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77화 (77/146)

나는 가만히 말피엘이 내민 손을 바라봤다.

‘한때나마 말피엘도 과거로 돌아온 건 아닐까 생각했지.’

말피엘에게 죽은 뒤 과거로 돌아왔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정말로 나 혼자 과거로 돌아온 것인가?’ 고민할 때도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같이 돌아왔다면 그것은 말피엘일 가능성이 가장 농후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 얼굴을 보고도 말피엘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돌아왔다면 놈은 내가 용이 아니라 인간임을 알고 있을 터.

제국의 황태자가 왜 이런 장소에 있는지 의구심을 가져야 정상이었다.

한데, 반응이 없다. 고로, 나를 모른다.

“음?”

하지만 말피엘이 이내 내밀었던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묘한 녀석이로군.”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걸까?

닿기만 하면 킬코드를 삽입하고 해킹을 할 수 있다. 제로의 나노머신이 침입하고 자유로웠던 A.I는 단연코 없었다.

그러나 닿지 못하면 한계가 있다.

체내에서 벗어나 원격으로 내보내는 나노머신은 용의 피부표면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도리어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적대감만 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말피엘은 닿기도 전에 알았다.

위험을 감지하고 펼쳤던 손을 다시 회수했다.

“본체가 아니라 유희 중인 몸으로 들어온 건가?”

“··· 그렇게 됐다.”

답하면서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의도 자체가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말피엘은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인간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어서 말이다.”

미친놈이 따로없다.

인간에 대한 거부반응이라니.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인 척을 하며 세상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던 놈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발자국 물러나는 걸 보면 저 말이 거짓은 아닌 듯 보였다. 물론 저 자체도 연기일 수도 있었다. 말피엘은 연기의 귀재였으므로.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보여지는 게 전부가 아니다. 말피엘을 수없이 겪은 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이곳에서도 가면을 쓰고 있다.

“나중에 본체로 만나게 되면 그때 다시 인사하지. 어차피 ‘본회의’ 때는 본체를 끌고 와야 할 테니.”

“본희의?”

“아직 못들었나? 용혈회는 1년에 한 번씩 본회의를 연다고 한다. 마지막 위업의 시기에 대해 논의한다고 하던데. 그때마다 각자의 역할을 정한다고 하더군.”

마지막 위업에 대한 논의?

역할 분담?

이맛살을 구긴다. 마지막 위업으로 치닫기 위해 용혈회가 시기를 정한단 말인가? 그것도 용마다 각자 역할을 분담해서?

그럼 말피엘은 ‘인류의 구세주인 척 인류를 분열시켜 전쟁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역할이었을까?

‘더 지켜본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그렇다고 하기엔 말피엘은 너무 나댄 경향이 있었다. 용혈회가 말하는 ‘균형’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나는 말피엘에게 집중했다. 스캔한 결과가 떠오른 탓이다.

【Lv. 150】

말피엘의 레벨은 아까 봤던 ‘나태의 용’과 비슷한 수준이다.

기존 용혈회의 용들보단 약하다.

아직 과거에 비해 위업달성률이 낮은 것 같았다.

물론 그래봤자 인간의 기준에선 미친 듯이 강한 축이었다. 발뭉보다도 강했고, 확실한 건 나를 죽일 때의 말피엘은 이보다 훨씬 강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위압감만을 따지자면 ‘죽음’이라 불린 알렉과 비슷하거나 더 높다. 놈이 쏘아내는 전격은 성에 들어오며 보았던 ‘번개의 장막’과도 비견되는 수준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완성되지 않았다면, 희망이 있다.

놈을 방해할 수 있는 루트는 많았다.

과거의 행적에 따라 말피엘이 취했던 보물과 능력들 따위를 먼저 강탈하면 그만이다. 이곳에서 만난 이상 과거보다 더 빠른 조우였으니.

더불어 말피엘 역시 나를 용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향후의 발자취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북부의 용이다.”

