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87화 (87/146)

아렐은 가만히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거지 아이가 다가왔을 때만 하더라도 조마조마한 게 사실이었다.

그녀가 보아온 인간의 귀족은 모두 자신의 명예나 기품 따위가 손상을 입으면 대노하기 마련이었으므로.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도리어 빵을 나눠주며 ‘판을 엎어야겠다.’고 선언했다.

‘이상한 사람······.’

아렐에게 있어서 라인하르트는 세상에서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며 바닥이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였다.

그래서 어려웠다.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솔직히 발로 차거나, 때리지 않더라도 적어도 인상은 찌푸릴 줄 알았다.

황실에서 곱게 자란 황태자가 오랫동안 씻지 않아 냄새나는 아이를 가까이한 경험을 없을 테니까.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지.’

그러긴커녕 빵을 나눠주었다.

물론 자신이 먹다가 남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제국의 황태자가 그러한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렐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충격.

그래, 충격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황태자의 다른 면모를 보았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이 처음 보는 아이에게 온정을 베풀다니.

하물며 그게 끝이 아니었다.

“··· 보급창고를 태워서 용병들을 움직인 이유가 뭡니까?”

아렐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보급창고를 태우고, 용병들을 일으키지 않아도 하이난 자작 정도는 충분히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아렐만 있은들 충분한 일이었다.

바깥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숙소에서 라인하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이난 자작 같은 인간은 자신의 것을 절대로 남과 나누지 않는다. 보급창고를 태우면 자기 것을 더 지키려고만 들겠지.”

“용병들을 이끌고 성을 습격하지 않아도 하이난 자작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용병들은 산증인이다. 하이난 자작이 또다시 욕심을 부린다면 용병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우리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조심하게 되겠지.”

보급창고의 식량은 전부 타버렸지만, 영주성에 몰래 숨겨둔 식량은 그것보다도 더 많았다.

그날 영주성에 남은 식량은 모조리 용병들과 시민들에게 배급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름은 먹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리고 영주성에 남은 보급품을 시민들에게 푼 것도 모두 라인하르트의 생각이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먹을 걸 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 일이야.’

그저 단순히 라인하르트가 아이에게 빵을 주는 것으로 끝냈다면 이 정도로 아렐은 심란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황실에서 일개백성을 향해 그런 행동을 보인다는 게 놀랍기는 하지만, 아렐의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단순히 빵을 나눠주는 걸 넘어섰다.

‘그런데 제도 자체를 엎어버렸다······.’

하이난 자작이 사라지면 어차피 다음 영주가 새로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라인하르트는 하이난 자작의 약점을 만들고, 변화를 이끌었다.

적당한 당근도 던졌다. 광맥에서 정말로 마정석이 나온다면 그는 충분히 백작위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 중 용병들에게 당한 굴욕이 밝혀진다면 반대로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당근과 채찍의 사이에서 하이난 자작은 스스로 고개를 낮출 수밖에 없다.

라인하르트는 하이난 자작이 보급품을 독차지할 수 없게끔 근본적인 원인을 고쳤다.

혼자서 위협하여 변화를 꾀했다면 그저 일회성에 불과했을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영지를 떠난 즉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용병들을 공범이자 증인들로 만들어 보는 눈을 늘렸다.

수많은 이들이 비밀을 알고 있으니,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하이난 자작은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먼 미래까지 내다본 혜안이다.

‘이상하지만, 따뜻한 면도 있는 사람······.’

아렐은 생각했다.

라인하르트에게도 따뜻한 면이 있노라고.

겉으로 보이는 무뚝뚝하고 냉정한 모습이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

‘판이 다시 짜여졌군.’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소리를 들으며 턱을 쓸었다.

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판을 엎었다.

하이난 자작의 병사와 기사, 그리고 용병만으로는 늑대들을 위협할 수 없다. 위협은커녕 한입에 삼켜질 것이다.

이대로면 과거가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전면에 나서서 움직일 수 없다면 뒤에서 조종해야 한다. 하이난 자작은 그런 용도였다.

광산에서 마정석이 나왔다는 하이난 자작의 편지를 받고 이천의 병사가 영지에 들어왔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다.

이만한 숫자의 병사와 기사면 늑대들과도 한바탕 할 수 있는 전력이다.

에픽들에게도 위협을 가하기엔 충분하다.

‘자스민 왕녀라.’

그런 나도 예상하지 못한 건 병사들을 이끌고 온 여자다.

플릭 왕자와 자스민 왕녀.

플릭 왕자는 예전에 혀를 자른 바가 있으나, 원래부터 별 능력은 없었던 녀석이니 크게 신경은 안 쓰인다.

하지만 자스민 왕녀는 내 뇌리에 박혀있는 인물이었다.

