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95화 (95/146)

나는 수십, 수백, 수천 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선물이라는 거지?

【^&^$#&^%#^%】

박문식 박사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원죄가 나타났다.

원죄는 폭발하듯 세계를 잠식하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

거대한 그림자. 그림자는 조금씩 비대해지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박문식 박사에 의해 갇혔던 게 원한이 큰 모양이었다.

“내 몸을 네놈에게 줄 순 없다.”

구오오오오오!

모든 걸 뒤덮는 거대한 손이 나를 파리 잡듯이 찍어눌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함께 뼈와 살점, 뇌수가 사방에 터져나갔다.

나는 죽었다.

*

【#$%#$%[email protected]#%$&!!!】

광음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미친.’

다시 눈을 뜨자 내 앞에 원죄가 있었다.

그래. 이곳은 가상현실이다.

하지만 방금전 겪었던 고통은 현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방금 그 한 방으로 이지를 상실했을 것이다.

‘선물이라는 게 둘이서 알아서 해결을 보라는 거였나.’

원죄를 완전히 봉인하면 원죄의 힘을 온전하게 빼앗을 수 없다.

하지만 굴복시키면 원죄의 힘을 온전하게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영적 영역에서의 크기다. 이곳은 내 공간이지만 동시에 원죄의 공간이기도 했다.

놈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원죄여. 거래하지 않겠.”

푹!

*

“······ 거래하지 않겠느냐?”

127번째.

내가 죽은 숫자다.

그만한 죽음에 이르러서야 나는 겨우 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아무리 고통에 익숙하다지만 죽음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이쯤에 이르자 나 역시도 살짝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허나 변화가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거라!!!!】

동시에 놈의 말도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문제는 그래도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원죄가 다시 팔을 휘둘렀다.

“잠깐.”

푹!

*

대죄종이 탄생했다!

신성교가 발칵 뒤집혔다.

여태껏 칠죄종이 나타나 세상을 뒤흔든 적은 있지만 대죄종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인류 역사상 처음이었던 탓이다.

‘대죄종의 탄생은 실버팽의 출현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게우스의 영지로 되돌아온 자스민의 뒤에는 1만 대군이 있었다.

칠죄종 중 하나만 나타나더라도 큰 이슈가 됐을 것이다.

하물며 칠죄종의 우두머리인 대죄종, 악마교단의 본신인 존재가 나타났다면 신성교와 대륙 전체가 나서서 반드시 멸해야 하는 존재였다.

자스민이 교단에 사실을 고하자, 그 즉시 신성교의 교황과 추기경들이 발의해 파병이 이루어졌다.

덕분에 이례적인 속도로 1만의 대군이 리겔 왕국에 무혈입성한 것이다.

그 선봉장으로 자스민이 선택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다른 성녀들보다도 내가 더 신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할 때다.’

신성교에는 총 열두 명의 성녀가 존재한다.

자스민은 12번째 성녀로 신성교 자체에서 크게 영향력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대죄종을 직접 잡을 수만 있다면, 신성교 내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지대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한 준비도 했으니.

‘신의 오른팔.’

비록 성검과 오른팔을 실버팽에게 먹혔지만 지금 자스민은 신의 축복으로 새로운 팔을 얻었다.

삼신기(三神器).

심들이 만들었다 전해지는 세 개의 무기.

그중 하나인, 신의 축복을 직접 내려주는 장치인 ‘천상의 오르골’.

천상의 오르골은 신성교에서도 가장 은밀하게 보관되어 있으며 그 사용 권한은 오로지 교황에게만 있다.

죽은 사람조차도 살릴 수 있다고 전해지는 천상의 오르골은 신의 축복으로 모든 것을 더 강하게 재생시킨다.

‘지금이라면 그 빌어먹을 늑대도 죽일 수 있다.’

천상의 오르골로 축복을 받은 자스민의 오른손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있었다.

이 힘이라면 실버팽 조차도 단번에 죽여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신비의 용과 대죄종까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곳에 대죄종이 있을 리가 없는 거 같은데~”

“······ 닥쳐라, 소마.”

소마 불린 또 다른 성녀.

그녀는 황갈색 피부의 여인이었다.

