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죄종의 악마들.
그 악마들에게 힘을 나눠준 대죄종!
‘잿빛 하늘에서 죽음이 내려오니. 나는 그것을 대죄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저것은 대죄종이 사용하는 일곱 가지 권능 중 하나 ‘심판의 분노’였다.
이 또한 신성교의 구약성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옛것.
지금처럼 열두 주신이 존재하는 게 아닌 더 이전의 세상.
지금의 신약(新約)이 아닌, 최초의 신이 적어놓은 구약(舊約)의 이야기.
그 구약의 성서에는 최초의 신이 심판한 악마들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오래전 존재하였고, 주신에 의해 토벌되었던 강력한 악마들.
구약성서에 적혀있는 악마들은 기존의 악마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다.
세상이 만들어질 때 세계를 악으로 물들였던 존재들인 탓이다.
주신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멸할 수 없는 절대악(絕對惡).
저 잿빛 하늘은 그 고대의 절대악 중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절대악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죄종’이다.
그를 수식하는 말은 무척이나 많았다.
만마(萬魔)의 주인이며 일곱의 대죄를 휘두르는 악의 근원.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비웃으며 끌어내린 자.
최초의 악.
불변(不變), 불사(不死)하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
······.
허나 실버팽은 대죄종이 아니었다.
그녀가 성검을 박아넣은 실버팽은 고작해야 대죄종의 하수인, 일곱 악마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일곱 악마 중 하나가 어떻게 심판의 분노를 사용한단 말인가.
설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저 망령의 손은 그 하나하나가 실제로 죽은 자들의 원혼이었다.
인류 전체를 모아놓은 것만 같은 저 죽음들에 실버팽이 관여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죄종 그 자체가 나타났단 말인가······.’
악 그 자체인 존재가 태어났다.
자스민 성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악이 잉태하고 있으니 죽여라. 신께서 그녀에게 전한 말이었다. 하여 태어나기 전에 죽이려고 하였으나 이미 한 발 늦었다.
“성녀님. 저 검은 그림자가 정녕 대죄종이란 말씀입니까?”
성기사가 묻자 자스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 구약성서에서 나온 모습과 똑같군.”
신약성서와 달리 구약성서는 신성교 내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접할 수 있다.
가령 성녀, 혹은 추기경과 성황 같은 자들만이.
구약성서를 언급하자 성기사들의 얼굴에 불안함이 깃들었다.
고대의 절대악 중 대죄종은 신성교가 가장 적대시 하는 악마다. 그를 숭배하는 악마교단은 반드시 없애야할 최우선의 척결대상이었다.
그런데 악마교단의 악마도 아니고, 칠죄종도 아닌 본신인 대죄종이라니!
“뭐, 뭐야······!”
“움직일 수가 없어······!”
곧이어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몸이 굳었다.
무언가가 억지로 잡아놓은 듯 움직이질 않았다.
그것은 성기사나 성녀도 마찬가지였다.
‘지독한 마기다.’
마나가 아니다. 마기다.
마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기운.
마치 마계를 이곳으로 이동시킨 것만 같은 느낌이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성기사장이 말했다.
대죄종이 출현했다면 이 사안은 지금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다.
신성교 본단에 반드시 전해야하며, 성녀 역시 살려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숲은 갇혔다.
영지 전체가 저 쟂빛의 마기에 갇혀버렸다.
길을 열겠다는 건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뜻.
“신이시여. 저를 바치나이다. 부디 악한 자들로부터 저희를 지키소서!”
그가 미련없이 자기희생의 주문을 외웠다.
곧이어 그의 전신이 불타오르며 머리 위에서 수호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호의 빛은 자스민 성녀를 중심으로 보호막을 형성했다.
자기희생으로 강화된 홀리실드다.
무려 성기사장이 스스로의 목숨을 태워 만든 절대적인 보호막이었다.
그러자 자스민 성녀와 남은 성기사들의 육체가 자유를 되찾았다.
