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92화 (92/146)

과업?

위업도 아닌 과업이라니.

용들이 위업을 달성하듯, 나에게도 과업이 도착했다.

하지만 위업의 선정은 세계수에서 할당되는 것이다.

세계의 위험을 견제하고 제거하고자 세계수가 용들에게 보내는 임무의 일환이었다.

당연히 진짜 용이 아닌 나에겐 아무런 위업도 도달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과업이라는 건 누가 보내온 것인가.

십이주신과 대척점에 선 존재들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위업과 과업.

비슷한 말이지만, 전혀 다른 뜻이었다.

위업은 말 그대로 위대한 업적을 뜻하는 단어다.

그리고 과업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가리키는 용어다.

게다가 이 말이 다른 제삼자가 아니라, 제로에서 나왔다는 것도 의아함을 증폭시키는 대목이었다.

『파일명 001. 통칭, 히든 피스(Hidden piece).』

『조건. ‘거짓된 신의 인자’를 가진 자와의 조우.』

『조건. 제로(Zero)의 관리자권한 3등급 이상.』

『모든 조건을 만족해 과업이 해금됩니다.‘

『과업(課業). 거짓된 신을 죽이는 작업.』

제로를 만들고, 모든 나노머신의 인공지능을 설계한 박문식 박사가 숨겨놓은 데이터.

그것은 과업이라는 이름의 히든 피스였다.

거짓된 신의 인자라는 건 말피엘에게 ‘축복’을 내린 저 ‘베타’의 껍데기를 말하는 것이리라.

『과업에 동의할 경우 제로의 기능이 향상됩니다.』

『동의하지 않을 경우, 제로는 삭제됩니다.』

양자택일.

선택지라고 주었으나 사실상 선택할 여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짓된 신을 죽여라.’

거짓된 신. 십이주신을 죽이는 게 제로의 사명이었던가.

되짚어보면 웃기는 일이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인간의 건강을 위해’라며 스스로를 소개했던 게 제로다.

하지만 애당초 박문식 박사는 제로를 ‘신의 사냥꾼’으로 만들었다.

저 소개와 잠금은 일종의 가면인 셈이다.

관리자권한을 3급까지 끌어올리고, 마침내 거짓된 신과 조우한 자는 반드시 선택하게끔 해놓았다.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알았을 테니, 동조하지 않으면 제로를 삭제시키겠다는 강수까지 둬가면서 말이다.

‘제로가 저들에게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함이겠지.’

저들에게 제로가 넘어가는 순간 인류의 미래는 없다.

오직 제로만이 저 십이주신과 적대할 수 있었으니.

‘동의하느냐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

누군가가 멋대로 헤집는 삶은 끔찍한 법이다.

숱하게 겪어봤으니 저들의 만행에 찬성할 리 없었다.

하물며 인류의 멸망을 수없이 반복한 저 신들의 방식은 철저하게 잘못되었다.

그럴 바엔.

‘저들을 부수고, 내가 신이 된다.’

『과업에 동의하셨습니다.』

『제로의 기능이 향상됩니다.』

『잠겨있던 ‘창조영역’이 해금되었습니다.』

『기존의 전투데이터를 바탕으로 사용자에게 가장 적합한 ‘전투술’을 창조합니다.』

『‘극멸신(極滅神)’ 초입에 들어섭니다.』

*

힘이 넘쳐흐른다.

질 것 같지가 않았다.

비록 베타의 축복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제 저 망령 따위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터다.

‘이게 신의 힘인가.’

말피엘은 전율했다.

이게 신의 힘이란 말인가.

신의 힘을 맛보기만 했음에도 모든 걸 초월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욕심이 났다.

만약 신의 힘을 온전히 취한다면.

아니, 십이주신이란 존재들의 모든 힘을 빼앗을 수 있다면?

‘유일주신이 되는 거다. 나야말로 이 세계를 이끌 유일무이한 신이 될 존재다.’

모든 걸 지배하는 지배자가 될 것이다.