인간 자체를 혐오하여 접촉할 수 없다면, 방식을 우회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적대감은 주지 않는 방향으로.

나를 소개하자, 말피엘이 다른 용들처럼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북부의 용? 설마 그 천 년 전의?”

“봉인됐었지.”

“아아, 그래서 본체가 아니라 그 몸을 끌고온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이나 봉인되어 있었으니, 당장 본체를 끌고 올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거짓말이다. 애당초 나는 북방의 용도 아니었고, 그 본체도 이미 흡수된 뒤였다.

다들 속아넘어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주파수를 조작해 ‘용’의 대역에 고정 중입니다.]

저들이 나를 용으로 생각하게끔 제로도 연기를 돕는 중이었다.

용이 용을 알아보는 건 그들만의 특정한 ‘신호’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용만이 알아볼 수 있는 신호를 내보내 상대를 확인하는 게다.

용의 본체가 아닌 다른 생명체의 몸을 차지해도 알아볼 수 있는 건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제로는 그 신호를 흉내내, 용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휘이이익!

순간, 바람이 불었다.

사슴처럼 커다란 뿔이 솟아있는 여자가, 눈깜빡할 사이에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돌프처럼 공간을 열고 도약해 나타난 게 아니다.

‘빠르다.’

빨랐다. 초감각조차 읽어내지 못할만큼.

번개처럼, 번개보다도 더욱 빠르게 나타난 것이다.

두 개의 뿔. 새하얀 나신. 그녀는 살이 내비치는 흰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

말피엘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고룡들이 따르며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용. 드래곤 로드의 출현이었다.

백안의 로드가 나와 말피엘을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나태의 용은 떨어졌나보구나, 안타깝게도.”

“로드를 뵙습니다.”

이내 정신을 되찾은 말피엘이 고개를 숙였다.

말피엘도 이제 막 용혈회에 가입한 신입이다. 아까 나태의 용을 보았듯, 처음보는 용이 용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말피엘은 그 즉시 로드의 위대함을 알아본 것 같았다.

확실히, 로드에게서 느껴지는 나노머신의 양은 차원이 달랐다.

【Lv. 200이상】

【현재의 데이터 기반을 현저히 초과하는 레벨입니다.】

【추정 Lv. 250】

【대재앙급의 레벨입니다.】

대재앙. 인류를, 세계를 멸망시킬 수준의 레벨이라는 뜻이다. 자연재해를 넘어선 ‘항거불가’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 인류를 멸망시킨 핵전쟁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접 보고나서야 용들이 따르는 이유를 알겠다.

그저, 강해서다.

신과 비견될만큼 강하기에 용들이 존경하며 따르는 것이다.

“말피엘. 번개의 축복을 받은 사랑스러운 아이야.”

“예.”

“내가 너를 선택한 이유를 알고 있느냐?”

“제가 같은 번개의 축복을 받아서입니까?”

“아니, 너의 야욕을 높게 봐서다.”

“······.”

말피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로드는 그의 야욕을 꿰뚫고 있었다.

“그저 신이 되고자하는 다른 용들보다 더 강렬한 욕구를 품고 있지. 십이주신을 뛰어넘는 유일신이 되고싶어 하기에, 너를 선택했다.”

“제 욕망을 알면서도 선택했단 것입니까?”

“아아. 나를 죽여 나의 격을 빼앗으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말피엘의 검은 속내.

로드를 죽여, 로드의 힘을 빼앗고자 하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들여왔다.

“허나 아직은 이르다. 여섯 번째 위업조차도 해결하지 않고 있으니.”

“······!”

“위업은 용을 완성시키기 위한 도구다.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 명심하겠습니다.”

놀란 말피엘의 반응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 그리고 이로써 확신했다.

로드는 A.I의 데이터를 읽을 수 있다.

‘제로. 들켜선 안 된다.’

[예, 마스터. 은폐모드로 전환합니다.]

[표면의식을 A.I ‘북부의 용’으로 대체합니다.]

제로가 자신의 이름을 북부의 용으로 대체했다.

