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라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알을 깨고 나온 남자는 성녀를 압도했다.
아니, 압살(壓殺)해버렸다.
하지만 말피엘을 죽일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때엔 그야말로 대죄종이라 할만한 악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지를 상실해 오롯이 분노하는 대죄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인간······.”
남자는 대죄종이 되지 않았다.
인간으로 남고자 했다.
“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을 뛰어넘어 신이 될 기회였다. 잘못된 이 세상을 파멸시키고 새롭게 시작할 유일한 기회를 차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런데도 성녀를 무릎 꿇렸다.
성녀 안에 깃든 수많은 ‘고대의 악마’들이 그를 보자 지리멸렬하며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돌아갈 수 있겠군요.
믿기지 않는다.
오랜 과거로부터 존재해왔던 ‘대악마’들.
그들은 마계의 존재다.
세상의 반대쪽, 출입할 수 없는 그곳에서 우연히 흘러들어온 그들을 신성교는 ‘악마’, 혹은 ‘대악마’라 칭하며 사냥해왔다.
그리고 실제로 성녀에게 뜯어먹혀 봉인되었던 그들의 영혼이 흘러나와 라인하르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숫자가 50에 가깝다.
공간의 악마 둠, 사멸의 악마 하이브······.
모두 신성교의 이름에 의해 처단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악마들이다.
―저의 증표를 받아주소서.
―마왕이시여. 마계의 제 아이들에게 부디 소식을 전해주십시오.
―이제 편히 쉬고 싶습니다.
또한, 그들 스스로가 라인하르트를 보며 ‘마왕’이라 말하고 있다.
이 자체가 증거다. 라인하르트가 스스로 완전해졌다는 증명이었다.
대악마들은 라인하르트의 ‘악’에 감탄하고 굴복하며 그가 마왕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이제 쉬어라.”
스르르르.
라인하르트가 말하자 곧이어 그들은 가루처럼 흩날렸다.
붕괴하고 무너지며 무(無)로 되돌아갔다.
악마들의 표식, ‘룬’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수십 개의 보석 같은 룬들이 하나로 합쳐져 돌이 되었다.
룬.
마계에서 살아가는 악마들은 모두 지닌 증표다.
심장이며 증명이기에 절대로 남에게 넘기지 않는다.
그것이 수십 개.
대악마들의 룬이 하나로 합쳐졌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무기였다.
마정석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된다.
주먹보다 조금 큰 룬의 주변으로 글자들이 떠오르며 빙빙 돈다. 악마들의 이름이 저 하나에 전부 새겨져있는 것이다.
룬을 집어든 라인하르트가 아공간 안에 그것을 쑥 던졌다.
헬라는 더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본 대죄종이 아닌 인간의 모습임에도 이런 게 가능하다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건가.
‘절대악.’
이미 완성된 것이다.
반쪽이었던 그가 홀로 완성됐다.
헬라의 두 눈에 혼란이 가득 찼다.
반쪽은 서로가 결합해야만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절대적인 법칙과도 같은 그것을 그는 깨버렸다.
자신이 아닌, 인간과 악의 결합을 택했다.
“아렐은 어디 있느냐?”
“······ 떠났어.”
물어본다면 멀리 떠났다고 말해주라고 했다.
시간이 상당히 지났으니 아렐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벌써 반나절.
살았어도, 이미 산 게 아니리라.
성녀들이 가만히 아렐을 놔둘 리 만무했으므로.
실버팽은 칠죄종 중 하나인 분노였으며 천 년이 넘게 살았다. 당연히 신성교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중 성녀에 대해선 이를 갈았다.
열두 성녀들은 하나같이 괴물이며 결코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라고.
신성교의 비호 아래 가장 잔인한 괴물이 바로 성녀라는 존재들이라고.
그중 몇몇은 용조차도 우스워할만큼 강력한 괴물이라 하였다.
라인하르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로?”
“널······ 구하려고. 적진으로 뛰어들었어.”
하지만 헬라는 결국 사실대로 실토했다.
아렐의 희생에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했다고 죽는 길로 인도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늦었을 거야. 살아있을 리가 없어.”
“살아있다.”
“살아있다고 해도······ 이미 망가졌을 거야.”
살아있다면 추궁을 하기 위해서일텐데 신성교는 온갖 ‘약’을 다루는 데에도 도가 텄다.
악마 교단의 마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수준의 것들.
실버팽이 말하길, 잡히면 그냥 자결하는 게 나을 거라고 했을 정도다.
“‘진실의 약’이나 ‘신성의 약’같은 걸 썼을 거야. 모두 하나같이 이지를 상실하게 만드는 약이야.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게 만들지만 그 결과는······.”
최악이다.
뇌에 구멍이 뚫려 이지를 상실케 하고, 정신연령을 어린아이 수준으로 되돌려놓는 극약이었다.
제정신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약이 아닌데도 신성교는 그런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순히 기분을 고조시키는 악마 교단의 약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이미 약을 먹었다면 다시 치료할 방법은 없다.
차라리 죽여주는 게, 명예를 위해선 나을 터다.
“······ 아.”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헬라의 말에도 신경쓰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온 길을 되돌아갔다.
저곳은 죽을 장소였다.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신성교를 상대할 순 없다.
복수하고 싶다면 마계로 들어가 대죄교의 교주가 되면 된다.
진정한 마왕으로 거듭난다면 그들과 함께 신성교를 부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헬라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감정이 어떨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라고 복수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혼자서도 완전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면······.’
강해지고 싶다. 완전해지고 싶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만을 받는 건 이제 질색이었다.
헬라가 라인하르트의 뒤를 따라갔다.