모든 종들이 자신을 우상할 것이며, 세계 자체가 자신의 손 아래 놓이게 되리라.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그럴 사명이 있었다.

“후우우.”

말피엘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신체가 변형되고 있었다.

거대한 동체는 사라지고, 다시금 인간의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날개는 여전히 유지가 되고 있었다.

다만, 날개의 형태가 용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메테리얼. 신의 날개.”

강철로 이루어진 날개. 하지만 일반 강철이 아닌, 신이 만들어낸 합금이다. 일반 강철보다 수백배 단단하며 훨씬 가볍다.

용이 날기 위해선 마나의 소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이 날개라면 그 소모조차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으리라.

뿐만 아니라 더 빠르게 날 수도 있을 것이다.

후아아아아아앙!

말피엘이 날개를 휘저었다.

그러자 주변 반경의 모든 망령의 손이 날아가버렸다.

숲이 파괴되고 쟂빛의 하늘이 휘청거린다.

고작 날갯짓 한 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가벼군. 아주 가벼워.”

만족스럽다는 듯 말피엘이 미소지었다.

이 날개라면 가능할 것 같다.

저 망령을 죽이는 것도,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조차도.

메테리얼.

신의 금속.

그 신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 날개를 단 것만으로 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저놈이 특이점이라.’

저 검은색 망령은 특이점이다.

덕분에 위업의 내용조차 바뀌었다.

그만한 위협이라는 뜻일진대.

‘에덴의 사과라면 반드시 얻어야하지.’

저 특이점을 죽이면 보상으로 에덴의 사과를 얻을 수 있다.

에덴의 사과는 용의 알이다.

세계수에서 맺혀 용들이 태어나는 알을 ‘에덴의 사과’라고 불렀다.

그 에덴의 사과를 용이 먹으면 단번에 ‘고룡’의 격을 얻을 수 있다.

현재 말피엘은 성룡이었다.

용의 성장은 총 네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헤츨링, 성룡, 고룡, 로드.

고룡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는 건, 로드급의 성장 또한 가능해진다는 의미였다.

용혈회에서 보았던 용들은 대부분이 고룡이었고 용혈회의 수장만이 유일한 로드급의 용이었으니 말은 다했다.

작금의 세계에서도 고룡급의 용은 열 안팎이다.

로드급의 용은 많아야 셋. 어쩌면 하나뿐일지도 모를 수준이다.

왜냐하면 로드급에 이른 자는 모두 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신이 되지 않은 용혈회의 수장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니 에덴의 사과를 얻는다는 건 가장 빠르게 ‘신’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했다.

“번개여.”

쿠르르르르르릉!

하늘이 뚫렸다. 그 위에서 번개가 말피엘의 몸을 수없이 강타했다.

번개로 스스로의 몸을 담금질하고 있는 것이다.

메테리얼의 날개로 인해 번개의 힘은 수십 배로 증폭되었다.

이어 말피엘의 몸이 반투명해졌다.

날개를 제외한 몸 전체가 오직 번개로 이루어졌다.

살아있는 번개가 된 것이다. 이 상태에선 닿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불태우고 파괴할 수 있었다.

“내 변화가 두렵나보군.”

반면, 망령은 꿈쩍도 안 하고 있었다.

망령의 손들이 자신에게 닿지 못하자 망령의 영향력도 마찬가지로 떨어져나간 모양이다.

그야 두려울 테다.

주신의 축복을 받아 메테리얼 날개를 손에 넣은 자신은 이전과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감히 망령 따위가 어찌해볼 수준이 아니다.

이대로 저 망령을 죽이고, 에덴의 사과를 취한 뒤 용혈회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용들의 힘마저 모조리 흡수한다면.

그때야말로 신을 넘어서는 신이 될 수 있다.

황금빛 미래를 그리며 말피엘이 날개를 펼쳤다.

빠르게 끝낸다. 이제 저 망령은 더 이상 자신의 적수가 아니기에.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앙!

날개를 펼쳐 쏜쌀같이 날아가자, 그의 뒤로 파공이 일어났다.

