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89화 (89/146)

“······.”

빠르게 쏘아낸 겨울의 활을 정통으로 맞은 에픽들 중, 남아있는 건 칼바나스뿐이었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사라졌고 살아남은 칼바나스의 상태도 썩 좋지는 못했다.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모두가 침묵했다.

분노의 실버팽도, 헬라도, 다른 늑대들마저도.

‘죽겠군.’

물론 나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겨울의 활이 요구하는 에너지의 소모량은 끔찍할 정도다. 제로가 제어해주지 않으면 죽었을 정도로.

죽지는 않았지만 죽을 것 같이 몸이 노곤하다.

하지만 겉으로는 멀쩡한 척 두 발과 허리를 곧추세웠다.

“말해지 않았느냐. 덤비면 다 죽는다고.”

“이, 이건······ 뭐냐. 넌 뭐냐.”

몸의 절반이 날아간 칼바나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과 표정.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로 경악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로서도 의외의 결과다.

‘조건이 좋았다.’

그만큼 조건이 좋기도 했다.

에픽들이 자진하여 동굴로 기어들어 온 상황. 일자로 쏘아내도 피할 수 없다. 그나마 칼바나스만이 반응해 살아남긴 했어도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천마군림보로 나노머신을 동결시키고, 부팅되는 짧은 시간에 겨울의 활을 쏘아내는 작전은 그간 머릿속에서만 그려왔던 상황이다.

‘동굴 같이 피할 수 없는 조건만 완성하면 용에게도 유효타를 줄 수 있겠는데.’

레벨 130의 칼바나스가 저 상태다.

같은 조건이라면 말피엘에게도 충분히 유효타를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천마군림보는 주변의 모든 나노머신을 방전케 만든다.

방전된 나노머신은 자체적으로 재부팅을 시도하며, 이때 기존에 나노머신에 입혀진 모든 프로그램과 명령어 따위가 초기화된다.

말하자면 완전한 ‘무방비’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나노머신을 다루는데 특화된 개체일수록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나노머신에서 파생하여 각성한 ‘에픽’의 경우 그러한 성향이 더욱 강할 수밖에 없고.

칼바나스와 그의 동료들이 그렇다.

에픽으로 이루어진 그림자 여단.

‘같은 대상에게 두 번은 못 쓰겠지만······.’

한 번이면 충분하다.

두 번이나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패배했다는 뜻이다.

애당초 한 번 사용하면 나 또한 방전되지 않나. 두 번의 기회가 있을 리 만무했으니, 오로지 필살의 상황에서만 써야 하는 비장의 수다.

피하려고 마음먹으면 피하는 게 어렵지는 않으므로.

예컨대 육체를 극한으로 수련한 자라면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노머신이 방전된다고 육체에 제약을 가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마나를 동결시키다니. 용이냐? 하, 하지만 용이라도 이런 건······.”

칼바나스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자신있게 쳐들어왔으나 한 방에 몰살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겠지.

나는 천천히 칼바나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칼바나스가 두려움에 떨었다.

“라인. 너는 나와 같은 ‘이방인’이 아닌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다름’을 인정받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왔지 않느냔 말이다!”

감정동화의 권능을 발휘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는 되었다.

나는 비록 에픽은 아니지만 칼바나스가 말하는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과거 황제에 즉위한 것조차도 내 자의가 아니다.

대륙 전역에서 이해받지 못한 채 손가락질 받았다.

“넌 대체 누구의 편이냐. 인간이냐, 이방인이냐, 아니면 늑대들이냐?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십이주신의 편이냐? 아니다, 아니야. 나만이 너를 유일하게 공감해줄 수 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꾼다면······!”

“말이 너무 많군.”

손을 뻗어 칼바나스의 머리를 쥐었다.

어차피 가만히 있었으면 칼바나스가 먼저 공격해왔을 것이다.

당해주는 것보다 더 빠르게 선수를 친 것뿐이니 불만은 없으리라.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른 에픽보다 칼바나스에게 ‘폭식’이 반응하고 있었다.