‘리겔 왕국의 차기 여왕이었지.’

전쟁 도중 왕이 죽고 왕자들이 죄다 몰살당해, 그녀가 잠시 왕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녀가 통치한 기간은 고작 6개월 정도였지만 이미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왕국을 운영하며 생명을 연장시킨 여걸이었다.

그녀에 대한 나의 평가는 간단했다.

‘리겔 왕국이 낳은 가장 훌륭한 인재.’

그녀 역시 성별에 의해 저평가 된 천재였다.

또한 성검을 다룰 줄 아는 성녀였다.

리겔왕국의 국교인 신성교에 어렸을 때 입단해 성녀가 되며 신의 힘을 사용하는 이적을 발휘하며 전장을 뒤집어놓았다.

‘성기사들도 몇 보이는군.’

의아한 건 마정석 광산을 탐색하는데 왜 왕녀이자 성녀인 자스민이 나타났냐는 것이다. 그것도 성기사들과 함께.

십이주신에 의해 선택된 극소수의 기사만이 ‘성기사’로 임명받는다.

워낙에 극비리로 움직여 정확한 무력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악마교단을 뿌리뽑을 때 보인 목격담에 의하면 지각변동의 수준이라고.

소드마스터. 혹은 그 이상의 강자들.

과거 대륙정벌을 할 때도 신성교와는 크게 부딪힌 적이 없다.

제국의 입장에서도 신성교는 꽤 버거운 상대였다.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린 상태에서 신성교까지 적으로 돌렸다간 제국이 참패했을 것이다.

하여간에······.

성기사들과 자스민 왕녀가 함께 왔다는 건 이 사안에 대해 신성교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여, 영주가 우리를 팔아넘기는 거 아니야?”

“그런 짓을 했으니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 같은데?”

용병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자스민 왕녀에게 하이난 자작이 용병들의 실태를 일러받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스민 왕녀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하이난 자작이 이르면 도리어 자작의 목만 날아갈 것이다.

“그래도 계약을 먼저 어긴건 영주잖아?”

“맞아. 우린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라고.”

용병들이 일을 치르고 계속 영지에 남아있는 이유는 어쨌든 계약 때문이었다.

허나 먼저 계약을 어긴 건 하이난 자작이다.

이런 토벌의뢰는 의뢰인이 계약한 용병의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게 기본 전제였고, 그것을 어겼으니 ‘정당하게 쳐들어갔다’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굶주려서 잠시 눈이 돌아갔을뿐 어쨌든 죽이진 않았으니까.

“용병들을 통솔하는 자가 누구냐?”

그때 위풍당당하게 용병들의 앞으로 자스민 왕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처럼 노란 머리와 눈동자. 두꺼운 눈썹과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눈매의 소유자.

자스민 왕녀가 묻자 용병들의 시선이 아렐에게 쏠렸다.

이에 아렐이 손을 들고 나서자, 자스민 왕녀가 아렐을 쭉 훑어보았다.

“쓰레기들만 모여있는 이곳에선 그나마 쓸만한 녀석 같군.”

쓰레기들.

영주성의 병사들을 평하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직설적인 말투는 여전했다.

동시에 자스민 왕녀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혹, 알아본 걸까?

그러나 자스민 왕녀와 지금의 나는 만난 적이 없었다.

설령 플릭 왕자라도 지금 내 행색을 황태자라 생각하긴 어려울 것이다.

“보기보다 몸이 좋구나. 균형이 잘 잡혀있어. 너도 용병인가?”

“그놈은 시종입니다, 왕녀님.”

“맞습니다. 우리 용병대장의 시종입니다.”

아렐은 그 사이 용병대장이 되어있었다.

용병들의 말을 듣고 자스민 왕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종이라고?”

아렐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곤, 자스민 왕녀가 이어서 말했다.

“흠, 재능을 썩히고 있구나. 토벌이 끝나면 나를 찾아오거라. 남자로 만들어주지.”

남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게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자스민의 눈썰미는 제법이었다.

제로로 인해 내 몸은 현재 누구보다도 균형이 잡혀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것을 단번에 알아본 건 자스민이 처음이었다.

【Lv. 110】

더욱 놀라운 건 레벨이다. 지금 이 시기에 이미 이 정도였을 줄이야.

내게서 시선을 돌린 자스민 왕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부터 용병들 역시 나의 지휘를 받는다.”

“왕녀님. 저희는 영주와 계약했습니다.”

“영주의 계약이 곧 나와의 계약이다. 불만이 있으면 꺼져도 좋다.”

“······.”

용병들이 입을 꾹 닫았다.

용병의 입장에서야 누구를 따르던 돈만 주면 장땡이다.

“없는 걸로 알지. 마지막으로, 이 주변에서 ‘악마’를 본 사람이 있나?”

