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궁을 빠져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문만 나서도 수많은 시녀와 사람들이 대기중이며, 궁을 나가면 더 많은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몰래 황궁의 대문을 지나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용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벽을 통과했다. 용은 벽에 ‘워프 게이트’를 만들어 공간과 공간을 이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이트를 나서자 눈깜빡할 사이에 제도 바깥이었다.
‘아공간과 비슷하면서 다르군.’
고속으로 이동하여 순간이동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공간 자체를 뛰어넘을 수 있는 마법은 없다. 그런 고차원 개념의 마법은 천 년전에 사장됐다.
이미 사라진 마법의 개념을 숨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용들의 세계에서 이러한 특수한 능력은 무척이나 흔할 것이기에. 그것들 하나하나에 일일이 놀라는 용은 없을 것이었다.
“와이번?”
하지만 제도 바깥에 마련된 ‘비행수단’을 보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와이번은 고산지대에서만 살아가는 비행종의 마물이다. 날개를 펼치면 그 크기가 5m를 훌쩍 넘기며 절대로 사람의 손에 길러지지 않기로 유명하다.
100년 전쯤 제국에서도 ‘비룡기사단’을 만들겠다며 대량의 와이번들을 포획했다가, 모조리 실패한 일화는 이미 유명했다.
그런 와이번이 열 마리가 한데 묶여있었다.
작은 배와 연결되어, 허공에 띄우도록 훈련받은 것 같았다.
‘용은 마물을 조종할 수 있다.’
발뭉이 로카리 산맥의 마물들을 대거 끌고온 게 우연은 아니다. 확실히 용들은 마물을 움직일 수 있는 방식을 깨치고 있었다.
마물을, 와이번과도 같은 최상위의 괴물들을 조종할 수 있다면 백년 전 실패했던 비룡기사단을 내 손으로 탄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걸 타고 간다.”
“직접 날아가지는 않나?”
물론 직접 놈의 등에 타고 날아가면 제로의 나노머신을 주입할 수 있다. 몰래 해킹을 하거나, 킬코드를 입력해 자폭이나 복종시킬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용은 나를 설득하면서도, 나에 대한 경계를 풀고 있지 않았다.
이에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묻자 용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걸 묻는군. 본체로 이동하는 건 마나 소모가 크지않은가.”
본체로 움직이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마나를 소모한다. 평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마나의 효율 때문이었다.
이어 용 세 마리가 차례대로 배에 탑승했다.
나도 천천히 배에 올랐다.
‘와이번이 거부하진 않는군.’
다행이 와이번의 거부반응은 없었다. 철저하게 훈련된 탓인지 내가 올라가든 말든 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화아악!
이윽고 와이번들이 날개를 펼쳤다.
배를 장식한 마정석들이 빛을 뿌리며, 자체적인 결계가 펼쳐졌다.
제도 근처까지 들키지 않고 이동한 게 바로 저 결계 덕분인 듯싶었다.
‘제국에서도 찾기 힘든 수준의 마정석이다.’
최상급을 넘어서는 로얄급 마정석. 그게 발에 치일만큼 많았다.
대륙 전역에서 들여오는 마정석 중 1%만이 최상급의 판정을 받고, 그중에서도 로얄급의 판정을 받는 건 0.01%에 수렴했다.
수량이 없어서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는 그 보물을 고작 배의 은신을 위한 결계를 펼치는데 사용하고 있었다.
펄럭!
와이번들에 날갯짓에 배가 떠오른다. 이후 가파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널 뭐라고 불러야하지?”
“흠, 아돌프라고 불러라. ‘고귀한 늑대’라는 뜻이다.”
독수리, 멧돼지, 개구리 가면을 쓴 그들은 나뉘어있지만 하나였다. 처음 내게 대답한 건 독수리 가면이었지만 지금 대답한 건 멧돼지 가면이다.
단순히 몸만 나뉘었을뿐 모든 걸 공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돌프. 왜 셋으로 나뉘어있는 거냐?”
“권능이 너무 커서 나눠 담았다. 고룡으로 탈피할 때 셋으로 쪼겠지.”
무슨 권능을 지녔는지는 묻지 않았다.
용마다 지닌 권능이나 힘의 종류는 모두 다른 듯했으니.
하지만 놀라울 따름이었다. 얼마나 강하면 힘을 쪼개둔건지.
레벨 155. 셋이 합쳐지면 몇이 될지 예상도 되질 않았다.
“북부의 용이여, 너는 아직 고룡으로 탈피하지 않은 건가?”
[‘고룡’으로 탈피한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로의 대답에 따라 사실대로 말했다.
“하지 않았다.”
“놀랍군. 성룡인 상태로 고룡을 죽였다니.”
아돌프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북부의 용이 10번째 위업으로 고룡을 죽인 것은 용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 일이었다.
고룡으로 탈피했으리라 여겼는데 아직 성룡이라니.
만약 고룡으로 탈피하면 얼마나 강해질지.
‘로드급으로 강해질 수도 있겠군.’
세계의 지배종인 용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로드급의 용.
신과 필적할만한 힘을 지녔다고 전해지며, 용혈회를 이끄는 수장이 바로 그 로드급의 용이었다.