“성녀님. 이 틈에 이곳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교단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처음 넷이었던 성기사도 이제 둘만 남았다.
그 둘도 자신을 불태워서라도 자스민 성녀를 지킬 의향이었다.
성녀는 신이 선택한 여인이다.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울 진정한 신인이었다.
준비도 안 된 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와, 왕녀님. 아니, 성녀님!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성기사가 자기희생 주문을 외우는 걸 보며 하이난 영주가 물었다.
그를 포함한 병사들도 눈알만 굴리며 성녀를 바라보았다.
이천에 가까운 병사와 영지 내에도 수많은 영지민이 있었다.
“다시 돌아오겠다.”
“이대로 가시면 저희는 다 죽습니다! 죽을 겁니다!”
“······ 그 전에 돌아오마.”
기약없는 기다림이다.
그녀가 돌아올 때 이 영지는 사라졌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또한 전원 죽은 뒤이리라.
죽은 다음 돌아온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으읍!”
“플릭.”
문제라면 그녀의 혈육이다.
플릭 왕자.
제국에서 황태자에게 혀가 잘려서 말도 못하는 그 왕자가 함께 왔었다.
자스민은 플릭 왕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는 이 리겔 왕국의 왕자다. 물론 나 역시 왕녀이나, 내 몸과 정신은 이미 신에게 의탁한 바.”
“읍읍!”
“너와 나의 사명이 다른 것을 이해하리라 믿으마.”
플릭 왕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스민 성녀는 확고했다.
플릭 왕자까지 챙겨갈 여유가 없었다.
그녀 역시 이들이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왕국에서 급파한 이천의 병사.
왕정을 지키는 정예들.
그들과 이 영지의 희생에 누군가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결국 화살은 신성교로 돌아갈 테니.
“플릭.”
자스민 성녀가 플릭의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을 보며 다시금 말했다.
플릭.
불쌍한 동생.
욕심은 많으나 재능이 없는 왕자.
제국에서의 일로 왕권에서도 밀려나 어떻게든 성과를 보이고자 억지로 참가한 행사였다.
악을 처단해야만 하는 자스민의 입장에서, 아무리 피를 나눈 동생이라 할지라도 플릭의 이런 속보이는 행차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드디어 플릭 왕자가 사명을 다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들을 책임 지는 게다. 그것이 네가 왕자인 이유다.”
“아······.”
플릭 왕자가 탄식했다.
버렸다. 그녀의 친누이가, 피를 나눈 그녀가 동생인 그를 매몰차게 버려버렸다.
결국 이 책임을 자신이 온전히 지라는 말이다.
죽음으로.
그걸 어찌 못 알아들을 수 있겠나.
콰아아아아앙!
저 하늘에선 대죄종과 용이 피터지게 부딪히는 중이었다.
미친 듯이 번개가 몰아치며 태풍이 모든 걸 날려버리고 있었다.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따라할 수 없는 위용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수세에 밀린 게 용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쿠르르르르르릉!
콰지지지지직!
마침내 거대한 용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숲을 쓸어버리며 그 동체가 병사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다 죽어라! 전부 죽어버려라!]
용언(龍言).
벼랑 끝에 몰린 용이 자신의 마나를 소진해 용언을 강화시켰다.
치직! 치지지직!
쫘아아아아아아악!
그러자 용의 주변으로 불꽃이 튀기더니 거대한 전기의 장막이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장막에 닿은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진다.
유형의 존재이든,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이든 간에.
그러자 성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눈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손’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게 보였다.
저 용언에 의해 힘을 잃은 망령의 손이다.
그러나 더 많은 손들이 이내 용을 덮쳤다.
용언으로도 상쇄할 수 없을 숫자의 수많은 죽음들.
[이 빌어먹을 손들! 이미 죽은 놈들 주제에 감히······!]
결국 망령의 손들에 의해 전신이 붙잡혔다.
