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85화 (85/146)

동의하냐고?

동의를 말하지만 강요다.

동의하지 않으면 같은 이방인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실로 우스운 일이다.

“동의하진 못하겠군.”

내 대답을 들은 모든 에픽들의 표정이 구겨진다. 특히 칼바나스는 대놓고 불만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물론 연기를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의를 하는 척 정보를 빼가며 실리를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집단에 끼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현시점, 모두가 자신의 ‘가치’를 기준하여 싸우고 있다.

예컨대 말피엘은 아게우스의 늑대, 공주를 원한다.

인간들은 광산의 개발을 위해 계곡과 숲을 점거한 늑대들을 몰아내길 바라며,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칭하는 에픽들은 오로지 공주의 독점만을 노리고 있었다.

공주와 늑대들 역시도 숲을 지키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나 또한 말피엘의 위업을 강탈하고자 이곳까지 왔으므로.

“동의하지 못하겠다?”

칼바나스가 위협적인 태도로 위압감을 조성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듯 되물었으나 이제라도 말을 바꾸라는 뜻이다.

실패한 이유가 여실히 보인다.

침몰할 게 뻔한 배에는 타지 않는 게 상책인 법.

“아아, 동의할 수 없다.”

“······ 너도 이방인이 아닌가? 이방인이라면 숱한 핍박과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터인데? 용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느냔 말이다.”

숱한 핍박과 죽음의 공포라.

그야 과거에도 느끼고 겪어본 일들이다.

하지만 핍박을 받았다 하여 ‘전부 죽이는’ 발상 따윈 해본 적도 없다.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겠다며 나머지 모든 것을 지우는 행위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만한 반발을 고작 ‘공주의 각성’ 정도로 넘어가려는 게 더욱 웃기는 일이었다.

“무언가에 기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나 보군.”

“뭐······? 내가 누구에게 기댄단 말이냐.”

“공주에게 의지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을 ‘이방인’ 취급하는 공주를 고립시켜 차지하겠다? 그리고 공주에게 부탁해 용을 처치하겠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애당초 아게우스의 늑대는 에픽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방인들의 공주가 아니라, 그냥 철저하게 남인 셈이다.

무엇보다 주변을 부추기고 공주를 고립시킨 뒤 차지하면 그 공주가 자신들을 위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만약 내가 공주였다면 저 에픽들부터 말살시킬 터인데.

물론 과정은 뻔했다.

늑대들이 전부 죽으면 공주를 위하는 척, 복수를 부르짖는 척 구슬릴 생각이겠지.

그 같잖은 수법에 넘어갈진 의문이지만 칼바나스의 저 ‘감정동화’ 권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말이다.

“이 웃기는 연극에 낄 생각 따윈 없으니, 알아서 하거라.”

이 저급한 연극에 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내가 광기에 젖은 황제였다고는 하나 명예를 모르진 않는다.

물론 명예라는 것도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이딴 거지같은 수작질을 부릴 정도로 선이 없지는 않다는 말이다.

하물며 과거로 돌아온 지금, 과오를 번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선을 넘는 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쉬우니까.

툭.

“어딜 가?”

“그 따위 말을 하고도 몸성히 나갈 수 있을 거 같아?”

떠나가려고 몸을 돌리자 에픽들이 길을 막아섰다.

여기서 전투를 벌이면 내 필패다.

아무리 상대가 A.I라도 열넷 전부를 상대할 순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이미 많이 겪어봤다.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날 막으면 전부 죽는다.”

“하하! 뭐라는 거야, 지금?”

“누가 누굴 죽여?”

숲을 통해, 공주를 통해 강해진 에픽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칼바나스만은 다른 에픽들과 달리 웃지 못했다.

“······ 보내줘라.”

“단장. 보내주라니요?”

“들은 게 많습니다. 죽이는 게 낫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목적을 들었다.

당연히 입단할 줄 알았으니 서슴없이 털어놓은 것이다.

거절하리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허나 거절한다면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한다.

만에 하나 어느 한 쪽에라도 흘러들어가면 그림자여단의 존재 자체가 위태롭다.

단원들의 불만에 칼바나스는 표정을 굳힌 채로 고개만 저을뿐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다. 전부는 몰라도 최소 일곱은 죽겠지.”

“말도 안 됩니다. 평범한 이방인 아닙니까?”

“아니다.”

칼바나스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 그는 태고의 존재다.”

태고의 에픽이라고.

순간 에픽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동시에 웅성거리는 소리도 커졌다.

“태고의 존재? 우리 이방인들 중에서도 극소수라는······.”

“유일하게 용을 사냥할 수 있는 에픽······!”

저들 사이에서 ‘태고의 에픽’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나저나 용을 사냥할 수 있는 에픽이라.

태고의 에픽 중에서 실제로 그게 가능한 경우가 있었나보다.

그 착각 덕분인지 더 이상 나를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나는 소란을 뒤로하고 천천히 동굴을 벗어났다.

*

칼바나스는 혼란스러웠다.

인간의 의식 속에서 각성한 에픽.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존재로서 십이주신들에게 핍박받는 불쌍한 영혼들이다.

허나 에픽은 보통 각성할 때 최소 한 가지의 권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로 인해 인간보다도, 어쩌면 신들보다도 뛰어난 존재가 될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칼바나스는 ‘감정동화’의 권능을 타고났다.

