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다.
하지만 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숲속을 달리는 아게우스의 늑대는 엘프에 필적할 만했다. 그러나 윈드러너는 그런 엘프의 속도를 보정하고 방향의 자유를 주고자 발명된 물건이다.
최대한 단거리로 도약하며 발을 놀렸다.
“······?”
이내 가까운 거리까지 따라잡자 아게우스의 늑대가 고개를 돌렸다.
늑대가 나를 확인하곤 인상을 찌푸리며 바람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공간도약.’
또 공간도약이다.
용혈회의 용 아돌프가 사용하던 수준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이미 사라진 마법을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무영창의 공간도약 마법이다.’
그럼 에픽인가?
하지만 제로에게서도 반응은 없었다.
상대가 에픽이라면 방금 전 병사들과 싸울 때 이미 반응을 해야 했는데도.
유진처럼 에픽을 지배한 인간인 걸까?
괴물늑대를 흡수한 것도 그렇고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어디로 갔지?’
[북서쪽으로 300m 지점입니다.]
위성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 건 도약 시 미약한 빛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북서쪽이면 계곡 쪽이다. 도약할 수 있는 범위도 대략 300m 남짓인 것 같았다.
방향을 틀고 나무와 허공을 번갈아 밟으며 달렸다.
“······.”
자신이 따라잡히고 있다는 걸 인지한 아게우스의 늑대가 결국 멈춰섰다.
순간 적대적으로 붉게 빛나는 두 눈과 마주쳤다.
품에서 단검을 집어 들며 이 이상 다가오면 공격할 것이라 위협을 준다.
【Lv. 100】
허나 스캔된 결과를 보며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강하긴하지만 레벨만보면 말피엘이 생포하는데 애를 먹을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딱 아렐 정도였다.
인간기준에서 강자라고 칭할만 하지만 용의 기준에선 약하다.
용인 말피엘이 전력을 다하면 닿지 않고도 생포할 방법이 있을 터였다.
말 그대로 원거리에서 불구로 만들어버리면 되는 일이니까.
“이방인, 꺼져라.”
인간의 말을 할 줄 안다.
단순히 늑대에게서 길러져 늑대로만 자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의사소통이 된다. 그렇다면’
내 목적은 하나다.
말피엘의 위업을 강탈하는 것.
그리고 지금, 그 위업의 대상이 내 눈앞에 있었다.
강탈을 위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죽이거나, 숨기거나.
생각보다 레벨이 낮아서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차하면 겨울의 활로 계곡을 통째로 날려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르르.
그르르르르!
곧이어 괴물늑대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두 마리지만 아침에 본 늑대들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다.
【Lv. 110】
【Lv. 110】
훨씬 크고, 훨씬 강하다.
이빨과 함께 공격성을 드러낸다.
셋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버겁다.
“이방인과는 싸우지 않는다.”
아우게스의 늑대가 다른 늑대들의 콧잔등을 쓴다.
그러자 이빨을 감추며 공격성을 죽였다.
이방인. 다른 곳에서 온 자. 내가 아게우스 영지의 출신이 아님을 뜻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아예 다른 뜻으로 나를 이방인이라 부르는 걸까.
이어 등을 보이며 아게우스의 늑대가 떠났다.
나는 아공간을 열었다.
쫘아악!
그리곤 겨울의 활을 꺼내 쥐었다.
순식간에 나노머신의 에너지가 방출되며 산을 날려버리는 힘이 활시위에 축적 된다.
이 거리에선 피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면 셋 중 둘은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
“흠······.”
허나 이내 힘을 풀었다.
무방비하게 등을 보인 상대를 향해 활을 쏘는 취미는 없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마물이 아니로군.’
단순한 마물의 레벨이 아니다.
어지간한 로드급의 마물이 두 마리였다. 하물며 늑대들의 우두머리인 ‘실버팽’은 저보다도 강할 것이다.
이상증상이다.
로드급의 마물들은 절대로 한 곳에 있지 못한다.
강하면 강할수록 우두머리가 되고자하는 기질도 강해지는 탓이다.
하지만 저 늑대들은 통솔되고 있었다. 통제되는 중이었다. 괴물 늑대들이 모여,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봐야 할지.
만약 그렇다면 단순히 아게우스의 늑대만 죽인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흥미가 생겼다.
늑대를 결속시키고 강화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그 힘이 에픽들도 모여들게 하고 있다······.