*
제로 Ver. 2
여태껏 ‘관리자 권한’의 등급이 격상하며 새로운 기능을 열기는 했지만 제로의 버전 자체가 올라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다는 말과 함께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육체적 자유를 느꼈다. ‘벽’을 넘었다. 더불어 나노머신의 지배력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원죄의 힘을 일부분 담을 수 있게 됐다.’
인간의 육체로는 불가능하지만 제로의 버전이 오르며 가능해졌다.
분노. 단순한 칠죄종의 힘이 아닌 대죄종이 사용하는 오리지널의 ‘분노’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만의 의지로 말이다.
더 이상 분노에 잠식되거나 원죄에게 몸을 빼앗길 걱정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나노머신의 지배력’에 대한 것이었다.
제로를 통하지 않아도 이제 느껴진다. 마치 나 자신이 나노머신이 된 기분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용언’마저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용언.
말의 힘.
말로 인해 외부의 나노머신들까지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짜 용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짜 용언보다도 더욱 쓸모가 있다.
“아······!”
“오랜만이군, 플릭.”
플릭 왕자.
내가 찾은 게 바로 그였다.
위성을 통해 숨어있는 놈을 그 즉시 찾아내었다.
애당초 아렐이 용병흉내를 낼 때부터 플릭의 위치는 실시간으로 전송받고 있었다.
혹시나 놈이 나를 발견하면 알아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령무기 칼리번을 욕심내다가 혀가 잘린 비운의 왕자.
숲속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놈을 찾아내자, 역시나 단번에 나를 알아보았다.
“아······ 아아.”
헌데, 상태가 좋지 않다.
아무래도 반쯤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친누이인 자스민이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생각에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지.
“잃어버린 혀를 되찾고싶지 않느냐?”
내가 묻자 순간 플릭의 빈 두 눈에 빛이 돌아왔다.
감정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녀석의 감정을 자극했다.
“내가 너를 왕으로 만들어주마.”
“······!”
“네가 나를 따른다면 혀를 되찾고 리겔 왕국의 왕도 될 수 있을 터.”
끄덕!
플릭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언과도 같은 말의 힘과 감정을 움직이는 권능.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사용하면 이런 것도 가능해진다.
세뇌.
그것도 용언과 달리 제한시간이 없는 절대적인 세뇌였다.
사실 용언이라는 것은 ‘제약’과도 같은 것이다. 용언에 당한 상대가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멈추거나, 죽이는 것 등 나노머신을 억제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허나 칼바나스의 ‘감정을 움직이는’ 권능과 함께 섞어 사용한다면 자발적인 세뇌를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성기사나 성녀 같은 정신력이 강한 자들은 쉽지 않겠지만, 플릭처럼 피폐하며 망가진 인간을 움직이는 정도는 쉬운 일이다.
감정을 건드리고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크엘프 아렐을 구해라. 그녀를 구하는 것만이 너의 사명이니.”
“예에······.”
취한 듯 다시 몽롱한 눈빛으로 플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벌집에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아렐까지 구하는 건 나 혼자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양쪽 모두를 공략해야 한다.
그리고 플릭 왕자는 내부를 공략하기에 안성맞춤인 인재였다.
*
“하, 하늘이!”
“대죄종이다!”
“자스민 성녀님! 놈이 나타났습니다!”
자스민이 인상을 구겼다.
뒤따라간 소마는 온데간데 없이 대죄종이 나타났다니.
‘그 할망구가 죽었다고?’
소마는 괴물이다. 성녀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악마 사냥꾼이었다. 오십에 가까운 대악마를 먹어치운 그 괴물이 죽는건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런데 뒤를 쫓던 소마 대신 대죄종이 나타났다면 결판이 났다는 의미다.
······ 소마가 죽었다.
자스민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쟂빛의 하늘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예전에 용과 싸우던 검은색의 인영이 재차 나타나 병사들을 휘젓고 있었다.
자스민이 외쳤다.
“전원 성수를 몸에 뿌리도록!”
성수(聖水).
신성력이 깃든 그 물은 악한 모든 힘을 배제시킨다.
병사와 성기사들이 주머니에서 작은 물병 하나를 꺼내들어 몸에 뿌렸다.
그러자 수많은 보이지 않는 손들도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같은 수에 또 당하지 않는다.’
대죄종을 잡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신성교의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놈은 독안에 든 쥐였다.
“어딜 간 거냐?”
“그, 그게,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소란이 이는 곳으로 성기사들과 함께 다가가자 대죄종의 모습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공격하는 척 다가오더니 그새 모습을 감춘 것이다.
‘쥐새끼같은 놈.’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수색범위를······.”
“아악!”
“살려줘!”
또 반대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잘 들리지도 않을 거리지만 대죄종이 저쪽에 있는 건 확실해보였다.
급히 자스민이 성기사들과 함께 소란이 난 곳으로 이동했다.
‘··· 또?’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신이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귀신처럼 모습을 감췄다.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다시 본진으로 돌아왔을 때 자스민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했다.
“다크엘프가 없어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 그게··· 플릭 왕자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일반병사들이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성기사들 대부분은 대죄종의 사냥을 위해 대동했으니, 이곳에 남은 건 일반병사들 뿐이었다.
왕국의 병사들도 많았다.
당연히 왕국의 왕자인 플릭이 막무가내로 데려갔다면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플릭은 도망쳤다.
도망친 놈이 갑자기 나타나선 다크엘프를 왜 데려간단 말인가.
부르르르!
감정이 격해지자, 자스민의 오른손이 더 크게 부풀었다.
촤악!
자스민은 그대로 병사의 얼굴을 오른손으로 날려버렸다.
“히, 히익!”
“흐읍!”
순식간에 머리가 날아가자 주변 병사들이 기겁하며 굳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스민은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로 옆에 선 병사에게 물었다.
“······ 플릭. 그 빌어먹을 놈은 어디로 갔지?”
< 구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