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겔 왕국은 동부의 패자다.
하지만 리겔 왕국과 딱히 좋은 기억은 없었다.
황제에 즉위한 이후 가장 먼저 정복한 나라였으니.
“풍요롭지 않나?”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며, 아렐에게 물었다.
머지않아 마차 안에서 안절부절 몸을 이리저리 꼬던 아렐이 목을 쭉 내밀어 주변을 둘러보곤 답했다.
“··· 예.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유는 풍요에서 나온다.
나와 리겔 왕국의 사이는 차치하고, 이곳이 지리적으로 풍요로운 장소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선 사계절이 뚜렷해 질 좋은 곡창지대가 많다.
씨앗을 뱉고 버리면 그 자리에서 과일이 자랄 만큼 지력도 훌륭하다.
계곡이나 강이 많아서 물 걱정도 없다.
농산물이 풍부한 덕에 수출을 통해 잘 먹고 잘산다.
대륙 전토에서 리겔왕국의 농산물을 취급하지 않는 곳이 없다.
제국은 곡식의 30% 정도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그중 절반을 리겔왕국에서 들여올 정도였으니.
‘곡식은 풍부하지만 광석이 없지.’
문제는 광석이다. 동, 은, 금, 구리와 같은 광석자원이 없다.
진짜 돈이 되는 건 농산물보단 광석자원이었으니까.
수입에 의존해선 수지타산이 안 맞았으니, 리겔왕국이 불을 켜고 아게우스 계곡의 은광맥을 노리는 이유다.
“옷은 잘······ 맞으십니까?”
아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슬쩍 시선을 내리며 옷차림을 살폈다.
“편하고 좋구나.”
아렐의 눈빛이 한차례 떨렸다.
평민들이나 걸칠 자질구레한 옷을 입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허나 정식적인 절차를 받고 국경을 넘은 게 아닌 이상 필요이상으로 눈에 띌 순 없었다.
차라리 평민으로 위장하는 게 낫다.
제르민이 봤다면 경을 쳤을 것이다. 품위가 손상된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겠지.
‘개방감이 나쁘지 않아.’
격식을 따지느라 입었던 옷들에 비하면 놀라울만큼의 개방감이다.
단순한 개방감을 넘어 해방감이라고 해야할까.
“정지!”
“멈춰라!”
아게우스 영지를 경계를 나누는 관문대.
병사들이 마차를 가로막고 탐문을 시작했다.
“이 앞은 ‘아게우스 영지’다. 통행증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동시에 아렐이 품에서 은색의 패 하나를 꺼내어 넘겼다.
그것을 받아든 병사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국 용병협회에서 인증받은 B급 용병?”
완전무장한 아렐을 보는 눈길에 수상함이 서렸다.
하지만 제국의 용병협회로부터 공인받은 용병패다.
게다가 제국 용병협회 공인의 B급 용병이면 상당한 실력자란 소리다.
한참 용병패를 살펴보던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조는 아닌 것 같군.”
진품이다. 아렐은 진짜로 B급 용병이었다.
후에 편하게 움직일 수단으로 용병협회에 가입해놓은 것이다.
이어 병사가 마부석의 나를 바라보곤 말했다.
“저 남자는?”
“내······ 수행인이다.”
아렐이 최대한 목소리를 깔았다.
B급 용병이 수행인을 두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노예인가?”
“······ 노예는 아니다.”
병사들이 말하자 아렐이 고개를 저었다.
후레한 차림새가 노예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평민의 옷을 입었다지만 단번에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이야.
“흠, 아게우스 영지를 방문한 목적은?”
“아게우스 영지에서 용병들을 모집하고 있다는 공문을 보았다.”
“아아, 이번에 보낸 공문을 보고 지원한 건가보군.”
끄덕!
아렐이 고개를 주억이자, 병사가 통행증에 도장을 찍어서 건넸다.
“이 통행증이 있으면 한달간 영지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그 이상 외지인이 영지에 머물려거든 영주님의 허가가 필요하다.”
“참고하겠다.”
“통과!”
병사들이 길을 텄다.
터준 길을 따라 마차가 이동했다.
‘생각보단 폐쇄적이군.’
절차 자체가 복잡하진 않지만 유효기간이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영지에 머물면 강제로 추방될 것이다. 아니면 감옥에 갇히거나.
그 이상을 체류하려거든 영주의 허락이 필요하다.
개방적인 리겔왕국 내에서 이만한 제약이면 상당히 폐쇄적이다.
얼마지나지 않아 뒤에서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가 귓가를 간질였다.
