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기억들.
분노로 점칠 되어있는 무수히 많은 말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억울하지 않나?
―짜증나지 않느냐?
―이 세상이. 너를 몰라주는 모든 이들이.
―너를 인정해주지도, 존중해주지도 않는 무지한 자들이.
―네가 죽을 때 너를 기린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라.
―모두가 너의 죽음에 열광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또 인지해라.
―보아라. 이것은 네가 죽은 이후의 세계다.
세상은 축제였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을 붙잡고 악마 황제 라인하르트의 죽음에 열광했다. 환호를 내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단 한 명도 나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도.
“악마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마왕 라인하르트가 죽었다!”
“대륙을 고통과 절망으로 몰아넣은 마왕을 대영웅 말피엘이 죽였다!”
“만세! 만세! 만세!!!”
“아아아!”
저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게 아닐진대.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으니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환호다.
내가 죽은 이후의 세계.
황제 라인하르트의 철혈 통치가 끝난 직후의 세계.
―과거로 돌아왔다고는 하나 저것 또한 존재했던 이야기다.
―바뀔 것 같은가? 바꿀 수 있을 것 같은가?
―저들은 언제든지 너를 비웃고, 모멸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다.
―너의 억울함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저 원망할 대상이 필요할 뿐.
―백 가지 중 아흔아홉 가지를 바꾸더라도 단 한 번의 실수면 충분하다. 결국 같은 길을 걷게 될 터.
―그도 그럴게, 너는 미움받는데 천재이지 않느냐?
―그러니 죽여라. 부숴라. 망가트려라.
―분노하라.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백 가지 미래 중 단 하나만 실패해도 모든 것을 실패했다며 저들은 나를 비난하리라.
그도 그럴게, 저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라인하르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나의 실패에만 관심이 있다.
지금까지는 우연히 잘 해나가고 있을 뿐. 한 발자국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결국 과거가 되풀이되리라.
[경고. ‘분노’의 에너지가 허용치를 초과했습니다.]
제로의 경고를 무시했다.
제로가 흡수한 분노를 제어하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나는 나 스스로 분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돌아오고 나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분노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나의 잘못이라고, 나의 탓이라고만 생각하며 실수하지 않고자 조심했을뿐. 있는 그대로 분노를 표출한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으므로.
―분노하라.
―분노하라.
―분노하라.
닥쳐라.
네놈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분노하고 있으니.
순수한 분노.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에 내 몸을 맡겼다.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였으니까.
‘말피엘.’
어느덧 내 앞에 당도한 말피엘이.
나를 죽인, 나를 모욕한 당사자가.
*
분노의 기척이 느껴진다.
강렬하게 폭발하고 산화하는 중이다.
그제야 말피엘이 거대한 동체를 일으켰다.
‘실버팽, 무리했군.’
실버팽이 마지막 분노를 사용했다.
그것도 고작 인간들을 상대하는 일에.
자신이 낸 깊은 상처로 인해 실버팽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리하여 분노를 사용했으니, 이제 놈은 그의 적이 아니다.
‘이딴 위업 하나에 십 년이 넘게 걸리다니.’
기껏해야 인간 하나를 생포하는 위업.
물론 인간혐오를 가진 말피엘로선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십 년이 넘게 걸린 게 어이가 없을 정도다.
분노의 실버팽만 없으면 진즉에 달성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성기의 실버팽은 어지간한 용보다도 강했다.
실제로 몇몇 용이 겁 없이 덤볐다가 죽었으니까.
말피엘과도 몇 번이나 치고받았지만 승부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최근의 결전에서 말피엘은 실버팽의 심장에 타격을 입혔다.
생명과 마나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치명상을.
애당초 말피엘은 계속해서 강해져가고 있었다.
반면 실버팽은 전성기를 지나 저물어가는 태양이었다.
뻔한 결과다. 별 감흥도 없었다.
오히려 더 빨리 이루지 못했음이 짜증 날 뿐.
‘그래도 십 년 넘게 싸웠으니 죽어가는 얼굴 정도는 봐줘야겠지.’
동체를 일으키고, 날개를 펼친 말피엘이 하늘을 날았다.
늑대들의 은신처인 계곡으로 가파르게 향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변화가 감지됐다.
‘음?’
죽어가던 분노가 갑자기 강해지고 있다.
분노의 마나가 숲 전역을 드리우는 게 느껴졌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마나.
용인 그가 느끼기에도 분노의 마나는 역겨운 수준이다.
허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 죽어가는 실버팽이 갑자기 각성을 할 리도 없거니와, 각성을 하더라도 이만한 수준의 마나를 전개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 마나는 실버팽에게서 느꼈던 그 특유의 느낌이 없었다.
‘더 질척거리고, 더 불길한 분노의 마나다.’
실버팽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마나가 숲 전역을 마치 자신의 영역처럼 가둬버리고 있었다.
또한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었다.
‘··· 손?’
마나로 이루어진 투명한 손들.
수천, 수만······ 셀 수 없이 많은 손들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곧 말피엘은 저 손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망령의 손이라. 네가 죽인 자들의 것이냐?’
그렇다면 망령의 손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버팽이 아무리 칠죄종 중 하나인 분노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너무 많은 숫자였다.
저 망령의 손은 고작 늑대 따위가 죽인 숫자라고 하기엔 너무 많았다.