[특급 프로세스 ‘폭식’이 실행됩니다.]

[특급 프로세스 ‘감정동화’를 흡수합니다.]

[나노머신의 에너지 총량이 10% 증가했습니다.]

“그, 그만! 그만둬라! 제발 나를 빼앗지 마······!”

폭식이 입을 열고 칼바나스를 빨아들인다.

제로는 그렇게 폭식이 빨아들인 칼바나스의 나노머신과 권능을 빼앗았다.

감정동화. 내 감정을 주변에 동화시켜 타인을 움직이는 힘.

동시에 칼바나스의 ‘기억’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들었어? 칼바나스는 인간이 아니래.

―칼바나스. 너는 악마다.

―악마를 죽여라! 죽여라!

―너 같은 건 태어나질 말았어야해!

어딘가에서 많이 듣고 본 기억들이다.

마치 내 기억을 훑는 것과 같은 내용들.

처음부터 칼바나스가 역겨웠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겠다.

마치 내 거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누구의 편이냐고?’

그저 인간의 편만을 들 생각이었다면 실버팽이 인간사냥을 나설 때 말렸을 것이다.

에픽의 편이었다면 칼바나스를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늑대들의 편이었다면 같이 싸웠을 테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십이주신? 놈들은 반드시 없애야할 세계의 적폐였다.

‘나는 나의 편이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비록 과거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내 과거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기에.

인간의 추악한 면 역시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는 나의 편이다.

저 하늘 위의 신들을 제외한 그 누구의 편도 될 수 있고, 누구의 편도 되지 않을 수 있는.

‘폭식이 제대로 권능까지 흡수한 건 이번이 두 번째로군.’

북방 성지에 있었던 용을 흡수할 때와 칼바나스를 흡수할 때.

처음엔 ‘용갑주’를 가져왔고 이번엔 ‘감정동화’를 가져왔다.

이번이 두 번째다.

다른 에픽들을 흡수해도 권능까지 가져온 적은 없었다.

약간의 에너지 총량이나 나노머신의 양을 늘려줬을 따름이다.

칼바나스와 다른 에픽들의 차이점이 뭘까. 강함? 아니면 내 감정?

흡수를 끝마치고 뒤를 돌아보자, 헬라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

폭식으로 흡수되는 자의 말로를 보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놀랍구나. 한 순간이지만 대죄종의 씨앗이 가진 힘마저도 끊어낼 줄이야······.”

실버팽이 중얼거렸다.

주변의 늑대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대죄종의 씨앗, 헬라가 가진 여왕벌로서의 능력.

주변에 있는 모든 나노머신들을 자신에게 종속하게 만드는 그 힘의 원천이 잠시 끊겼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헬라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게끔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일까. 실버팽의 눈에 약간이나마 빛이 들었다.

죽어있던 두 눈이 잠시지만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이성을 되찾은 게다.

반대로 헬라의 두 눈엔 두려움이 차올랐다.

“헬라. 대죄종의 씨앗이 가진 ‘매혹의 힘’으로 인해 나는 너를 내 자식처럼 여겼다.”

“······.”

늑대가 아닌 인간을 길렀다.

대죄종의 씨앗, 헬라가 가진 매혹의 힘 때문에.

그게 아니었다면 애당초 늑대가 인간을 기르는 건 말이 안 된다.

설령 그가 칠죄종이라 한들 마찬가지다.

헬라가 침묵하자 실버팽이 계속해서 말했다.

“너도 알고 있었겠지. 주변의 모든 존재들이 너를 탐하려 든다는 걸. 너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바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늑대들이 모였다.

에픽들도 모였다.

용조차도, 신들조차도 헬라를 원하고 있었다.

주변을 강화시키고 결속시키는 강력한 권능의 탓이다.

그래서 실버팽은 헬라를 지켰다. 목숨을 바쳐 용과도 싸웠다. 인간들을 소탕시키고, 생명이 다해감에 따라 폭식의 인도자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려고도 했다.