“악마라니요?”

“악마교단의 악마 말입니까?”

악마라니. 제국과 신성교가 힘을 합쳐 몰아낸 그들의 이름이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용병들이 되묻자 자스민은 고개를 저었다.

“못 보았다면 됐다. 내일부터 늑대사냥을 시작하니 그리 알고 있도록.”

할 말이 끝나자 자스민 왕녀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갔다.

‘악마?’

자스민 왕녀와 성기사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가 설마?

일을 처리하려는 속도도 상상이상이다.

악마교단을 쓸어버리기 위함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영주가 보낸 편지에는 그런 내용이 일절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그만이다.’

고개를 털었다.

진행이 빠르면 나야 좋다.

내일 늑대사냥이 시작되면 나는 아게우스의 늑대를 몰래 납치할 계획이었다.

갑작스럽게 병사가 늘어난 건 에픽들도, 늑대들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

다음날.

미리 언질한 대로, 늑대사냥이 시작됐다.

이천이 넘는 병사들이 숲을 헤집으며 늑대들을 찾았다.

나는 그들과 살짝 동떨어져 아게우스의 늑대를 쫓았다. 인공위성을 통해 위치는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늑대들이 움직인다.’

늑대들도 인간들의 기습적인 공격에 혼란한 모습이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비하는 늑대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다.’

아게우스의 늑대를 다시 발견했다.

“괴물 늑대다!”

“동쪽에서도 나타났다!”

발빠르게 적응한 늑대들이 교란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숫자가 많은 병사들을 상대로 지형적 이점을 취하는 중이다.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며 혼을 빼놓았다.

“불을 붙여라!”

허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자스민 왕녀는 준비해온 기름을 숲에 붓고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불이 활활 타오르며 숲을 태웠다.

연기와 불길로 인해 늑대들의 움직임에도 제약이 생겼다.

설마 숲을 태우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 결국 괴물늑대 한 마리가 자스민 왕녀의 검에 의해 명을 달리했다.

신성이 쏟아지는 성검은 늑대를 갈라 그대로 소멸시켰다.

“물러서지 마라!”

대단한 위력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는 아게우스의 늑대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혼자 계곡으로 향한다.’

의아한 건 늑대들의 도움 없이, 홀로 계곡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곡에 있던 모든 늑대가 다 튀어나온 상황에서 말이다.

나는 즉시 자리를 이탈해 계곡으로 향했다.

*

계곡의 폭포수 아래 거대한 동굴.

겨울의 활을 겨눈 채 안으로 들어가자, 곧이어 아게우스의 늑대와 마주할 수 있었다.

“······ 이방인?”

“움직이지 마라.”

예전에는 그냥 보내줬으나 이제는 아니다.

하지만 아게우스의 늑대는 혼자가 아니었다.

저 너머, 거대한 동체.

상처를 입고 쓰러진 늑대가 있었다.

‘실버팽.’

실버팽의 눈은 죽어가는 중이었다.

썩은내를 풍기며 진즉 죽었어도 이상할게 없는 상태였다.

“오오. 천 년, 만에 동지가 나타났구나.”

“팽! 움직이면 안 돼.”

실버팽이 앞발을 내딛으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게우스의 늑대가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바닥을 쓸며 다가온 실버팽은 킁킁대며 내 냄새를 맡았다.

“폭식이여. 왜 이제야 나타난 것이냐?”

폭식?

폭식이라면 마왕 가프가 가진 권능의 이름이다.

성지에서 방사성 물질을 모조리 빨아들인 힘이었다.

“분노가 여기 있으니, 이로써 칠죄종 중 둘이 모였다! 대죄악이 탄생할 징조이지 않느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죄악의 탄생’이라는 게 뭔지는 대강 알았다.

악마교단이 내세우는 게 그것이었으니까.

대죄악을 탄생시켜 세계를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

지금의 신들을 몰아내고, 인간들도 도륙내어 아예 백지화 시키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저 실버팽이 악마교단과 관계되어 있다는 건가?

심지어 천 년전 인물인 가프도 연관되어있다는 말인가?

악마교단이 나타난 건 불과 몇십년 전이다.

‘아니, 그 전부터 악마교단은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악마교단은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었다.

극소수로 은밀하게 존재하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뿌리뽑혔을뿐.

하지만 진정한 뿌리는 뽑지 못했다.

그게 칠죄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프도, 실버팽도, 그리고 어쩌면 저 아게우스의 늑대도.

“대죄악의 씨앗이여, 나를 먹거라. 용과 신들을 죽이고 인간들에게 복수하거라. 인도자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팽.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마!”

“인도자가 왔으니 내 역할은 여기서 다했다! 오오, 구원이여!”

< 위업 강탈(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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