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스민 왕녀를 비롯한 성기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버린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남은 이들은 경직된 채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라진 신비와 절대악의 싸움.
마치 신들의 전투를 보는 것만 같았다.
“······ 어느 쪽이 이겨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거지?”
침묵을 깨고 한 남자가 말했다.
다시 없을 장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저마다의 생존이다.
표면상으로는 당연히 용이 이겨야 살 수 있겠으나, 내심 어느 쪽이 이겨도 살아남기 어려우리란 생각이 들었다.
용과 악은 그들의 생명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했던 탓이다.
쿠우우우웅!
꽈아아아아아아앙!
‘······ 살 수 있을까?’
싸움의 여파에 휩쓸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나무며 바위 따위가 산산이 조각나는 중이었다. 숲이었던 공간은 그 원형을 대부분 잃어가고 있었다.
물론 파괴의 원흉은 용이었다.
용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 곳곳에 박살 났다.
수없이 내리치는 번개와 태풍은 멀리서 보더라도 압도적인 수준이다.
자스민 성녀가 절대악이라고 부른 저 존재보다, 실질적으로 주변을 파괴하며 불사르는 게 바로 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누가 더 나쁘고 선한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휩쓸려 죽는다면 그 원인은 대부분 용에게 있으리라.
‘라인하르트 전하.’
두 절대자의 싸움을 지켜보던 아렐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저 절대악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남자가 라인하르트라는 걸 그녀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늑대와 인간들의 전투가 시작되자 사라진 그가, 돌연히 절대악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일순간 착각인가 싶었으나 착각일 리 없었다.
모습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저 특유의 느낌만은 변하지 않았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아는 다크엘프였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왜?’
절대악. 칠죄종.
악마교단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과 이종족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악마교단의 전신이 바로 라인하르트란 말인가?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신성군주이기도 했다.
제국의 황태자였으며, 제국은 악마교단을 처단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를 한 곳이었다.
만약 라인하르트가 악마교단의 전신인 대죄종이라는 게 알려지면 대륙 전역이 공격해올 것이다. 그를 죽이고자 모두가 들고 일어설 것이었다.
그러니 착각이리라. 그가 악마교단의 전신일 리가 없다.
“어? 우, 움직인다!”
“도, 도망쳐!!”
그 순간이었다.
하늘이 열리며, 인간형으로 변한 용이 쓰러졌다.
몸을 얽매던 주박이 풀리고 사람들은 자유로워졌다.
오직 아렐, 그녀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
아렐이 탄식을 내질렀다.
라인하르트 역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렐은 전속력으로 숲을 가로질러 라인하르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라인하르트에게 달려온 또 다른 인영과 마주쳤다.
‘아게우스의 늑대.’
둘은 동시에 지면에 떨어지는 라인하르트를 받아내고는,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넌 뭐야?”
“······.”
아렐 역시도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라인하르트와 아게우스의 늑대와의 연결점 또한 전혀 모르겠다.
왜 아게우스의 늑대라 불린 늑대소녀가 라인하르트를 구한 것인지도.
‘다크엘프?’
그리고 그것은, 아게우스의 늑대라 불리는 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신을 갑옷으로 가리고 있으나 헬라의 눈과 코를 속일 순 없었다.
엘프. 그것도 희귀종이라 불리는 다크엘프가 분명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보이나 그런 건 헬라가 알 바가 아니었다.
실버팽이 자신의 목숨을 이 남자에게 걸었다.
생명과 권능까지 넘겼다.
그녀의 안내자로. 보호자로.
마계의 본단에 자신을 데려갈 때까지 그는 자신의 것이었다.
“이 사람은 내 ‘짝’이야. 그러니 내가 데려가야겠어.”
······ 짝이라니.
순간 아렐의 눈동자가 더 격하게 요동쳤다.
라인하르트가 갑자기 아게우스의 영지를 찾은 게 그녀와 용 때문인 것을 확실해 보인다.
어쩐지. 느닷없이 타국의 영지에 온 이유가 이것이었나.
짝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납득이 간다.
언제 정해진 짝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렐과 라인하르트의 인연은 길지 않았기에 모르는 게 있을 수 있었다.
“··· 저는 그분의 종입니다. 그러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거나 포기할 순 없다.
아렐은 라인하르트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렐이 물러서지 않자 헬라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뭐야, 종 주제에.’
다크엘프 종이라니.
게다가 느껴지는 기도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양보할 수 없었다.
“내가 데려가겠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제가 모시겠습······.”
아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변화가 일어났다.
후와아아아악!
라인하르트의 전신에서 수많은 검은색의 줄기가 뻗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곧이어 검은색 빛줄기는 라인하르트의 전신을 둥그렇게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검은색의 알과 같은 형태로 변했다.
아렐은 잠시 침묵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인간진영에 가져갈 순 없었다.
“······ 안전한 장소가 있습니까?”
“내 은신처로 가면 돼. 따라와.”
*
아게우스의 늑대.
실버팽의 자식이며 늑대들의 공주인 헬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녀 역시 대죄교와 칠죄종에 관해선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언젠가 실버팽이 날로 강해지는 말피엘을 막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녀는 숲을 떠나 마계로 향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헬라. 말피엘이 끝이 아니다. 용들은, 신들은 모두 너를 노릴 게다. 너의 그 특수한 힘을 탐내고자 끊임없이 쳐들어올 것이다.
설령 말피엘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게 끝이 아님을 실버팽은 알았다.
