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몬토의 시선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하체의 어느 부분을 말하는 건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내······ 그것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예. 생명연금술의 기초이지요.”
팔몬토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라는 것이다.
현자의 돌만 있으면 될 줄 알았더니 외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마지막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입에 담았다.
“씨앗, 그러니까 내 종자를?”
“정액 말입니다.”
뭘 그리 돌려 말하느냐며 팔몬토가 정곡을 찔렀다.
‘······ 돌겠군.’
알아들었다. 알아들었는데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아무리 미쳤어도 황제였다.
손짓만으로도 품을 수 있는 여자가 궁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황제가 기거하는 궁의 시녀들은 모두 법적으로 황제의 여자다. 미색이 뛰어난 시녀들로만 따로 골라서 배정했으니 젊은 황제가 금욕할 수 있겠는가.
이는 카를로스 대공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여자에 미쳐서 국정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마저도 밤자리에서 암살위협을 당한 이후부터는 강제적인 금욕에 들어갔지만······.
이곳은 궁이 아니라 섬이지 않은가.
엘프와 다크엘프들밖에 없는.
‘엘프와 다크엘프는 미색이 뛰어나기로도 유명하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이 섬은 천국이다.
씻지 않아도 광이 나는 잡티 한 점 없는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하나같이 미남미녀가 아닌 자가 없었다.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아름다움이다.
심지어 잘 늙지도 않는다.
수백년을 살아온 페르세포가 이제 고작 삼십대의 외관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그들의 특성과 미색 탓에 예로부터 인간에게 착취당한 일이 많았다.
본능적으로 시선이 돌리자 팔몬토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혼자서 처리하고 오시지요.”
“······ 무엄하다.”
“그럼 이 중에 고르시겠단 것입니까?”
바쁘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팔몬토의 말은 듣고 있었는지 엘프와 다크엘프들이 경멸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인간에게 당한 것이 많은 그들로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제국의 황태자로서, 한때 황제였던 자로서 혼자 처리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괴감과 모멸감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겠나.
[마스터. DNA의 채취가 목적이라면 털과 혈액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남성성의 기능을 요구한다면 그 또한 혈액 속에 잔류시킬 수 있습니다.]
‘제로. 너는 천사인가?’
[나노머신입니다.]
천사가 내려왔다.
혈액만으로도 해당하는 기능을 발휘하게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피로도 충분하다.”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전하. 피로 수정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해보고 안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팔몬토를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다.
일반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직접 보여줘서 믿게 만드는 수밖에.
“······ 현자의 돌만 날리는 게 아닌지.”
팔뚝에서 피 몇 방울을 채취해간 팔몬토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페르세포 대공이 입을 열었다.
“공방을 둘러보시겠습니까?”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팔몬토 공방. 그 이름과 위엄은 익히 들었지만 나조차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이곳에서 탄생한 각종 장비들로 다크엘프들은 숫자가 적음에도 열세를 극복했다. 가뜩이나 강한 놈들이 무장까지 완벽하니 도저히 뚫어낼 수가 없었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도록 하지.”
*
섬의 숲속 중앙에 위치한 공방은 그 크기부터 남달랐다.
그야말로 공장이다. 대도시의 거대 공방들과 비교해도 비견될 수준이었다.
‘숫자에 비해 쓸데없이 크다.’
솔직한 감상이다.
엘프와 다크엘프들로만 운영하기에는 쓸데없이 컸다.
거대한 화로와 연기를 뿜어내는 시설 따위는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이백명이 들어와서 작업을 해도 충분한 크기와 넓이였다.
매캐한 연기가 굴뚝에서 쏟아지는 걸 보니 가동 중인 것 같다.
내부로 들어가자 쇠질을 하는 대장장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이 있기는 있었군.”
“예. 인력이 필요할 땐 조건부로 인간 대장장이들을 들이고 있습니다.”
수십명의 대장장이들.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다.
이만한 크기가 그제야 이해가 갔다.
깡. 까앙-!
시끄럽게 들리는 쇠질소리.
단순히 쇠질만 하는 것도 아니다.
“어깨견갑을 보강해야 한다니까!”
“옳소! 병사들의 부상부위 중 가장 생환률이 높은 것도 어깨부상을 입은 병사들이었다고!”
“이번 북방에서의 전쟁 통계를 봐도 어깨부상자가 가장 생존률이 높았어!”
그들은 갑옷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 부위를 더 보강해야할지 토론하는 중인 것 같았다.
어깨를 부상당한 병사들의 생존률이 가장 높았으니, 어깨견갑을 더 보강해 방어력을 높이자는 주장이었다.
“생존자의 오류로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페르세포 대공이 물었다.
하지만 이건 흔히들 하는 오류였다.
특히 탁상공론을 하는 자들이 많이 범하는 실수다.
“살아돌아온 자들만으로 통계를 내면 당연히 어깨부상자가 많겠지. 죽은 자들에 대해선 통계를 낼 수가 없으니 생기는 오류다.”
“······ 그 말씀은?”
“어깨견갑을 보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차라리 더 적게 생환한 부상부위를 중점으로 보강하는 게 맞다.”
그때였다. 열띤 토론을 벌이던 대장장이들 중 하나가 물었다.
“누구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복슬복슬한 털과 씻은지 오래되어보이는 피부.
그럼에도 눈에 생기가 살아있는 자들이었다.
페르세포 대공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곤 나에 대해 묻는다. 대공에게도 크게 관심이 없는 걸 보면 진짜 장인들만 모아둔 모양이었다.
페르세포 대공이 말했다.
“황태자 전하십니다.”
“······ 예? 황태자 전하가 이곳엔 왜?”
대장장이들이 웅성거렸다.
그들 외에 인간이 이 섬에 온 게 처음인 탓이다.
