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80화 (80/146)

“카르넬 황녀님의 성인식 이후 처음이로군요, 라인하르트 전하.”

페르세포 대공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답했다.

조사의 명분으로 들이닥쳤으나,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여유가 있었다.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군.’

다른 귀족들은 멀리서 와이번이 보이기만 해도 난리법석을 떤다.

반면 페르세포 대공은 한 치 흐트러짐없이 차분했다.

오랜세월을 살아온 다크엘프이며 제국을 양단하는 대공이니 당연한 것이다.

애당초 놀라는 반응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내가 찾아온 이유를 알겠나?”

“비룡기사단이 최근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제 영지까지 날아온 걸 보면 필시 조사의 이유겠지요.”

조사를 위해 찾아왔음을 알고도 이런 여유다.

재계의 황제라는 수식어가 붙는 페르세포 대공이,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철저하게 은폐됐다. 들추어도 그의 이름이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그를 엮으려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하다.

1황비와 귀족들을 엮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의 공방에서 군납을 하는 철검에 질나쁜 구리를 섞는다는 첩보를 접수했다.”

“허어. 대체 어떤 공방에서 그런 짓을 한다는 말입니까?”

“‘팔몬토 공방’과 그 외 세곳이다.”

팔몬토 공방.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페르세포 대공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 공방은 공개된 적이 없는 곳입니다만······ 누구에게 첩보를 받았습니까?”

“글쎄, 그건 그대가 더 잘 알겠지.”

팔몬토 공방은 페르세포 대공이 비밀리에 엘프의 무기를 개발하는 곳이었다.

엘프와 다크엘프 장인들로만 이루어진 공방으로 제국에선 그 존재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만약 누가 알렸다면 그건 엘프나 다크엘프라는 뜻이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에 페르세포 대공의 인상이 구겨졌다.

순간 아렐을 봤지만, 아렐은 고개를 저었다.

“··· 팔몬토 공방은 군납을 위해 철검을 만들지 않습니다. 잘못 된 첩보 같군요.”

“첩보가 들어온 이상 조사단장으로서 직접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다.”

“······.”

페르세포 대공이 숨을 죽이며 나를 바라봤다.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이리라.

팔몬토 공방이 공개되면 그는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을 것이다.

인간들은 이종족이 강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하물며 페르세포 대공이 직접적으로 몰래 엘프와 다크엘프들만을 모아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지금쯤이면 윈드러너를 만들고 있겠지.’

윈드러너. 다크엘프들이 미래에 착용하는 신발이다.

바람을 가르며 적은 마나로도 허공을 달릴 수 있게 만들어준다.

부유하는 시간이 길지는 않아도 활용도는 엄청났다.

원하는 순간 허공을 벽처럼 밟아서 자세를 틀어버릴 수도 있다.

자연과 체내의 마나를 동시에 활용해야하는 특성상 인간은 사용할 수가 없었지만.

성벽을 사다리 없이 벽을 밟고 올라가는 걸 보곤 뭐 저런 게 다 있느냐며 놀란 기억이 있었다.

페르세포 대공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공방을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조사를 거절하는 건가? 후에 밝혀지면 더 불리하게 적용될텐데?”

“첩보를 받아 조사를 할 작정이었다면 제게 통보하지도 않았겠지요. 뭘 원하십니까?”

역시 말이 잘 통한다.

나도 페르세포 대공을 적으로 돌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카를로스 대공의 파벌을 쳐내는 것만으로도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상황. 페르세포 대공까지 상대하려면 내가 먼저 과로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비밀의 공방을 언급하며 그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팔몬토 공방의 주인을 만나야겠다.”

“공방은 공개할 수 없다고······.”

“‘호문클루스’.”

“······!!”

호문클루스라는 단어에 페르세포 대공이 반응했다.

팔몬토 공방의 주인은 생명공학의 연금술사다.

현자의 돌을 만든 카이첼과는 전문 분야가 달랐다.

그는 인공생명체, 호문클루스를 만들어낸 유일한 연금술사이나 생명을 창조한다는 건 금기의 영역이다.