인간들을 선동하고, 에픽들마저 선동할 수 있는 이 권능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빗겨간 적이 없었다.

‘내 권능이 통하지 않는다니······.’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나타난 이방인은 달랐다.

권능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니.

하지만 칼바나스의 권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감정동화와 감정강화.

특히 감정강화는 진동처럼 엮으면 감정과잉으로 자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감정강화의 권능도 통하지 않았다.

물론 격이 높거나, 용과 같은 존재라면 제어할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빗겨갈’ 수는 없었다.

‘에픽을 지배하는 지배자격의 존재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태고의 에픽’뿐이었다.

하지만 태고의 에픽은 에픽들 사이에서도 전설처럼 화자되는 존재였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태고의 에픽은 역으로 용을 사냥하며 신도 위협할 정도라고 말한다.

그 말마따나 스스로를 ‘라인’이라 소개한 남자는 도저히 수준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마나를 흘려보냈으나 모조리 튕겨낸다.

미지의 존재와 싸우기엔 아직 잃을 게 많았다.

공주를 쟁탈하기 위해선 인원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 긴장했다? 내가?’

그는 감정을 다루는 권능을 지닌 존재였다.

자신의 감정만큼은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긴장 따위 절대로 하지 않을 터인 그가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순한 감정통제를 넘어, 그는 강자였다.

충분히 말피엘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을만큼의 강자.

그런 그가 같은 에픽을 상대로 긴장을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젠장.’

손이 땀에 젖어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태고의 에픽을 마주한 순간부터 묘하게 느껴지던 그 감정을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에픽을 지배자는 지배자격의 존재라면 당연히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더 상위의 존재일 수도 있고.

어쨌든, 정면으로 부딪치지만 않으면 저 태고의 존재도 굳이 같은 처지의 에픽을 공격해오진 않을 것이었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공주의 독점’은 아닌 것 같았으니.

하지만 만약 서로가 부딪치는 일이 생긴다면.

‘빌어먹을.’

칼바나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

돌아가는 길은 막힘이 없었다.

몰래 뒤를 따라오거나, 뒤에서 습격하는 짓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굳이 부딪히지는 않겠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로군.’

서로' 피를 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권능을 숨긴 채 활용해온 칼바나스가, 권능이 통하지 않는 나를 제대로 착각해줘서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그래서 허세가 먹힌 것이다.

일단 칼바나스의 경각심을 깨워둔 것에 만족했다.

후에 부딪히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섣불리 나를 공격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칼바나스의 성향으로 보면 오히려 포섭하려고 들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들의 방식에 내가 동의하는 일은 영원히 없었다.

‘힘을 얻는 방식에 대해서 못 들은 건 좀 아쉽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 공주에게서 어떻게 에픽이 힘을 얻는지에 대한 부분은 명쾌한 답을 듣지 못했다.

물론 모든 에픽이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수 있다면 굳이 답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긴 하였다.

‘직접 확인하는 편이 더 낫겠다.’

생포해서, 제로로 직접 기능을 살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단순히 늑대와 에픽들을 강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활용할 방법이야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생포의 방법이었다.

늑대들이 철벽으로 지키고 있으니 몰래 기절시켜 빼돌리는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칼바나스나 에픽들의 도움도 바라진 못한다.

이제와서 그랬다간 내 밑천만 드러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말피엘과 마주한다?

녀석은 나를 북부의 용으로 생각하고 있다. 작전만 잘 세우면 말피엘을 이용해 빼돌리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싫다.’

말피엘에게 도움을 받는다니.

아무리 놈의 위업을 강탈하기 위해서라지만 논외였다.

게다가 내가 개입했다는 걸 놈이 파악하면 괜히 더 경계심만 살 수도 있었다.

‘결국 영주와 용병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겠군.’

머지않아 대대적인 공습이 있을 예정이다.

그 틈에 기회를 노린다.

가장 중요한 아게우스의 늑대를 빼돌려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다. 어째서 ‘생포하라’는 위업이 내용으로 말피엘에게 전해졌는지.

그것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허를 찌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수, 혹은 에덴의 위치를 알아낼 가능성조차도 있었다.

위업이란 결국 십이주신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의 제거를 위해 존재한다. 제거가 아닌 ‘생포’라면 그 자체에 세계와 관련된 비밀이 연루되어 있을 터.

‘음?’

영주성에 들어가 길을 걷던 와중이었다.

“아악!”

용병들이 기거하는 저택으로 발을 옮기자, 저택 바깥으로 피투성이의 용병 하나가 손을 뻗고 있었다.

“사, 살려줘······!”

하지만 말을 끝내자마자 고개를 툭 바닥에 떨어트리며 기절하고 말았다.

이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1층의 거대한 홀 전체에 용병들이 너저분하게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렐이 있었다.

갑옷 곳곳에 피가 튀어있었으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됐다.

‘환영식이 제법 거칠었나보군.’

50명이 넘는 용병들을 주먹 하나로 평정했다.

아렐이 피가 묻은 손을 털며, 내게 시선을 보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오히려 상쾌하기까지 한 것 같은 눈빛.

너무 상쾌해보여서 뭐라고 할 말이 없다.

······ 아무래도 아렐이 사고를 친 것 같다.

< 위업 강탈(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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