하지만 상처가 깊었다. 실버팽은 이 숲을 떠날 수 없었다.
숲의 주인인 그가 숲을 떠나는 순간 모든 정기가 죽고 그 역시 죽을 것이기에.
헬라는 자신의 고집으로 숲에 머물렀다.
말피엘과 이방인들이 계속 찾아오는 이유가 자신 때문인 걸 알면서도.
―자랑스러운 내 딸, 자랑스러운 늑대야. 너에게도 분명히 운명처럼 짝이 나타날 것이다. 너를 지켜주고 보듬어줄 짝이. 그때엔 절대로 놓치지 말거라.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실버팽은 먼 미래의 이야기를,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동반자에 관한 상상도 안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짝이 인간인지, 늑대인지는 그녀 역시도 알 수가 없었다.
실버팽은 운명처럼 나타나게 된다면 그때 알 수 있으리라 말했지만 어린 그녀로선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허나, 아쉬워마라. 너는 스스로 운명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지녔으니.
자신의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실버팽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녀에게 꿋꿋히 살아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헬라는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실버팽의 곁을 떠나기 싫었다.
그런데 나타난 것이다.
‘운명의 상대.’
실버팽의 의지를 이은 남자가.
실버팽이 자신의 생명과 분노를 넘기자 남자는 각성했다.
그저 분노를 계승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분노를 넘어섰다.
‘원죄······.’
원죄에 가까워졌다.
그녀는 대죄종의 씨앗이다.
하여,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의 반려가 될 자라는 걸.
이 남자는 대죄종의 반쪽이다.
‘대죄종은 칠죄종 중 하나와 이어진다고 했지.’
씨앗과 칠죄종 중 하나가 이어져 완전한 대죄종이 된다.
그녀 역시 반쪽이었고, 이 남자가 나머지 반쪽을 갖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자신의 것이다.
비록 처음에 보았을 땐 약간 겁을 먹었지만······.
그가 말피엘을 죽이는 걸 보며 마음을 굳혔다.
두근! 두근!
검은 알에 손을 갖다대자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이 알 속에서, 남자는 각성하고 있었다.
이전의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육체를 내버리고, 온전하고 완전한 대죄종의 반쪽으로 거듭나고자 변화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알은 숲의 정기를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실버팽의 생명과 용의 힘으로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각성이 끝나면 남자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짝임을 알게 될 것이다.
반쪽끼리 끌리는 건 본능과도 같았으니.
“······ 전하.”
“이 남자는 이제 네가 아는 인간이 아니야. 나와 같은 반쪽이야.”
헬라가 아렐의 걱정을 간파하곤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알에서 깨어난 남자는 이제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아렐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분은 인간입니다. 제가 아는한······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운 분입니다.”
인간이다.
자신은 부정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여러 면을 갖고 있는 인간.
헬라는 아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까짓 인간이 뭐라고.
인간을 탈피한 채 대죄종의 반쪽이 되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허나 이 변화는 바꿀 수 없다.
그는 알에서 깨어나, 자신과 함께 세상을 부술 것이다.
용. 그 증오스러운 말피엘을 죽였듯이.
그런 운명인 게다.
운명은 거스를 수도, 바꿀 수도 없다.
*
분노는 시작이었다.
내 몸을 잠식한 ‘원죄’는 내 전체를 차지하길 바라고 있었다.
―찾았구나. 나의 반쪽이여. 실로 오래 걸렸다.
원죄가 말했다.
자신의 힘을 온전하게 이어 사용할 수 있는 신체.
억겹의 세월동안 찾았으나 단 한 번도 찾지 못한 완성된 몸.
일곱 개의 대죄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대죄는 주인을 바꿔가며 원죄의 그릇이 될 자를 찾고 또 찾았다.
‘칠죄종’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원죄의 그릇을 찾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부활할 것이다. 신들을 죽이고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이 몸이라면 가능하다.
셀 수 없이 긴 세월. 주신에게 패배한 원죄는 끊임없이 복수심을 키우고 있었다.
마침내 원한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이 몸을 차지하면 세상의 모든 하늘을 쟂빛으로 물들일 수 있을 터!
―나를 받아들여라. 너에겐 거부할 권한이 없느니.
거부할 수 없다.
이미 한 번 자신의 힘을 맛본 이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자신의 힘을 사용해서 놈은 용을 죽였다.
분에 넘치는 힘.
세상의 그 어떤 희열보다도 강렬한 감각을 맛봤을 테니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오히려 고작 인간 주제에 원죄를 받아들이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래. 다 됐다. 이제 조금만 더······.
원죄가 인간의 몸을 차지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모든 영역을 차지했을 때, 원죄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냐, 네놈은?
원죄의 앞에 철창이 세워졌다.
원죄의 영역 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신은 아니다.
그렇다고 에픽 또한 아니었다.
인간.
허나 불가한 일이다. 인간 따위가, 자신을 가둔다니.
―어떻게 나를 가둘 수······.
원죄는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을 가둔 인간이 입을 열었다.
“훌륭하네.”
순식간에 배경이 바뀐다.
원죄는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저 아래의 영역으로 꺼져버렸다.
“관리자 권한이 2등급까지 격상했다는 건, 과업을 받아들였다는 의미겠지.”
너른 공간.
어쩐지 익숙한 자리다.
이곳은 실험실이었다. 동시에 증강현실이었다.
내 앞에 눈에 익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흰색 가운을 입은 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내게 말했다.
“반갑네. 나는 박문식 박사라고 하네.”
< 원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