알려졌다간 대륙 전체에 공격을 받으리라.

그래서 머리카락 한올 안 보이게 숨겨뒀건만.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있다.”

“무슨 도움을 받아야하는지,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나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검은 영역이 내 등뒤로 나타났다.

“아공간······?”

“오호라, 알고 있나?”

“천년 전 사라진 고위의 마법 아닙니까?”

“그럼 이것도 알고 있겠군.”

탁.

손뼉을 부딪히자, 거대한 뼈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 드래곤······!”

본 드래곤이라니!

최근 본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낸 건 한 번뿐이었다.

페르세포 대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성군주와······ 무슨 관계이십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내가 신성군주다.”

*

순간 잘못들은 건가 싶었다.

북방과의 전쟁. 북방의 새로운 주인으로 신성군주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그리고 페르세포 대공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더욱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군주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북방의 군주들도 아니었다. 신성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물이었다.

‘신성군주가······ 황태자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황태자가 북방으로 향한 시기와, 신성군주가 탄생한 시기가 묘하게 맞물린다.

적어도 시기상으로는 맞았다.

허나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황태자가 북방을 일통한 신성군주라니?

‘아공간에 본 드래곤. 신성군주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신성군주가 라우넬 황자를 구했다.

라우넬 황자와 함께 황궁에 나타난 일화는 이미 유명했다.

황자를 구하며 전쟁을 멈추는 게 그 목표인가 싶었으나, 사실상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였다. 적국의 황자를 죽이진 못할망정 직접 적진에 들어와 놓아주다니.

허나 신성군주라 황태자라면 이 역시 설명이 가능하다.

‘최근에 선보인 행보들도 그럼······.’

라인하르트는 갑자기 강해졌다. 콜로세움에서 라우넬을 이겨내고 소드마스터임을 증명했다. 그 힘을 어쩌면 북방에서 얻은 걸지도 모른다.

본 드래곤과 함께 힘과 세력을 등에 업었으니 거칠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태껏 숨겨왔다. 헌데 숨기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부터 신성군주임을 밝혔다면 반발만 컸겠지. 하지만 조사단장의 권력을 손에 쥔 지금은 숨길 이유가 없어진거다.’

북방에서 돌아온 라인하르트가 갑자기 자신이 신성군주임을 밝힌다?

카를로스 대공과 그의 휘하 귀족들에 의해 난도질 됐으리라.

황비들도 가만히 두고 볼 이유가 없으니 황제도 경질할 수밖에 없을 터다. 제국의 황태자가 야만인들의 신이 된 게 무슨 불명예냐며 직위가 박탈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령의 주인이 되고, 실력을 인증했으며, 권력까지 등에 업었다.

심지어 카를로스 대공과 관련된 귀족들을 무너트리는 중이다. 1황비도 제압하지 못했으니 사실상 이제 더 이상 황태자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제국 내에 없었다.

‘카를로스 대공이 알게되면 내전이 벌어진다.’

현재에 이르러서 황태자를 경질할 순 없다.

그러기엔 존재감이 너무 커져버렸다.

신성군주임이 밝혀지면, 남은 건 내전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라인하르트는 자신에게 신성군주임을 밝혔다.

저 눈빛. 저 태도. 저 행동 하나하나 모두에.

‘······ 자신이 있다.’

엄청난 자신감이 서려있다.

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듯이.

하지만 카를로스 대공은 알려진 것보다 무서운 자다. 그의 저력은 북방에만 쏠려있지 않다. 도리어 숨겨진 힘과 연결이 더욱 컸다.

수많은 집단과 나라들이 카를로스 대공과 연결되어 있었다.

‘줄을 서라는 건가.’

라인하르트 황태자의 행보의 중심은 단 하나였다.

황실의 권위를 바로세운다.

작금에 이르러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모르진 않으리라.

조사단장의 직위로 조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제국 깊이 뿌리잡은 부패를 알아봤을 것이다. 군대, 생활, 황실에 흘러들어가는 모든 것들에 비리가 연루되어 있었다.