소수민족 출신인 그녀는 성녀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였다.

갈색 머리칼과 탱탱한 피부는 이십 대의 그것과도 같지만 실제 소린의 나이는 이백이 넘는다.

실제로 칠죄종 중 한 명을 죽여본 경험이 있으니 대죄종 사냥에 직접 나선 것이다.

“자스민. 그 못생긴 오른팔처럼 입도 험하구나~ 무서워라~”

“······.”

자스민은 입을 닫았다.

마음 같아선 쳐 죽이고 싶지만 대죄종을 잡는 게 먼저였다.

그때 소마가 실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대죄종이 다 죽였다고 하지 않았어~? 왜 다 살아있는 거야~?”

이번 대죄종 토벌에 참여한 병사 중에는 기존 영지의 병사와 용병들도 있었다. 신성교에 의해 강제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자스민은 대죄종이 용을 죽인 뒤 이곳 영지의 사람들도 전부 죽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자 대부분 어딘가로 도망쳤을 뿐 살아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네 동생, 플릭이던가? 혀가 잘렸다는 그 애는 또 어디로 간 거야~? 설마 도망? 왕자가?”

빠드득.

자스민이 이를 갈았다.

소마. 마음 같아선 저 입만 산 년을 갈아먹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사실이었다. 아무도 안 죽었다는데 정작 왕자인 플릭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겁쟁이 자식······.’

실망이다. 죽어서 책임을 진 것도 아니고, 무서워서 도망치다니.

왕궁으로 돌아갔다면 소식이 들려야 하건만 그조차도 없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동생이었다.

“대죄종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네~ 예전에 먹은 칠죄종은 맛이 없었거든.”

소마가 혀로 입술을 쓸었다.

제국과 신성교가 손을 잡은 대대적인 악마교단의 소탕.

그 과정에서 몇몇 칠죄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을 소마가 죽였고, 먹었다. 그 결과 소마는 영원한 젊음을 얻었다.

“그나저나 대죄종을 먹으면 더 젊어지려나? 여기서 더 예뻐지면 어떡하지!”

··· 미친년.

자스민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삼켰다.

악을 먹어 정화한다는데, 개소리가 따로 없다.

식인을 그따위 말로 포장할 뿐.

실제로 성녀는 악을 먹으며 강해질 수 있다. ‘악’한 존재를 직접 소화시켜 악의 힘을 가진다.

그리하여 칠죄종이나 대죄종, 혹은 고대의 악마들같은 ‘거대한 악’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성녀가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런 식(食)의 행태를 부정하며 건실한 믿음만을 추구하는 자들도 있었다.

자스민도 그중 하나였기에 소마와는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소마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양손을 모았다.

“곤란한데~”

하아.

‘할망구.’

목을 치고 올라오는 단어를 겨우 눌렀다.

이는 소마 앞에선 절대금기어다.

말했다간 둘 중 하나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킁. 킁.

소마가 눈을 감고 냄새에 집중했다.

곧이어 소마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갔다.

“······ 뭐야. 맛있는 냄새가 나잖아?”

두 눈엔 광기와 탐욕이 가득하다.

칠죄종을 직접 마주했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반응이다.

먹을 것, 악의 냄새를 맡는데 특화 된 소마가 저런 반응을 한다는 건 곧 대죄종이 근처에 있다는 소리였다.

“아게우스의 늑대다!”

“검은색 알을 매고 도망친다!”

그때 숲의 너머에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소마가 자스민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자스민~ 알지? 먼저 잡는 사람이 먹는 거야~?”

*

“하악······ 하아악···!”

아렐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신성교의 추적은 집요했다. 영지를 벗어났음에도 끊임없이 뒤를 쫓았다.

특히 두 성녀들과 성기사들은 아렐로서도 벅찬 것이었다.

“늑대들도, 다 죽었어······.”

헬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가족들, 평생을 동거동락한 늑대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단 한 마리의 예외도 없이.

오로지 헬라가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다.

꽈아악!

헬라는 주먹을 쥐었다.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주먹 사이에서 피가 흘렀다.

아렐이 말했다.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아닙니다.”

“······ 알아.”