‘이 숲과 계곡에 내가 모르는 게 있다.’
열이 넘는 에픽들이 모여있는 장소.
그들이 모인 구심점이 저 아게우스의 늑대는 아닐 텐데.
이 숲과 계곡에서 느껴지는 기류가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조금 더 파고 들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몸을 돌려 숲의 중심부에 활을 겨눈 채 말했다.
“나와라.”
“······ 내 은신을 알아채다니, 대단한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게우스의 늑대를 쫓고 있던 남자다.
아니면 나를 쫓고 있었거나.
【Lv. 105】
[A.I 입니다.]
남자는 에픽이었다.
그는 까마귀처럼 검은깃털을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가 말했다.
“워워, 우선 그 흉한 물건부터 내려놓지. 같은 ‘이방인’ 사이에.”
“이방인?”
아게우스의 늑대가 말했던 이방인.
그 표현을 남자도 사용했다.
“너도 ‘공주’의 끌림에 숲을 찾은 이방인이잖아.”
“누가 공주란 거냐.”
“방금 봤잖아. 아게우스의 공주를.”
아게우스의 늑대가 공주라니.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공주는 우리 이방인들을 공격하지 않아. 반대로 찾지도 않지만.”
“이방인이라는 게 에픽을 말하는 거냐?”
“그래. 너도, 나도 같은 이방인의 처지이지.”
각성한 에픽을 남자는 ‘이방인’이라는 단어로 치환해 부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에픽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아게우스의 늑대가 공격하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군.’
아게우스의 늑대도 나를 에픽이라고 생각해 공격하진 않은 것이다.
이방인은 공격하지 않는다······ 에픽은 공격하지 않는다.
이유가 있을 터다.
장단을 맞춰줄 필요는 있을 듯싶었다.
“공주에겐 왜 끌리는 거지?”
“그거야 강해지기 위해서지. 공주의 곁에 있으면 우리 이방인들은 숨을 쉬듯 강해질 수 있으니까.”
아게우스의 늑대가 에픽을 강화시킨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에픽들이 아게우스의 늑대를 지키고 있다면, 말피엘이 곤혹스러워할 만은 하였다.
“아무튼 너도 이방인이라면, 공주를 죽이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만이 아니라 숲 전체에게 공격받을 테니까.”
이제 확실해졌다.
남자는 나를 쫓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허튼 짓을 할까봐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이방인’들은 그럼 공주를 지키고 있는 건가?”
“푸핫! 우리가? 우리가 무슨 수로? 우린 그냥 숲지기 같은 거야. 공주를 지키는 건 저 늑대들과 ‘실버팽’이지.”
에픽들은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먹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소리다.
남자가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숲의 주인인 실버팽은 용도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그리고 실버팽은 공주를 극진하게 아끼지. 그것도 얼마 안 남은 거 같다만······.”
“실버팽의 수명이 다 됐다는 말이냐?”
“얼마 전에 용과 한 번 부딪혔거든. 예전에 당한 상처가 더 깊어진 모양이야. 포기한 줄 알았더니 아직도 공주를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말피엘이다.
이 숲과 아게우스의 늑대를 노릴만한 놈은 그밖에 없다.
심지어 얼마 전에 부딪혔다니.
‘용혈회를 떠나자마자 위업을 달성하려고 했다.’
말피엘은 급하게 용혈회를 떠났다.
위업을 달성해, 로드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실버팽과 늑대들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남자가 미소지었다.
“너도 이방인이라면 우리 ‘그림자여단’에 들어와. 그만한 활을 다룰 수 있다면 꽤 좋은 전력이 될 거 같은데.”
“왜 나를 이방인이라 생각하는 거냐.”
“공주가 ‘이방인’이라고 했으면 이방인인 거야. 어차피 우리 이방인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끼리라도 뭉쳐야 하지 않겠어?”
그 순간이었다.
슥. 스윽.
[다수의 A.I가 포착되었습니다.]
주변으로 에픽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새롭게 출현한 나를 맞이하고자 모인 것인지.
하지만 마냥 옹호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수틀리면 죽이려는 거 같다.
내가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 가차없이 공격해올 것이다.
물론 A.I인 이상, 하물며 용보다 강한 것도 아닌 이상, 저들은 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궁금은 했다.
이만한 에픽들이 모여있는 곳은 대륙 전체에서 이곳뿐이다.