스으으으으읍!
용의 입 주변으로 가공할 마나가 모여든다.브레스다.
후아아아아아앙!
하늘을 향해, 대죄종을 향해 용이 이내 브레스를 쏘았다.
용이 가진 최대, 최종의 무기이자 닿은 모든 것을 말살시키는, 용언보다도 더욱 상위의 권능과도 같은 것.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모든 것을 꿰뚫며 마침내 그 광섬포가 대죄종에게 닿았다.
잿빛의 하늘이 연기로 가려졌다.
더욱 어두워진 세상의 아래에서, 자스민 성녀가 성기사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곧 성녀와 성기사들이 빠르게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성녀님 가, 가지 마십시오!”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
“안 돼!!”
*
이해.
이유, 원인, 의미를 알아낼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말피엘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이해영역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 분명했다.
실버팽도,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을 이처럼 처참하게, 비참하게 만들지는 못했으니까.
“왜 살아있는 거냐······?”
연기가 걷히고,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실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게,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았으니까.
그것도 그냥 브레스도 아닌 자신의 전격이 섞인 브레스다.
심장에 있는 남은 마나를 모조리 쥐어짜내 내뱉었으니 설사 신이라도 죽일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안 죽는다. 너무나도 멀쩡했다.
혼신을 다한 브레스가 통하지 않았다는 건, 곧 자신의 죽음을 뜻했다.
‘내가 죽는다고······?’
저 누군지도 모르는 놈에게?
갑자기 나타난 저런 짐승에게?
무승부는 몰라도 패배한 적은 없다.
비긴 것조차 자신이 일부러 물러난 것이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이기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검은 녀석은 그 확신이 보이질 않았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든다.
로드를 만날 때조차도 이렇지는 않았거늘.
그래서 이해가 안 된다. 할 수 있을 턱이 없다.
‘현실이 아니다. 내가 지는 현실 따위가 존재할 리 없어.’
그는 무적이다.
다른 용들과도 차별화 된 특별한 존재다.
열 세 번째 주신이 아닌, 유일한 주신이 되어 세상을 지배할 자였다.
그때였다.
띠링~!
『위업이 변경되었습니다.』
『‘특이점을 처단하십시오’』
― 난이도 : 최상
― 특이사항(1) : ‘특이점’이 등장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정체를 밝혀내고, 처단하십시오. 이 ‘특이점’을 해결하지 못할 시 ‘마지막 위업’의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있습니다.
― 특이사항(2) : 현재 ‘특이점’과 가장 가까운 용에게 주신의 축복이 내려집니다.
― 특이사항(3) : 이 위업은 모든 용들에게 반영됩니다.
― 보상 : ‘에덴의 사과’』
*
보인다.
날개를 단 천사의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온 십이주신 중 하나가.
【베타.】
분노가 말했다.
저것은 두 번째 주신 베타의 형태라고.
말피엘과 똑같이 생긴, 말피엘의 원형과도 같은 존재.
하지만 저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본체는 중간계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 고도화 된 십이주신들은 에덴에 머물며 지상을 굽어보기 때문이다.
허나 저런 식으로 현신하여 축복을 내릴 수는 있었다.
“이것이 신의 힘인가!”
말피엘이 소리쳤다. 더 이상 망령의 손도 그에게 닿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모습.
나노머신의 에너지가 순식간에 충전된다.
충전되고, 과열하며, 폭발하기 직전이다.
십이주신은 역시 나노머신의 원형이 분명했다.
나노머신 자체를 다룰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용을 통해 권한을 행사하는 자.
뒤에 숨어, 세계를 움켜쥔 모순 된 존재.
【부족하다.】
베타를 보는 분노는 열망하고 있었다. 죽이기를. 뒤엎기를.
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하다.
분노가. 힘이.
그때였다.
띠링~!
『‘과업(課業)’이 도착했습니다.』
< 라인하르트 VS 말피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