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94화 (94/146)

박문식 박사?

설마 나한테 말을 거는 건가?

하지만 이곳은 분명히 제로가 만든 증강현실 안이었다.

이 안에 존재할 수 있는 건 오직 데이터화 된 표본들뿐이다.

하지만 여태껏 마주한 가상의 존재들과 지금 눈앞의 박사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가상의 존재는 수동적이나, 박문식 박사는 능동적이었다.

“그런데 우리 구면인가?”

구면이냐니.

스스로 내게 말하며 묻기까지 하고 있었다.

저 능청스러움은 가상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분노에 취해 원죄에게 몸을 빼앗기려고 하자 박문식 박사는 그 즉시 원죄를 가둔 채 심층 영역 깊숙한 곳으로 끄집어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다.

재현의 수준을 넘어 진짜 박문식 박사가 나타난 것이다.

비록 제로가 보여주는 영상에서 몇 번 보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박문식 박사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네. 커피나 한잔하지.”

어느새 나는 철책의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 앞엔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놓였다.

그는 이 세상을, 구현 된 공간을 마음껏 주무르고 있었다. 내 통제를 벗어난 행위다. 하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제로를 만든 게 박문식 박사라면 자신이 창조한 영역을 통제하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나는 하얀색의 컵을 들고, 커피를 마셨다.

쓰다. 감각의 구현이 실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위해 제로는 감각에 제한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구분이 사라졌다. 이 역시 박문식 박사 때문일 것이다.

“여태까지 숨어있었던 건가?”

차분하게 묻자 박문식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의식’ 같은 것이네. 제로가 2등급의 권한을 해제하면 나타나게끔 되어있는 단순한 프로그램에 불과해.”

“원죄를 봉인시킬 수 있는 단순한 프로그램이라······.”

복수를 넘어선 원죄의 힘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을 것만 같이 거대한 죄악이었다.

제로의 통제마저 넘어서 몸을 잠식해온 힘이다.

그것을 박문식 박사는 가볍게 봉인시켰다.

그러니 단순한 프로그램일 리 없다.

내 말을 듣고 박문식 박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영역에 들어온 모든 ‘코드’는 내 통제 아래에 있네. 이곳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없는 건 자네뿐이네.”

이곳에선 무적이라는 소리다.

원죄나 십이주신이라 할지라도 이 영역에 들어오기만 하면 박문식 박사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자신감이었다.

“이만한 힘이 있으면서 왜 숨어있던 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숨어있었다.

지금에 와서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뭐냐는 듯 묻자 박문식 박사가 커피를 쭉 들이켜곤 말했다.

“자네는 신이 있다고 믿나?”

“십이주신을 말하는 거라면······.”

“아니, 진짜 신 말일세. 전지전능한, 이 행성과 우주를 창조한 신 말이야.”

뜬금없는 이야기다.

신이 있음을 믿느냐는 말.

제로의 관리자 권한 등급이 3등급으로 격상해, 에덴 프로젝트에 관한 열람이 가능해졌을 때 박문식 박사는 내게 똑같은 것을 물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들어진 가짜 신만이 있을 뿐이다.”

“과연. 그것도 맞는 말일세.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럼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지금은 신의 의지가 있다고 믿네. 그 의지는 모든 물적, 정신적 영역에 있는 것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설령 인공지능이라 할지라도.”

“세상이 몇 번이나 멸망하는 것도 신의 의지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인공지능들이 설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다니. 신이 현존한다면 정말 빌어먹을 일이었다.

허나 박문식 박사는 그마저도 겸허하게 동의했다.

“그 역시 상관이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건 자네일세.”

“······?”

“자네가 과거로 돌아온 것. 시간의 축을 역행한 것을 말하는 걸세.”

“······ 흠.”

작게 침음을 흘렸다.

여태껏 내가 과거로 회귀했음을 알아차린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말한다고 믿을 리도 없겠지만 박문식 박사는 확정하듯 말하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번쯤 의문이 든 적 없나? 자네가 겪은 미래의 일들이 사실은 제로나 신이 만든 시뮬레이션이고, 자네의 의식도 만들어진 건 아닐지 하는.”