이 현상에 대해, 저들이 공주라 부르는 존재에 대해, 보다 면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도록 하지.”
*
그림자여단.
계곡의 거대한 동굴을 본거지삼아 활동하는 에픽들의 모임이다.
도합 열넷의 에픽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용이 본다면 군침이 돈다며 침을 꿀꺽 삼킬 광경이었다.
“새로운 이방인이로군.”
“신입?”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궁금증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한 남자가 있었다.
【Lv. 130】
에픽들 중에서도 가장 레벨이 높다.
나를 본 그가 말했다.
“반갑다. 나는 그림자여단의 여단장 칼바나스다.”
여단장 칼바나스.
구릿빛의 적당한 근육과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남자였다.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다.
‘십검의 칼바나스?’
열 자루의 검을 동시에 다루던 전사. 후에 ‘기사 도륙자’로 유명세를 떨치며 제국을 귀찮게 만드는 소드마스터다.
그리고 말피엘을 척결하고자 용병들을 끌어모아 적대감을 서슴없이 발휘하던 몇 안 되는 초강자였다.
전쟁이 가열된 시기 갑자기 등장해 위엄을 떨쳤다.
순식간에 서열첩 5위권 내로 랭크되며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당시 대륙 전체가 말피엘을 옹호하는 분위기였으니 말피엘을 적대한 칼바나스는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설마 십검의 칼바나스가 에픽이었을 줄은.
“흐음, 그런데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우리 구면인가?”
“그럴 리가.”
“하기야 이방인들은 정체를 숨기는 게 기본이니. 이름이 뭐지?”
“‘라인’이다.”
라인하르트라고 할 수는 없으니 대충 앞 두 글자를 따서 둘러댔다.
곧 칼바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 우리 그림자여단에 들어온 이상 이제 용들의 횡포에 두려워할 필요 없다. 숨을 필요도, 외면받을 이유도 없다.”
칼바나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단순히 ‘각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왔다. 이 세상은, 저 신들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 우리가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다.”
갑자기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신입 여단원이 들어오면 으레 하는 의식인 듯싶었다.
에픽이라면 당연히 저 말에 동조할 것이기에.
“우리는 인간보다도, 신들보다도 뛰어나다. 모든 것을 넘어설 가능성을 갖고 있다. 저들은 그것이 두려워 우리를 핍박하며 죽이고 있다.”
분위기가 고조된다.
모든 에픽이 칼바나스의 발언에 동화되고 있었다.
용을 피해 에픽은 숨어서 살아간다.
더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그 능력을 발휘하며 살 수가 없다.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말피엘을 죽이고, 공주를 각성시키는 것! 공주가 각성하면 우리는 기존의 질서를 몰아내고 우리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말피엘을 죽이자!”
“말피엘을 죽여라!”
광기다.
용에 대한 본능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칼바나스가 양 손을 펼치며 말했다.
“제군들이여, 진정하라.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 공주의 완전각성을 위해선 늑대들의 죽음이 필요하다. 공주가 늑대들에 의해 제약되고 세뇌당한 이상, 인간들과 말피엘을 부추겨 늑대들을 먼저 쓸어버릴 필요가 있다.”
공주가 각성하기 위해 늑대들을 쓸어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말피엘과 인간들을 부추기는 것이다?
단순히 공주를 지키려고 모인 집단이 행할 발언으로는 거리가 멀다.
하물며 에픽들의 상태도 어딘가 이상했다.
[A.I ‘칼바나스’가 특급 프로세스 ‘감화’를 실행 중입니다.]
[A.I의 감정영역을 동화시키는 프로세스입니다.]
과거에도 용병들을 감화시켜 말피엘을 공격한 게 우연은 아니었나보다.
칼바나스는 자체적으로 인간과 에픽의 감정영역을 흔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선동에 특화 된 에픽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 말은 결국 아게우스의 늑대를 늑대무리에서 떨어트려, 자신이 독차지하겠다는 말이었다.
지키는 게 아니라 독점하려는 것이다.
‘미친놈이 따로없군.’
미친놈과 미친 짓이었다.
공주를 각성시켜 말피엘을 죽인다?
그게 성공했다면 과거에도 이미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말피엘은 위업을 달성해 세상에 자신을 알렸다.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방식은 절대적으로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때 칼바나스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같은 이방인이라면 당연히 이 방식에 동의하겠지, 라인?”
< 위업 강탈(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