“쯧, 돈에 눈이 먼 용병들 같으니.”
“용병들은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가보지.”
“B급 용병이면 얼마 못 버티겠어.”
용병들에 대한 회의감이 느껴지는 대화내용이다.
벌써 많은 용병들이 죽어나갔다는 듯.
왕국에서 파견한 소드마스터도 죽었는데 용병들로 계곡을 토벌하는 게 가당치않은 일이다.
신경을 끄고 말을 몰았다.
그렇게 관문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렐이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괜찮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소개하도록.”
나를 수행인이라고 소개한 게 마음에 걸린 것이리라.
허나 내가 이런 차림을 했을 때부터 이야기가 되어있는 부분이었다. 굳이 죄송하고 말고 할 게 없다.
아렐이 마차 밖으로 상체를 쑥 내밀었다.
그러곤 복잡미묘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부턴 제가 몰겠습니다.”
“됐다.”
“······.”
마부를 자처한 것도 나였다.
마차를 몰며 느긋하게 리겔 왕국을 관람하는 것도 꽤 운치가 있는 일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일을 해보겠는가.
“으으으······.”
마차 안은 침음성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아렐의 목소리로 가득찼다.
*
영지 하나를 건너왔을 뿐인데 바깥과 안의 차이가 상당했다.
‘어둡군.’
아게우스 영지 바깥의 주민들은 꽤 여유로워 보였으나, 이곳 아게우스 영지 내부의 주민들의 표정엔 그늘이 깔려있었다.
계곡 주변으로 마을이 조성되어 있으나 완성되진 않았다.
울창한 숲. 나무를 베어 마을을 넓히고 있지만 시공이 중단된 것이다.
광맥의 주변은 커다란 마을이 조성되기 마련이었다.
은광맥이 발견된 것치곤 조촐하기 그지없는 마을이다.
영지민은 이천 명이 조금 넘는 수준.
‘애당초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다.
애당초 아게우스 영지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던 장소였다.
영지를 관리하는 영주들이 마물들에게 지속적으로 목숨을 잃어 아예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것을 지금의 영주와 왕국의 의지로 여기까지 끌고온 것이다.
온갖 희망섞인 말로 여기까지 온 영지민들은 벌써 몇 년째 수탈만 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정작 광맥의 개발은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아게우스 계곡에 유독 에픽이 많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아게우스 계곡에 존재하는 에픽의 숫자다.
유진의 ‘탐색지도’는 대륙 전역에 있는 에픽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 지도를 찍어 활용한 덕분에 나 역시 에픽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울창한 숲과 계곡은 인공위성으로 찍어도 확인할 바가 없으나 열이 넘는 에픽들이 비슷한 지점에 겹쳐있는 상태였다.
에픽들이 이렇게 모여있는 경우는 다른 곳을 살펴봐도 전무하다.
‘유독 아게우스의 늑대만은 생포하라는 위업······ 다른 위업과는 분명히 다르다.’
위업은 경계를 넘은 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용도다.
하지만 처단이 아니라 ‘생포’하라는 위업은 나도 처음보는 것이었다.
북부의 용의 데이터를 뒤져봐도 생포하라는 위업은 찾아볼 수가 없었건만.
이 위업은 무언가가 다르다.
생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그때였다.
“늑대다!”
“시, 실버 팽의 무리다!”
쿵! 쿠릉!
저 멀리, 울창한 숲속에서 나무들이 쓰러지며 다수의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급품을 노린다!”
“이 개새끼들이!”
영주성에 닿기 직전.
길을 따라 보급품을 옮기던 사람들이 습격을 받았다.
순식간에 거의 열 마리에 가까운 괴물늑대들이 인간을 죽이고 보급품을 망가트린다.
일반늑대보다 족히 세 배는 크다.
사람보다 큰 놈들이 닥치는대로 모든 걸 씹어먹고 있었다.
‘실버팽.’
아게우스의 늑대를 길렀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늑대다.
이곳 계곡과 숲의 주인이며 늑대들을 통솔하는 리더였다.
하지만 정작 실버팽은 보이지 않았다.
그 무리의 늑대들로만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아게우스의 늑대도 없었다.
크르르르!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나와 마차를 향해 늑대무리 중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베어라.”
“예.”
아렐이 갈라틴을 뽑아 다가오는 괴물늑대의 머리에 꽂았다.
찰나의 순간 오러를 둘러 두개골을 꿰뚫자, 푹 소리와 함께 몸을 떨던 괴물늑대가 바닥에 쓰러졌다.
크르르?
