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76화 (76/146)

동명이인이 존재할 순 있지만 이곳은 용혈회였다. 극소수의 용들만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같은 이름을 들었다. 다른 놈일 리가 없었다.

‘말피엘이 이곳에 있다.’

지금, 이곳에 있다.

심지어 나와 같은 심사를 보는 후보의 자격으로.

하지만 용혈회의 수장에 의해 심사를 보지 않아도 합격자명단에 올랐다. 알렉의 말마따나 이 심사가 끝나면 직접 보게 될 기회도 주어질 터.

‘말피엘······ 그 빌어먹을 새끼가.’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누군가를 이토록 증오하는 건 그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민다.

멀지 않은 공간에 있다고 하니, 속이 절로 메스꺼워지는 기분이었다.

위선과 위악의 결정체.

―슬프군.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란 건.

불쌍하다는 듯, 재밌어 죽겠다는 듯, 위에서 나를 내려보던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반신반인. 대영웅. 인류의 구세주.

비록 나는 폭군이었으나, 죽음을 위하는 척 쇼를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폭군이라 불렸음에, 내 자신이 행한 죄악을 부정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놈은 아니었다.

말피엘은.

필요하다면 대량학살도 서슴찮았으며, 그것조차도 자신의 영웅화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덕분에 내가 하지 않은 수많은 ‘짓들’도 내가 한 짓이 됐다.

대도시의 10만 인구가 증발한 사건, 5영웅 피살사건, 성녀 납치사건 등등.

말피엘이 자신의 영웅화를 위해 내게 덮어씌운 죄악들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악마황제였고, 대륙의 폭군이었으니, 아니라고 한들 믿을 턱이 있나.

‘이곳에 있다.’

이가 갈리지만 참는다.

나는 과거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던 폭군이 아니다.

제국의 황태자이며, 저들은 나를 ‘북부의 용’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다.

“어쨌든 우리가 심사해야할 건 이 둘이라는 거로군.”

여태껏 침묵하던 또 다른 용이 말했다.

알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용은 내 기준에서 합격이다. 내 ‘죽음’에 떨지 않는 용은 오랜만이니.”

합격의 이유로 그거면 충분했다.

아돌프가 나를 데려왔으니 이미 둘의 합격은 따놓은 셈이다.

남은 건 마지막 용의 심사뿐이었다.

“내가 데려온 ‘나태의 용’은?”

“불합격이다. 심장박동수를 조정해 겁을 안 먹은 척 하고 있지만 마나의 떨림까지 감출 줄은 모르나보군.”

“······ 하. 내가 네깟 놈에게 겁을 먹었다고?”

듣고 있던 나태의 용이 인상을 구겼다.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알렉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빨도 상대를 봐가며 드러내라. 이곳은 네가 살던 중간계가 아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네놈들이 뭔데 내 자격을 평가하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방식도 있다. 네가 나보다 강하면 된다.”

강함을 증명하면 굳이 심사를 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을 알아들은 나태의 용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보다 강한 건 당연한 것을!”

나태의 용 역시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한 용이었다.

심지어 용도 몇이나 죽여본 경험자였다.

그의 공간에서 그는 절대자였다.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은 최강자.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평가를 듣는 건 모욕과도 같았다.

용들의 모임이라는 게 궁금하여 참석하긴 했지만 결국 허울뿐이다. 서로 경쟁자인 관계의 놈들이 모여서 앞뒤로 빨아주는 무능함의 장이었다.

나태의 용이 본체를 드러냈다.

순식간에 거대한 용의 형체가 드러나며 사방에 위압감을 흩뿌렸다.

“저 정도 크기면 용아병 열 기는 만들 수 있겠군.”

“······ 여기서 더 늘어나면 놔둘 공간이 없다.”

알렉의 말을 아돌프가 받았다.

이런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

아무래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죽은 용의 사체로 용아병을 만들어온 것 같았다. 성 전역에 있는 수많은 용아병들의 출처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성까지 전부 쓸어버려주마.”

나태의 용의 입가로 가공할 마나의 입자가 모여들었다.

브레스로 이 성 자체를 증발시킬 작정인 것이다.

알렉은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나태의 용의 뒤로 검은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악!

“뭣······?!”

단말마와 함께, 나태의 용의 목에 선혈이 지며 이윽고 잘려나갔다.

쿵!

목이 떨어졌다.

동시에 거대한 동체도 바닥에 쓰러졌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것만으로 용이 죽었다. 그것도 성룡이 말이다.

용언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나태의 용이 가진 나노머신이 자체적으로 폭주했다.’

내게는 보였다.

알렉이 목을 긋는 순간, 사신이 나타난 그 찰나의 때에, 나태의 용이 가진 나노머신들이 자체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하는 것을.

목 주변의 나노머신들이 스스로 자멸하며 이내 목숨을 빼앗아갔다.

‘나노머신을 마음대로 폭주시켜 자멸시킬 수 있는 능력인가?’

그래서 죽음이었다.

이 세상을 가득채운 나노머신을 그저 의지만으로 폭주하게 만들고 자멸시킬 수 있다면, 그야말로 무적이다.

그것도 외부의 나노머신들이 의지를 갖고 공격하는 게 아니라, 체내에 지닌 나노머신들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자체적으로 자멸하게 만든다는 점에선 킬코드와 비슷하다.’

알렉은 나태의 용에게 킬코드를 심었다.

심지어 제로와 달리, 닿지 않아도 심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저 ‘죽음’에 어찌 반응하느냐가 저 능력이 실현되냐 마냐를 결정하는 듯싶었다.