공간이 뒤틀리며 소리조차도 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번개 자체가 된 말피엘은 정확히 망령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꽈아아아아앙!

허나 바닥에 처박힌 건 말피엘이었다.

그대로 망령의 손등에 내리찍히며 바닥에 거대한 자국을 남긴채 고꾸라진 것이다.

순간 말피엘의 표정이 구겨졌다.

심장을 취했다고 생각한 순간, 바닥에 처박히다니.

‘내 속도를 잡아냈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우연이겠지.’

말피엘이 다시 날개를 펼쳤다.

그 순간, 망령이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마치 무인의 그것이다.

‘무술? 그건 인간이 만들어놓은 체계 아닌가.’

인간들이 무술을 펼칠 때나 하는 기본자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에서 펼쳐지는 방식이었다.

말피엘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은, 그런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형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싸우는 게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저런 자세를 잡고 반격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약자의 증거였다.

무게로, 속도로 찍어누르면 그만이다.

설혹 비슷한 실력으로 싸운다 하더라도 그때그때 반응하여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형식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나약한 인간의 기술 따위로 나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말피엘도 수많은 ‘인간 강자’들과 싸움을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용인 말피엘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다.

처음부터 주어진 것 자체가 달랐으니 제아무리 기술로 채운다 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하다.

가소롭다. 코웃음을 쳤다.

쿠릉!

말피엘이 땅을 박차고 다시 쏘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닿지 못했다.

“커헉!”

등이 화끈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쪽 날개가 잘려있었다.

‘이게 무슨······?’

신의 날개를 잘라내다니. 그것도 맨 손으로?

아니, 아니다. 잘라낸 게 아니다.

놈의 손에 닿자 절로 ‘해체’됐다.

“이······ 새끼가!”

말피엘은 분노했다.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이 현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날개가 하나 잘려나간 이상 속도만으로 승부를 보는 건 포기했다.

그렇다면 난타전이다.

말피엘은 모든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그는 반응할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수십, 수백 가지의 예측이 가능하며 그중 가장 확실한 한 가지 동작을 확정해 대비할 수 있다.

이는 용들 중에서도 말피엘만이 가능한 기예였다.

움직임만큼이나 연산속도 또한 압도적인 것이다.

“왜······!”

하지만, 이 역시 닿지 않는다.

육체전으로 돌입하여 근접해 타격을 시도했지만 예측되지 않는다.

도리어 역으로 읽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놈의 경로는, 저 망령의 움직임은 별 게 없었다.

기껏해야 한 가지 경로. 우직한 뻗음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먹은 닿지 않는다.

반대로 고작 한 가지 경로로 다가오는 놈의 주먹을 막을 수가 없다.

왜 닿지 않는 것인가.

왜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이건··· 인간의 기술이 아니다.’

단 한 가지의 가장 완벽한 경로로 뻗어오는 움직임이기에 그런 것이다.

예외가 필요없는, 있을 수 없는 유일한 수.

이런 기술을 인간이 만들었을 리 없다.

이런 완벽한 기술을, 움직임을, 인간이 고안해낼 리 만무했다.

있다면 그것은 전능의 신이리라.

인간의 기술을 흉내낸 게 아니라, 가장 완벽한 원형(元型)의 무예였다.

‘이럴 순 없다.’

희망이 보였다. 꿈이 눈앞에 있었다.

말피엘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비명을 내뱉을 수조차도 없었다.

‘이럴 순 없어······!’

다가오는 주먹이 보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지만.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마지막 결정타.

그제야 말피엘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였다.

난타전을 시도한 것 자체가 실수였음을.

하지만 후회는 늦었다.

쿵!

망령의 주먹이 말피엘의 얼굴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반대쪽의 하늘이 열렸다.

*

『‘폭식’이 A.I ‘말피엘’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메테리얼’을 분석합니다.』

『관리자 권한 등급이 2등급으로 격상했습니다.』

『기능이 추가로 해금됩니다.』

······.

『육체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육체의 조정을 위해 최소한의 생존에너지만을 남겨둔 채 ‘휴면상태’에 돌입합니다.』

< 극멸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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