아우우우우!
그것을 본 늑대들이 신호를 주고받더니 자리에서 물러났다.
설마 자신들을 헤칠 수준의 인간이 이 자리에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늑대들이 물러나자, 보급품을 옮기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죽어있는 늑대의 사체를 보곤 늑대를 물리게 한 게 우리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사,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보는 행색인데 용병이십니까?”
아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감탄했다.
“하! 병사들도 당해내지 못하는 괴물늑대를 일격에!”
“감사합니다, 용병나리!”
“혹시 영지까지만 호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습격에 의해 다수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괴물늑대를 죽일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한 상황.
영주성이 지척이니 호위를 부탁해온 것이다.
끄덕!
내 눈치를 본 아렐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영주성으로 가는 길이었으므로.
*
“훌륭하오. 용병이 ‘실버팽’의 늑대를 죽이다니!”
영주성.
아게우스 영지의 영주가 직접 아렐을 맞이했다.
보급을 해오는 병사와 사람들을 구했으니 직접 치하를 할 만한 공로였다.
통행증에 영주의 직인을 박아넣은 뒤 가죽주머니와 함께 건네며 그가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번 토벌에 함께해주시지 않으시겠소?”
끄덕!
아렐이 고개를 주억이자, 영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든든하군! B급 용병이지만 실력은 훨씬 좋아보이니 특별히 착수금으로 금화 두 닢을 주겠소. 토벌에 성공하면 열 닢을 추가로 주고. 공로에 따라 당연히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할 것이오.”
의뢰에 착수하는 것만으로 금화 두 닢이면 말도 안 되는 단가다.
어지간한 토벌의뢰도 완수할 경우 성공보수가 금화 한 닢이었다. 하물며 성공하면 열 닢, 공로에 따라 추가로 더 주겠다니.
돈을 쏟아붓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 영지의 세금이군.’
아무리 실력이 좋아 더 준다고는 하지만.
병사들이 적대감을 보인 이유와 주민들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영지 내에서 따로 차출하여 영주가 용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당연히 차출되는 비용은 영지의 피 같은 세금일 수밖에.
하긴. 이만큼이나 단가를 올리지 않으면 지원할 용병이 없을 법도 했다.
왕국에서 파견된 소드마스터가 아게우스의 늑대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다. 죽음을 불사하고 토벌에 몸담그려는 용병은 어지간하면 없다.
“괴물늑대를 죽인 실력자다! 특별히 숙소를 신경쓰고. 다른 용병들보다 더 좋은 음식을 내어주도록.”
“예, 영주님.”
하인들이 답했다.
이어 영주가 아렐을 보며 말했다.
“본격적인 토벌이 시작되기 전까지 푹 쉬시오. 그리고 오늘 일은 잊지 않겠소.”
*
늦은 저녁.
아렐을 숙소에 보낸 직후, 나는 그곳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영주성 바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인공위성으로 확인한 결과, 저들이 죽인 괴물늑대의 사체를 바깥에서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를 도발하듯이 말이다.
그 주변으로 마궁사와 마법사, 그리고 기사들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사삭!
“나타났다!”
“아게우스의 늑대다!”
이윽고 숲속에서 조용하고 빠르게, 인간의 형상을 한 늑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늑대의 가죽을 두른 여자.
얼굴에 문신마냥 피를 칠한 아게우스의 늑대가 순식간에 도약해 기사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죽여!”
“죽여라!”
“아악!”
난장판이다.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기사들이 입은 갑옷의 철판을 주먹으로 뭉게고, 뼈를 갈아 만든 단검으로 목을 찍어 피분수를 만들었다.
기사들이 막아섰으나 미친 듯이 돌진하는 아게우스의 늑대를 막지는 못했다.
이윽고 돌파를 완료한 아게우스의 늑대가 죽은 괴물늑대의 사체에 손을 댔다.
그러자.
휘이이이!
사체가 사라졌다.
마치 흡수한 것처럼.
이내 아게우스의 늑대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늑대를 흡수하곤, 증발하듯 모습을 감춘 것이다.
“젠장!”
“또 놓쳤나!”
기사들이 이를 갈았다.
‘공간도약.’
하지만 나는 보았다.
공간도약이다. 멀지 않은 장소로 이동한 것이다.
공간도약을 했으나 어디로 갔는지 위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기껏해야 300m 안팎의 거리.
‘잡는다.’
생각보다 빠른 조우였다.
윈드러너로 벽을 넘은 후 신속히 아게우스의 늑대를 쫓기 시작했다.
< 위업 강탈(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