하물며 그 인간이 제국의 황태자라니.
내가 짧게 설명했다.
“조사단장으로서의 시찰이다.”
“조사단장? 그게 뭡니까?”
말하는 억양을 들어보면 제국민들이 맞는 것 같은데, 조사단장에 대해서 모른다.
세상물정에 어둡다.
아니, 황실의 일에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북방에서 전쟁이 벌어진 건 알지만 황실의 일에는 관심이 아예 없다.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며 무기개발만 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아무튼 전하, 전쟁을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부위보다 어깨견갑을 보강해야 생환률이 더 높아집니다.”
그로도 모자라 황태자가 전쟁에 대해서 뭘 알겠느냐며 입을 연다.
하지만 전쟁을 모르는 건 저들이었다.
가소로울 따름이나, 페르세포 대공이 나섰다.
“아니,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깨견갑에 더 힘을 실을 필요가 없습니다.”
“대공님. 그럼 다리를 보강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무거워만 질뿐입니다.”
“그래서 가볍게 만드는 게 인간들의 주류인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용으로 만들려면 무겁고 튼튼해야합니다.”
지금 만들어지는 부츠는 전쟁용이 아니다.
병사들이 신는 부츠는 평상시에도 활용이 가능하게끔 오래전에 개량되어 굳혀진 것이었다. 평화의 시대, 전쟁을 겪은 이가 거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대장장이들이 입을 꾹 닫았다.
페르세포 대공의 연륜. 그는 전쟁을 수차례 겪어본 자였으므로.
이윽고 페르세포 대공이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전쟁을 겪은 자들도 모르는 건데, 대단하십니다.”
“기본소양이다.”
“기본소양이라······.”
페르세포 대공은 진심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기본소양이라 말하지만 대부분이 부족하다.
거의 모든 귀족들에게 없는 ‘통찰력’을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지니고 있었다.
‘북방에서 불리한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킨 게 신성군주였지.’
북방의 패배는 확정적이었다.
카를로스 대공이 이끄는 대군은 순식간에 북방을 정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군주가 나타난 뒤 단번에 전세가 역전됐다.
북방민들을 결속시키고, 군주들을 활용해 몰아치는 소름돋는 전술은 페르세포 대공의 귀에도 들려올 정도였다.
극도로 불리한 상황을 5대 5로 만들어 결국 평화협정까지 끌고간 저력.
‘전쟁을 알고 있다.’
책으로만 배운 전쟁이 아니다.
수많은 전쟁을 섭렵한 노장과도 같다.
크로프트와 함께 있었다고는 해도 그는 전사이지 책략가가 아니었다.
신성군주가 직접 전두지휘하며 전장을 이끌었다.
“저건 무엇이냐?”
순간 벽에 걸린 부츠를 향해 묻자 페르세포 대공이 정신을 되찾곤 답했다.
“······ 윈드러너입니다. 엘프용으로 제작되고 있는 부츠지요.”
“아직 미완성인가?”
“기능적인 부분은 완성되었습니다만, 사용하기엔 너무 조건이 어려워서······.”
윈드러너.
다크엘프들이 전장을 휘젓게 만든 일등공신.
공기를 발로 차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아티팩트다.
저 부츠를 신은 다크엘프들의 신묘한 움직임은 아직도 생각이 날 정도였다.
“아렐. 신어보겠느냐?”
“예.”
아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몇 번 신어본 적이 있는 듯 자연스러웠다.
“개발단계에서 아렐도 몇 번 신어봤지만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예전보다 조정은 됐지만, 여전히 힘들 겁니다.”
페르세포 대공의 말마따나 부츠를 신은 아렐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쿵!
벽을 박차고 공중을 돌다가 그대로 추락해버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아렐이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이젠 세 발자국 정도는 걷는군요. 원래는 한 발자국도 못 움직였습니다만. 마나의 감응력이······ 아렐, 검을 깨웠습니까?”
끄덕!
아렐이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세포 대공이 미소지었다.
갈라틴. 그녀의 가족과도 같은 정령검은 오랜세월 봉인돼 있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어쩐지. 아렐의 표정이 예전보다 훨씬 밝아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갈라틴을 깨웠다면 황태자가 관여하고 있을 것이다.
‘정령무기를 깨울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구나!’
페르세포 대공은 전율했다. 신성군주임을 알았을 때보다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진짜로 정령무기를 깨울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내가 한 번 신어보마.”
“전하. 인간이 신기에는 많이 힘들 겁니다.”
“할 수 있을 것 같군.”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알겠습니다. 신어보시지요.”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확실하다.
아무리 황태자가 신성군주이고 정령을 깨울 수 있어도 이건 아예 다른 문제였다.
마나의 감응력의 영역이 인간과 엘프는 아예 다른 영역에 있었다.
‘넘어지면 창피하기만 할 터인데.’
몇 번이나 신어본 아렐도 세 발자국을 못 넘겨 넘어졌다.
대장장이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넘어진다면 그보다 꼴사나울 수가 없다.
대장장이들도 곧 일어날 일을 예견했다는 듯 실실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내 착각이었나?’
자신감은 좋지만 그게 쓸데없는 고집이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라인하르트를 너무 좋게만 평가한 것일까.
역시 아직 너무 어려서 만용을 부리는 것이다.
페르세포 대공이 내심 혀를 찼다.
이윽고 라인하르트가 윈드러너를 신었다.
그리고······.
휘익!
허공을 밟고 한 바퀴 돌았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허공을 밟고 한 바퀴 돌았다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타타닥!
공중에서 달리기까지 한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허공에 떠있었다.
페르세포 대공은 할 말을 잃었다.
엘프들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건만.
“흠, 제법 쓸만하군.”
< 윈드러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