이대로 잡히면 늑대들의 희생도 물거품이 된다.

결국 아렐은 헬라에게 알을 넘겼다.

“뭐하는 거야?”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저놈들을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 잘 부탁드립니다, 헬라.”

검은 알.

라인하르트는 아직도 알에서 부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잡히면 다 죽는다. 누군가 한 명은 나서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

헬라는 고개를 저었다.

“너······.”

“시간이 없습니다. 부디.”

아렐이 고개를 숙였다.

촤앙!

저 멀리서 날아온 화살을 아렐이 검을 들어 잘라냈다.

아렐이 이를 악물었다.

벌써 지척까지 따라붙은 것이다. 늑대들이 시간을 끌었음에도.

“혹시 깨어나셔서 저에 대해 묻는다면······ 그냥 떠났다고 해주십시오.”

“그걸 말이라고 해?”

“제 가족을 다시 만나게 해줘서 감사했다고만······ 전해주십시오.”

지이이이이이이잉!

아렐의 검, 정령무기 갈라틴이 울었다.

그녀의 가족과도 같은 갈라틴을 다시 만나게 해준 건 라인하르트였다.

갈라틴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녀 역시 생명을 바쳐야할 때였다

아렐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헬라에게 말을 전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은신처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네가 가.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쉬이익!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렐의 신형이 바람처럼 적진영으로 쏘아졌다.

빠르다. 그리고 비장했다.

“아.”

헬라가 손을 뻗었으나 아렐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죽을 거다.

그것도 편히 죽지는 못할 것이다.

실버팽에게 신성교의 방식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다.

악을 먹는 성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방식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

산 채로 잡아먹어 그 힘을 취하는 게 어떻게 성스러운 존재란 말인가.

하물며 악이라면 어떠한 방식으로 다뤄도 면죄부를 받는다.

악이라고 규정되면 인간으로선 차마 하지 못할 짓도 서슴치 않는다.

그야말로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신성교의 방식이었다.

또한 그들의 패악적인 행태는 ‘신성교’라는 이름으로 감춰지고 있었다.

자신의 입장에선 신성교야말로 악이었다.

그러니 저 다크엘프 아렐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막지 못했다.

스스로 죽으러 간 것이다.

오직 주인을 지키고자.

자신을 지키고자 죽은 실버팽과 다른 늑대들처럼.

그것을 알기에 막을 수 없었다.

‘왜 나만 나쁜년으로 만드는 거야?’

헬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같아선 그녀 역시 달려가고 싶었다.

늑대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헬라가 검은 알을 감싼 천을 등에 두른 채 등을 돌렸다.

아렐의 숭고한 희생을 쓸모없게 만들 수는 없었기에.

*

순간 무언가가 보였다.

아렐이 나를 위해 죽음을 자처하고, 마침내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수많은 죽음 끝에 꿈이라도 꾼 것일까.

만약 꿈이라면 지독한 꿈이다.

【이 따위 장난에 놀아나지 않는다, 인간이여!】

원죄의 말소리가 들린다.

죽여도, 죽여도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원죄도 깨달은 것 같았다.

하지만 깨달음은 놈에게만 온 것이 아니었다.

내게도 왔다. 본질적인 깨달음이.

그것은 박문식 박사가 말한 ‘선물’에 대한 답이었다.

“······ 나도 장난을 칠 때가 아니라서 말이다.”

곧이어 나의 몸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없이 커지고, 또 커지며 마침내 원죄와 같은 크기가 되었다.

실제였다면 나는 원죄를 이길 수 없다.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나는 결코 놈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가상공간이다.

가상. 가짜. 모든 걸 지어내고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의 영역!

박문식 박사는 이 영역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지녔었다. 그 힘으로 원죄마저 가볍게 봉인했다.

그가 했던 걸, 나라고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내게 힌트를 줬던 것이다. 이곳에선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힌트를.

이곳의 진짜 주인은 제로도 박문식 박사도 아닌 나라는 것을.

【무엇이냐. 갑자기 영혼의 크기가······?】

원죄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만큼 나는 더 다가가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하마. 거래를 하자.”

오직 이곳에서만, 나는 놈을 이길 수 있다.

< 영혼의 크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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