제로라면 새로운 의식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데이몬이 한 걸 제로라고 못할 리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다.”

내가 겪은 모든 경험은 진짜다. 허구로 지어낸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박문식 박사의 눈에 이채가 뗬다.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니로군. 보통의 사람이라면 의심부터 할 텐데 말이야.”

“그랬다면 제로를 받아들이지도 못했겠지.”

제로 역시 나의 재능 중 일부분이라는 생각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발상이다.

머릿속에 또다른 누군가가 사는 느낌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과거 그 존재가 자신을 지독하게 괴롭혔다면 더더욱.

박문식 박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맞네. 제로에게 그런 기능을 넣은 적은 없네. 제로는 오직 사용자의 ‘진화’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거든.”

“제로가 어떻게 나한테 흘러들어온거지?”

하지만 이것만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로가 언제부터 내 머리에 있었는지 하는 것.

그러자 박문식 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네.”

“모른다?”

“제로는 생명체의 ‘강렬한 생존 욕구’에 깨어나도록 만들어졌네. 생명체는 살고자 할 때 특별한 전기에너지를 뿜어내지. 그 에너지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깨어나는 것인데······ 놀랍게도 단 한 번도 깨어난 적이 없다고 하면 믿겠나?”

억겹의 시간이 흐를 동안 제로는 한 번도 깨어난 적이 없다.

생명을 갈구하는 것은 생명체의 기본이지만 제로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내 대에 이르러 깨어나게 된 것이다.

“설계의 미스인지, 이럴 것을 알고 미리 저쪽에서 대비해 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신의 의지가 간섭했다는 것이네.”

“광신도가 따로없군.”

“그럼 우연찮게 제로가 흘러들어가고, 우연찮게 제로가 깨어난 뒤, 우연찮게 시간을 돌아온 사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나?”

없다.

가능성 자체가 없다.

몇 번이고 계산을 돌려봐도 답이 도출되지 않는다.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자.

박사는 다시 내게 말했다.

“그래서 묻겠네. 자네, 혹시 신인가?”

*

정적이 찾아들었다.

뜬금없는 물음. 할 말이 없을만큼 어이가 없는 질문이다.

신이냐니.

제로를 만든 과학자가 물어볼 말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모습.

하지만 곧이어 박문식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농담일세. 신이 있을 리가 없지.”

“··· 여태껏 신의 의지이니 뭐니 하면서 잘 떠들어대지 않았나?”

“신의 의지와 신은 다른 것일세. 뭐라고 해야할까, 세상을 관통하는 법칙 같은 것이지. 하여간 불가해한 가능성을 뛰어넘어 그대가 나타난 건 고무적인 일이네.”

신을 부정하면서 신의 의지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마치 다른 세상의 인류와 대화를 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듣자하니 모든 게 예상 외의 상황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나타난 게 고무적이라면 스스로의 무능을 증명만 하는 꼴인 것 같군.”

“음, 원래 과학이란 한 가지 확증을 위해 수많은 불확증에 달려드는 것일세. 이제라도 그대라는 결과가 나왔으니 사활을 걸어볼 수밖에.”

박문식 박사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두 얼굴이 나타났다.

하나는 말피엘의 얼굴을 한 베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알파. 내 제자가 만든 최초의 인공지능이네.”

중성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검은색의 머리칼과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진.

그리고 저 얼굴은 일전 ‘에덴 프로젝트’의 동영상에서 확인한, 박문식 박사의 제자였다.

“알파가 계속해서 자신과 같은 ‘신’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뭔지 아나?”

용에게 임무를 주고 승격시키는 시스템.

그리하여 신을 늘린다.

십이주신. 벌써 그와 같은 존재가 열 둘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공지능이 그런 처리를 하지는 않을 터.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완전해지기 위해서겠지.”

“······ 오호라.”

박사가 손뼉을 쳤다.