그런데 한순간 매혹이 끊기며 이성을 되찾았다.

저 폭식의 인도자가 발을 구르자 그렇게 되었다.

모든 마나들이 한순간 백지처럼 닳아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헬라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 지금은 아니야? 내가 늑대가 아니라서?”

그녀 역시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결속이 약해졌다는 걸.

자신을 중심으로한 늑대들의 강력한 결속이 한순간 끊겼다.

결속이 끊기자 헬라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의식할 때부터 계속해서 느껴온 이 결속만이 그녀를 평온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결속이 사라진 지금, 실버팽과 늑대들은 그녀를 역으로 공격할지도 모른다.

“헬라, 너는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한 나의 가족이다.”

이성을 되찾았기에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비록 첫 시작은 권능에 의해서였을지언정, 그 뒤로 헬라는 실버팽과 늑대들의 가족이었다. 결속이 끊겼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늑대의 나눔이 아니라 가족이다.

가족은 영원불멸한 것이다.

헬라의 두 눈에 물방울이 맺혔다.

이어 실버팽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폭식의 인도자여. 헬라를 대죄교의 본단까지 인도해줄 수 있는가?”

대죄교의 본단?

제국과 신성교도 찾지 못한 것을 내가 어찌 알고 있겠는가.

사실대로 답했다.

“본단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이 세상의 반대편······ 마계에 있다.”

······ 마계에?

설마 용혈회가 틀어막고 있는 그 반대편의 마계를 말하는 건가?

마계로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는 로드가 번개의 장막으로 틀어막아 놓았다.

몰래 헬라를 그 너머까지 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본단에 도착하면 신들과 용들도 헬라를 찾지 못할 테니. 그곳에서 다른 대죄주교들을 이끌면 능히 대죄종이 될 수 있을 거다.”

“팽이 데려다주면 되잖아.”

“··· 헬라. 이성이 돌아왔을지언정 내 생명은 여전히 꺼져가고 있다. 이대로 죽으면 내 ‘분노의 인자’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갈 것이다. 허나.”

칠죄종의 권능은 죽으면 다른 이에게 계승이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실버팽이 나를 보며 이어서 말했다.

“‘폭식’은 유일하게 칠죄종의 권능을 저장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다른 칠죄종들과 본능적으로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고, 약할 수밖에 없지.”

칠죄종의 권능을 빼앗는 권능.

그게 폭식의 본래 용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흡수하지 않으면 폭식이 지닌 권능이라는 건 별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방사성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점이 전부다.

허나 다른 권능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가장 강해질 수도 있는 권능이었다.

용갑주와 감정동화를 흡수한 것처럼.

그리고 그보다 더 상위의 ‘칠죄종의 권능’마저도 흡수할 수 있다면 최강이 될 수 있다.

“헬라를 본단까지만 안전하게 데려다다오. 그 이상의 부탁은 하지 않겠다.”

“그러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분노를 내게 넘기는 조건이 그것이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다.

“폭식의 인도자여. 너는 나조차 견디지 못한 ‘매혹의 힘’을 끊어버릴 수 있는 자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헬라를 맡길 수 있다.”

“팽!”

“헬라. 내 사랑스러운 아이야. 내 권능과 의지는 폭식과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아······.”

결국 헬라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실버팽이 나를 보며 재촉했다.

“말피엘이 눈치채기 전에, 시작하지.”

*

폭식이 입을 벌렸다.

순간 분노의 인자가 내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칠죄종 중 가장 패악적이며 경이로운 힘.

전신이 짖눌릴 것만 같다. 정신이 분노로 가득찬다.

손을 타고 흘러들어온 분노의 인자가 발현되며 몸을 까맣게 물들였다.

[특급 프로세스 ‘분노’를 흡수합니다.]

[경고. ‘분노’의 에너지가 허용치를 초과했습니다.]

[경고. ‘분노’ 상태로 전환됩니다.]

[경고······.]

[······.]

[경고. 말피엘의 접근을 확인했습니다.]

[경고. 말피엘이 현신합니다.]

< 분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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