단순한 신호의 흉내를 넘어, 갖고 있는 북부의 용에 대한 데이터를 덮어씌운 것이다.

이윽고 로드가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A.I의 데이터를 읽을 수 있는 A.I는 처음인 탓이다.

제로가 들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용이었다.

“북부의 용이여.”

고개를 들었다. 이미 뒤로 물러나기엔 너무 멀리 왔다.

“마침내 봉인을 풀고 나왔구나. 허나······.”

말끝을 흐린다.

로드의 시선이 내게 계속 머물고 있었다.

한 차례 쳐다보고 말았던 말피엘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들킨건가?

“용혈회에 들어오는 건 너의 선택이 아니었구나. 혼란스럽더냐?”

다행이 안 들켰다.

그런데 혼란스럽냐고?

그야 북부의 용이 된 입장에선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

역시 로드는 북부의 용에 관련된 데이터를 읽고있었다. 미리 낌새를 알아차리고 대비하지 않았다면 들켰을 것이다.

“괜찮다. 이곳에서 너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게다.”

역할이라.

무슨 역할을 말하는 것이냐 묻고 싶었지만, 로드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앞으로 666일 뒤 마지막 위업이 실행된다. 그 전까지 자신이 맡을 역할을 위해 모든 준비를 끝내놓아야 할 게다.”

*

‘666일.’

로드와의 면회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왔다.

가장 알고 싶었던, 어쩌면 알기 싫었던 마지막 위업에 관한 정보.

과거 전쟁이 본격화 되기도 전에, 이미 인류 말살을 위한 마지막 위업이 실행되고 있었다.

그 시기를 로드가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몰라도 틀리진 않으리라.

666일.

일시가 묘하게 대흉년과 겹친다.

계단을 내려오자 아돌프가 말했다.

“90일 뒤 본회의가 있다. 용혈회의 용이라면 반드시 참석해야하며, 본체로 들어오는 게 규칙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본회의를 들어가야만 알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본체’였다. 본체로만 참석 가능하다는 것.

인간인 내가 용의 흉내를 낼지언정, 용 자체가 될 수는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때 아돌프가 말했다.

“배를 타고 가라. 내가 주는 선물이다.”

나는 반색하며 되물었다.

“꽤 신경을 쓴 배 같던데, 괜찮나?”

“상관없다.”

“와이번도 주는 건가?”

“······ 나는 다시 길들이면 되니, 가져라.”

와이번 열 마리는 조금 아까운 느낌이었지만 입회기념 선물치곤 나쁘지 않았다.

아돌프는 처음부터 내게 호의적이었다.

이곳 용혈회에선 가장 정상적인 놈 같았다.

물론 이유없는 호의는 없다. 바라는 게 있기에 호의를 보이느 것이다. 내가 북부의 용인 점도 한몫 할 테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개의치 않고 받도록하지.”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용혈회에서도 아돌프는 꽤 급이 있는 용 같았다. 로드가 있는 곳까지 직접 나를 데려다줄만큼의 위치는 된다는 의미였다.

또한 셋으로 분열되어 있으나 합쳐지면 죽음의 알렉과 같은 수준의 권능을 발휘할 것이었다.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해서 나쁠 건 없었다.

‘놈은 이미 떠났군.’

로드와의 대화 이후 잔뜩 굳어있던 말피엘이 급히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처럼 빠르게 성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위업의 달성을 위해서이리라.

하지만 90일 뒤 본회의에는 다시 참석할 것이다.

다소 아쉽지만 오늘만이 기회는 아니다. 같은 용혈회에 속한 이상 놈을 죽일 기회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테니.

이곳에서 내가 해야할 일은 말피엘의 제거 뿐만이 아니다.

마지막 위업의 실행을 방해하는 것 역시 놈의 죽음 못지않게 중요하다.

‘반드시 참석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본회의에 참석해야만 한다.

의지를 불태웠다.

본회의 전까지, 나도 만반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드래곤 로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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