실제로 실버팽은 자신이 사냥한 숫자에 따라 ‘피의 인장’을 만들 수 있었다.
정확히 17,844개의 혈인을 허공에 띄워, 같은 숫자의 마탄을 동시에 쏘아낼 수 있었다.
분노의 특성이다.
그렇게 거의 이만 개의 달하는 마탄이 동시에 쏟아지면 제아무리 용이라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손들은 그 마탄의 숫자보다도 아득히 많다.
십만.
아니, 십만조차도 부족하다.
‘백만.’
초월적인 용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손의 숫자는 백만을 넘겼다.
허나 불가능하다.
일개의 늑대가, 설령 용이라고 할지라도 저만한 숫자를 죽이는 건.
그렇다면 분노를 소유했던 모든 자들이 죽였던 숫자인가?
허나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손의 숫자가.
숲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늘어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천만······?’
마침내 그 숫자가 천만을 넘겼다.
자신의 기감에 잡히는 저 숫자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다른 용들보다도 훨씬 예민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감히 늑대 따위가······.”
자신의 날개를 부여잡고 잡아당기는 손들에게 말피엘은 이를 갈았다.
죽은 망령 따위가 자신을 끌고가려고 든다.
“꺼져라.”
촤르르륵!
말피엘의 전신에 번개가 몰아쳤다. 망령의 손들이 튕겨져 나갔지만, 그러자 더 많은 손들이 말피엘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본체로는 다가갈 수 없다.’
저 망령의 손은 의식이 없다. 그저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끌어내릴뿐.
커다란 본체는 도리어 약점이다.
결국 말피엘은 인간의 형체로 현신했다.
이후 마나를 둥글게 감싸 자신만의 영역을 만든 뒤 손들의 침범을 막아섰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몰려오는 망령의 손은 그가 보기에도 질려버릴 정도였다.
‘실버팽을 죽여야 끝나겠군.’
빠르게 결판을 지어야겠다.
죽어가는 놈이 어떻게 이만한 ‘권능영역’을 펼쳐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변화가 있다면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허공을 날며 계곡을 내려간 말피엘은 마침내 동굴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보았다.
아게우스의 늑대.
그가 생포해야할 인간소녀가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걸.
그리고 그 옆에서 까맣게 물들어버린 한 인간의 형상을.
“넌 뭐냐?”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울링.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말피엘의 실드를 때렸다.
그러자 마나벽이, 마나들이 휘청거린다.
고작 울음소리 한 번에.
‘용언에도 꿈쩍않을 실드가?’
말피엘의 인상이 굳어버렸다.
놈은 실버팽이 아니다.
하지만 분노를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 분노는, 실버팽이 사용하고 있던 분노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뭐라고해야할까.
저 분노를, 저 모습을.
‘······ 짐승같군.’
늑대보다도 더욱 짐승 같다.
그 어떤 짐승도 저보다 짐승 같을 순 없으리라.
그야말로 분노와 본능만으로 가득 찬 검은 그림자가, 말피엘을 향해 도약했다.
*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이난 영주가 몸을 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음에도 세상은 어두웠다.
뿌연 회색빛의 하늘.
하늘이 닫혔다. 하늘 위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이 끌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병사들이 영주성으로 피한 직후 벌어진 일이었다.
영주만이 아니라 병사들도, 기사들도, 심지어 성기사들마저도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말도 안 돼.’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스민 성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일하게 그녀만은 이 현상에 대해 짚이는 바가 있었던 탓이다.
또한 그녀의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영지를 가득 채운 수많은 망령의 손들이.
죽은 자들의 울부짖음이.
쟂빛 하늘.
신을 모독하는 손.
이러한 상징성을 가진 건 분노가 아니다.
실버팽도, 그 이전의 분노 사용자들도 저러한 현상을 빚어내진 못했다.
성녀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성녀이기에, 오직 악마 교단을 처단하고자 힘을 부여받은 그녀였기에.
그렇다면······.
쿠르르르르릉!
쟂빛의 하늘이 운다.
세상이 흔들리며 숲의 한가운데 거대한 자국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나타났다.
저 숲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하는 존재가, 나타난 게 분명하다.
실버팽이 아니라 진짜 분노의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소리.
격한 진동과 함께 허공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거대한 동체와 날개를 지닌 그것의 정체에 사람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용?”
“요, 용이다!”
“용은 사라진 신비가 아니었어?”
······ 용. 그것도 거대한 성룡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현상의 원흉이 바로 저 용이란 말인가?
사라진 칠대 신비이며 지고의 존재인 용이라면 마땅히 이현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저 용이 아니야.’
자스민 성녀가 몸을 흠칫 떨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
용이 문제가 아니다.
“노오오오옴!”
쿠르르릉!
콰아아아앙!
번개가 솟구친다. 소용돌이가 숲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광범위하며 가공할 파괴력.
신화와 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보다도 훨씬 강력해보인다.
어지간한 나라 하나쯤은 가볍게 날려버릴 것만 같은 위용 아닌가.
하지만 용의 전신에는 이미 상처가 가득했다.
무리하며 다급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용의 반대편에 검은색의 인영이 있었다.
그림자와도 같은 그 검은 인영을 확인한 자스민 성녀가 비틀거렸다.
저 용도, 실버팽도 아니다.
분노 역시 아니었다.
저건······ 저것은.
“······ 대죄종.”
< 진정한 분노의 모습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