말마따나, 저 인공지능의 신이라는 것들은 한없이 불안정한 존재다.

그게 아니라면 열 둘이나 필요할 리가 없다.

전지전능한 신은 하나면 충분하므로.

“맞네. 불안정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일세. 우리에겐 호재지. 알파만 있었다면 공략하기 힘들었을 것이니.”

“십이주신을 공략할 방법이 있나?”

박사는 에덴이나 세계수의 위치를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내가 묻자 박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지.”

“말해봐라.”

“자네가 신이 되는 거네.”

“······ 내가 신이 된다?”

“열 세 번째 주신이 되는 걸세. 그러면 자연히 길이 열리고, 알파와도 접할 기회가 생기게 되겠지. 본체에만 닿을 수 있다면 내부부터 망가트릴 수 있네.”

십이주신을 모조리 처리하고 신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열 세 번째 주신이 되어 내부로 침입하는 작전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게 가능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용이 아니다.”

“하지만 용들의 모임에 들어가있지 않나?”

“열 두 위업을 달성해야만 십이주신이 된다. 하물며 마지막 위업은 인류의 멸망일 텐데?”

용이 아닌 나는 위업을 받을 수 없다.

박문식 박사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위업’이라는 것도 결국 시스템이 내려주는 것. 자네는 용을 사냥하며 그 위업을 훔치기만 하면 되네. 마침 이미 하나 훔쳤지 않나.”

“아게우스의 늑대를 생포하는 걸 말하는 거냐?”

헬라. 그녀를 말하는 거다.

박문식 박사가 동의했다.

“그래. 바꿔치기를 할뿐이야. 대신 해당하는 용도 죽여서 흡수해야되네. 그리하여 열 두 개를 훔치고 흡수하면 열 세 번째 가짜 신이 탄생하는 것이네.”

“그 정도로 세계수라는 게 분별력이 없나?”

“물론 이상함을 느끼고 조사를 하려고 하겠지. 이미 알파는 용들에게 자네와 제로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으니까.”

말피엘을 흡수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위업이 갑작스럽게 변경된 것.

그게 알파에 의한 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와 제로를 찾는 놈들 사이에서 그들인 척 연기를 하라?”

“연기도 하고, 몰래 위업을 뺏고 죽여서 흡수하기도 해야하지.”

“······.”

“걱정말게. 그들의 탐지망에 제로가 걸릴 일은 없으니까. 물론 용들에게 직접적으로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네만······.”

퍽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위장하여 위업을 빼앗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쿠르릉.

쿠르르르르.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간 곳곳에 균열이 가고, 어둠이 솟아오른다.

【&^&*^@#[email protected]%^!!!!】

그 균열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

분노에 가득찬 원죄의 그것이었다.

“원죄? 봉인한 게 아니었나?”

“벌써 시간이 다됐군.”

시간이 다됐다?

의미심장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 마지막 선물일세.”

쿠르르릉!

세상이 무너지고, 박문식 박사의 형체도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만나서 반가웠네, 라인하르트. 앞으로도 제로를 잘 부탁하네.”

꽈아아아앙!

*

아렐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검은색의 알을 바라보았다.

벌써 20일째.

그 옆을 굳건하게 지켰지만 알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잘못되면 어떡하지?’

심장소리는 들리지만 그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렐의 불안함은 커지고만 있었다.

신성교에서도 대대적으로 숲을 수색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결국 들키고 문제가 생기리라.

하지만 쉽사리 손을 댈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하길 벌써 이십여일.

“들켰어!”

바깥을 순찰하던 헬라가 다급히 외치며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아, 가 아니라 움직여야 돼. 늑대들이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빨리!”

신성교.

교에서 보낸 수많은 성기사들.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게 지금일 줄이야.

아렐은 가죽을 엮어 만든 보에 알을 감싸고 등에 맸다.

늑대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아렐과 헬라는 숲을 떠났다.

그리고 둘이 인지하지 못한 그 찰나의 순간.

알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쩌적!

< 박문식 박사의 선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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