제로가 반응하지 않은 걸 보면 저 능력자체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왠지 이렇게 될 것 같았다만.”

자신이 데려온 후보자가 허무하게 죽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용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북부의 용. 너는 이 상황에서도 침착하구나.”

보통 다른 용이 죽는 걸 보면 미묘한 심경의 변화라도 있어야 했다.

평생을 자신이 최고인 줄 알던 용들이 한데 모였다. 심지어 죽음의 권능을 보았따면 일말의 놀람이라도 있어야 정상이거늘.

“다른 용의 죽음 따위에는 관심없다.”

나는 최대한 태평하게 말했다.

말피엘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게 내게는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연고도 없는 용의 죽음 따위야 아무런 감흥도 못준다. 하물며 저 죽음의 권능에 대한 비밀도 풀렸다.

내 대답이 꽤 인상적이라는 듯 그가 말했다.

“멋진놈이군. 합격이다.”

“그래도 되는 건가?”

도리어 아돌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의 ‘죽음’에 초연한 순간 심사는 이미 의미가 없다. 게다가 북부의 용이라면 다른 시험은 보나마나지. 성정도 딱히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으니, 합격시키지 않을 이유가 있나?”

설계된 본능을 이기지 못하는 용은 용혈회에 필요없다.

취지에 맞는 녀석을 데려왔으니 합격시키겠다는 말이었다.

귀찮아서 대충 합격시킨 게 눈에 보였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돌프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 용혈회에 들어온 것을 축하한다. 북부의 용이여.”

*

허무하리만큼 쉽게 입회했지만 내게는 무척이나 다행인 일이었다.

이것저것 시험을 치루려 들었다면 여간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내가 북부의 용이 아님이 들통날 가능성도 높았다.

“곧 다른 입회자와 함께 로드를 뵙게 될 거다.”

다시 길의 안내를 아돌프가 맡았다.

다른 용들은 심사가 끝나자 뿔뿔이 흩어졌다. 넓은 공동 내엔 목이 잘린 거대의 용이 시체만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다른 입회자라.’

말피엘을 말하는 거다.

그것도 말피엘과 함께 용혈회의 주인을 만난다.

“로드는 어떤 용이지?”

“용혈회의 주인이며, 태초의 용이시다.”

“그럼 여태껏 신이 되지 않고 용으로 남아있는 건가?”

“그렇다. 신이 되는 것보단 마계의 침략을 막는 게 더 중요하다더군.”

“신이 되면 마계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음, 에덴에 오르면 중간계의 일에 관심이 없어진다고 한다.”

신이 되면 가치관이 변하기라도 한다는 뜻인가?

게다가 태초의 용이라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로드의 앞에선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꿰뚫어보시니.”

닥치고 있으라는 거다.

로드에 대한 아돌프의 충성심이 꽤 강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꿰뚫어본다라······.

그렇다면 제로도 꿰뚫어볼 수 있을까?

지금껏 만난 모든 용들도 제로를 알아차리진 못했다.

내게는 마지막 고비인 셈이다.

로드마저 제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용들 중 그 누구도 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였으므로.

그렇게 아돌프와 함께 한참을 걷자, 곧 거대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익.

용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큰 문이 앞에 서자 바닥 끄는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놀랍군.’

문의 내부를 보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궁처럼 수많은 보물들로 수놓아져 있다면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일 보아오던 것들을 다른 곳에서 본다고 놀라지는 않듯이.

하지만 수많은 ‘용’들이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확히 여섯.

살아있는 듯, 살아있지 않은 용의 시체들이다.

그 크기가 아까 보았던 나태의 용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공간에 있는 본 드래곤보다도 족히 몇 배는 큰 것 같았다.

위압감에 질식되어버릴 것 같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신이 된 용들의 허물이다.”

십이주신 중 절반이 용혈회의 출신이다.

그 신이 된 용들의 허물 여섯 개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저 비늘로 무기와 갑옷을 만들면 무적의 군단이 탄생하겠군.’

과연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가 있을지가 의문일만큼 아름답고 영롱하다. 오랜시간이 흘러도 부패하지 않으니 그 단단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으리라.

하지만 용들을 둘러보던 나는 한 지점에서 시선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안내는 여기까지다.”

길고 긴 계단.

그 아래에서 아돌프가 선을 그었다.

허나, 아돌프의 말은 귓등에도 들리지 않았다.

계단의 위에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피엘.’

잘못보았을 리 없었다. 북부의 성지에서처럼 착각할 리도 없었다.

저놈이다.

계단의 위, 둥근 접시처럼 펼쳐진 공간 위에 말피엘이 서있었다.

예전과 같이 재수없는 얼굴과 표정을 지은채.

저 특유의 자신감 가득한 얼굴은 내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툭, 툭.

나는 계단을 올랐다.

천천히. 급할 것도 없으니까.

과거로 돌아온 지금, 놈은 나를 모른다.

반면에 나는 놈을 알고 있다.

그러니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제로. 기회가 닿는대로 놈에게 킬코드가 담긴 나노머신을 투입해라.’

[예, 마스터.]

기회가 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킬코드를 삽입하기 위해선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아야하지만, 닿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예정이다.

이전처럼 고삐 풀린 망나니마냥 놈이 날뛰는 걸 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인다.

오늘 죽일 수 있다면 당연히 오늘 죽일 것이다.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하게 만들며 죽이는 그런 고상한 취미는 없었다.

“나와 같은 입회자인가?”

계단에 오르자, 말피엘이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 역시나 놈은 나를 모르고 있다.

“반갑다. 말피엘이다.”

일말의 의심 없이, 말피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말피엘(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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