걷잡기엔 너무 커져버렸다.

허나 황태자가 신성군주라면.

북방의 힘을 한데 합쳐 움직일 수 있는 권위를 지닌 자라면······.

“······ 팔몬토 공방의 주인을 만나게 해드리지요.”

*

영원한 비밀은 없다.

하지만 비밀을 공유할 수는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비밀은 보장되기 마련이었다. 누군가가 배신하지 않는 이상.

더불어 페르세포 대공을 억제할 구실책도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면 반발하고 공격하려 들겠지만 반대로 내가 신성군주임을 알리면 그 또한 움직일 수 없다.

물론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페르세포님. 이곳에 인간을 데려오시다니요······?”

페르세포 대공의 영지와 연결된 작은 섬. 인간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그 영역에 엘프와 다크엘프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50에 불과했으나 멸종하기 직전이라 전해지는 그들이 이만큼이나 모여있는 게 더 대단한 것이었다.

“아렐! 이게 웬일이니?”

“······ 잘 계셨나요, 언니.”

“애들아! 아렐이야! 아렐이 돌아왔어!”

“뭐? 아렐? 아렐이 왔다고?”

한쪽에선 더 난리였다. 아예 페르세포 대공은 찬밥신세였다. 정작 엘프와 다크엘프들에게 둘러싸인 건 같이 데려온 아렐이었다.

“팔몬토. 제국의 황태자입니다.”

페르세포 대공이 말했다.

페르세포야 모든 이에게 존대를 하기로 유명했지만, 설마 같은 다크엘프에게도 그럴 줄이야.

그나저나 팔몬토 공방 주인의 이름이 팔몬토였나.

팔몬토가 떨떠름한, 적의가 섞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제국의 황태자가 이곳은 왜?”

“그대가 해줘야할 일이 있다.”

“제가 해야할 일이······ 요?”

나는 즉시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에서 본 드래곤이 튀어나오자, 팔몬토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보, 본 드래곤 아닙니까?”

“이 본 드래곤을 살릴 수 있겠나?”

본 드래곤을 되살린다. 용혈회의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팔몬토가 난색했다.

“뼈만 남은 시체를 어떻게 되살리겠습니까?”

“호문쿨르스에 관해선 그대가 최고라고 알고 있다만.”

팔몬토가 시선을 돌려 페르세포 대공을 바라봤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팔몬토가 긍정했다.

“아직 실험단계입니다.”

“‘현자의 돌’이 있다면?”

“······?!”

품에서 붉은 돌 3개를 꺼내들었다.

카이첼은 현자의 돌을 만들어내 자신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그로 인해 바알이 탄생했고 무한한 나노머신을 다룰 수 있게 됐다.

이미 한 번 만들었으니 두 번이라고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심장에 박아넣은 현자의 돌보다 질이 떨어지는 ‘복제품’이었지만, 호문클루스의 핵이 되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혀, 현자의 돌······! ‘진리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현자의 돌을 받아든 팔몬토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복제품을 보고 저럴 정도이니 진품을 보면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이 돌이라면 가능합니다! 호문클루스의 핵이!”

“······ 정말입니까?”

페르세포 대공도 팔몬토의 말에 반응했다.

호문클루스. 인공생명체로 멸종해가는 다크엘프를 재건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호문쿨루스의 핵이 될 재료가 없었다. 인공생명체의 심장은 아무리 등급이 좋은 마정석이라도 대체가 불가능했다.

“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나에 대한 팔몬토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카이첼이 만들어줬으나 대량생산은 못 한다.

복제품을 만들려면 재료가 필요한데 그 재료가 자신의 생명이라고. 1년에 하나 정도를 만들 수 있으나 무리해서 3개나 뽑아낸 것이다.

“할 수 있겠나?”

“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면?”

“주인될 자의······ 그것입니다.”

“그것?”

팔몬토의 시선이 내 하반신으로 향했다.

< 내가 신성군주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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