐이었다.
회복불가능한 상태를 회복하려거든, 제로가 직접 아렐에게 들어가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나마 복제품인 제로투가 제기능을 해줘서 다행이었지만 두 번은 못할 짓이었다.
단순히 제로의 데이터만 복제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생명력.
내 뇌세포와 심장세포를 다수 이식한 것이다.
제로투가 깨어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또한 제로투가 계속해서 에너지를 만들기 위한 양분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아렐은 부활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렐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반대로 내가 죽어도 아렐은 죽는다.
‘운명공동체라.’
생명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 셈이다.
운명공동체. 이보다 적절한 단어가 또 있을까.
팔몬토 공방이 있는 섬에 도착하자 팔몬토가 초췌한 몰골로 달려왔다.
“아, 아아! 도착하셨군요! 안 그래도 ‘본 드래곤’ 때문에 할 말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건가?”
“생명창조를 위한 에너지가 조금 부족한 것 같습니다.”
에너지 부족이라.
하기야 생명창조가 쉬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특히 용을 만드는 일이다. 그게 쉬웠다면 누구나 도전했을 것이다.
“아렐부터 옮기고 따로 이야기하지.”
“아··· 알겠습니다!”
팔몬토가 잠든 아렐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
본 드래곤은 훌륭한 껍데기다.
복사된 현자의 돌들도 훌륭한 매개체였다.
하지만, 부족하다.
부족했다.
생명을 탄생시킬 힘이. 창조할 기량이.
“겉은 완성됐습니다만··· 깨어나질 않습니다.”
팔몬토가 ‘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대한 용의 껍데기는 완성되었다.
뼈대 위에 살이 붙었다. 겉이로 보기에는 영락없는 용이다.
문제는 생명이다. 깨어나질 않는다.
계산은 완벽했지만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다. 생명의 창조를 위한 에너지는 단순히 마정석을 더 갈아넣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더욱 본질적인 힘, 생명 그 자체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만 명 정도의 생명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생명에너지라.”
만 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저 용의 에너지원으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아공간을 열어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을 본 팔몬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건 룬 아닙니까?!”
룬. 마계의 악마들이 지녔다는 그들의 생명 그 자체.
이름이 새겨진 룬을 구하는 건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도 어렵다.
애당초 악마가 죽을 때 룬과 함께 사라진다.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룬은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타인에게 건넬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룬에는 무려 50여 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악마들이다.
그 에너지는 만 명분의 생명에너지와도 필적할 것이다. 어쩌면 더 높을 수도 있었다.
두근!
그 찰나, 룬이 공명했다.
용에게 공명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게 필요한 것 같군.”
< 절대자(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