용혈회에 입회할 용의 잠재력이 높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다만, 슈퍼루키의 출현이 13번째 신이 되길 원하는 용들의 입장에선 다소 껄끄러울 수도 있었다.
그렇게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날자 한 장소에 도착했다.
세상의 끝, 정화되지 않은 마계와 지척인 장소.
척박하기 짝이 없는 절벽의 위에 엄청난 크기의 성이 덩그러니 있었다.
배에서 내리며 아돌프가 말했다.
“‘용혈성’에 온 것을 환영한다.”
*
마계는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장소다.
굽이치는 절벽과 삭막하기 그지 없는 땅들이 끊임없이 펼쳐져있으며, 혹여나 안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살아돌아올 수 없는 지옥이 바로 마계였다.
방사성물질이 가득한 마계의 바로 옆에 용혈성이 있었다.
‘마계와 중간계의 경계······.’
이 용혈성은 일종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계의 괴물들을 가둬두고 있는 것이다.
쿠오오오오!
키아아아아아아아!
바로 옆, 마계로 보이는 장소에서 수많은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번개에 맞은 듯 타버리길 반복했다.
“저건 무엇이냐?”
“로드께서 쳐놓은 번개의 장막이다. 장막을 넘는 마계의 존재들을 여지없이 태워버리지.”
“마계의 침략을 막고 있는 건가?”
“그렇다. 용혈회의 목적은 세상의 균형. 균형을 어그러트리는 마계의 존재들이 중간계에 닿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용혈회의 사명이다.”
용혈회가 존재해서 세상이 평화롭다는 의미다.
다소 오만한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방사성 물질에 쩌든 괴물들이 대륙을 활보했다면 인류는 아예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었다.
용들끼리 싸울 필요도 없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평화로운 집단이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성에 들어간 직후 깨졌다.
‘용아병.’
거대한 용아병들.
용의 뼈로 만들어진 병사들이 성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Lv. 80】
【Lv. 85】
용아병 하나하나가 레벨 80을 넘어선다. 그 숫자가 셀 수 없이 많다. 소드마스터도 겨우 상대할법한 괴물들이 이곳엔 발에 치일듯 많았다.
저 용아병들만 쳐들어와도 막을 수 있는 나라가 없을 것이다. 어지간한 나라는 하루아침에 짓밟히리라. 제국의 전력을 다해도 쉽지만은 않아보였다.
“드디어 마지막 후보가 도착했군.”
미로 같은 성의 내부를 지나 한참을 걷자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공동의 안에는 더 많은 용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 마리.’
그 숫자가 셋이었다.
아돌프를 합치면 넷.
‘허.’
말문이 막혔다. 용들의 존재감에 압사되어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건 저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숫자들이다.
【Lv. 190】
【Lv. 189】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숫자들에 정신이 나갈지경이었다.
[긴장감을 완화합니다.]
[심장박동수가 안정됩니다.]
제로가 아니었다면 마냥 평정을 유지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레벨이 저따위로 높은 건 아니었다.
가장 높은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 하나는 아돌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가면을 안 쓰고 있다.’
또한 저들은 가면을 안 쓰고 있었다.
‘제로. 찍어놔라.’
[예, 마스터.]
용의 얼굴들. 심지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같은 얼굴을 가진 용들끼리는 본능적으로 투쟁한다지만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본능에 휘둘리는 어린 용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때 바위 같이 단단한 몸과 각진 얼굴을 지닌 거구의 사내가 다가왔다.
“아돌프. 왜 이렇게 늦은 거냐?”
“마음에 드는 녀석이 없어서 늦었다.”
“그래서 데려온 게 이런 비실비실한 놈이라고?”
킁킁!
근처까지 다가온 남자가 냄새를 맡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유희 중인 몸을 끌고 온 건가? 본체는 어디가고?”
“알렉. 그는 북부의 용이다.”
“······ 북부의 용? 이놈이?”
남자, 알렉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돌프가 마저 설명했다.
“봉인에서 깨어난지 얼마 안 돼, 본체가 움직일 여력은 없다더군.”
“인간에게 당한 봉인을 천 년만에 풀었다? 뭐, 알만은 하군.”
“그는 내가 하나인 걸 한눈에 알아봤다.”
“······ 호오?”
그제야 알렉의 눈빛이 변했다.
아돌프가 셋이며 동시에 하나라는 건 같은 용도 못 알아볼만큼 정교한 문제였다. 그저 본 것만 가지고 맞춘 용은 단 한명도 없었다.
로드를 제외하면 말이다.
‘흠, 확실히······.’
알렉은 위아래로 훑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용은 ‘저주’를 다루는 용이었다. 그의 마나에 깃든 저주는 고룡마저 죽였다고 전해질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리고 알렉 역시 ‘죽음’을 다루는 용이었다.
그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생명체는 없었다. 생명체인 이상 그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해야했고, 이는 용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를 처음 본 용들은 모두 공포로 몸을 떨기 마련이었다. 고룡이라면 그 공포를 빠르게 극복하지만 어린 용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린 용이든 고룡이든 첫 대면의 순간에선 모두 조금이라도 떨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놈은.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떨지 않는다.
지극히 평온하다.
북부의 용은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었다.
하지만 천 년 전 인간에게 봉인되었다기에 무시했으나, 만만히 볼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알렉이 주제를 바꿨다.
“아무튼 아돌프가 드디어 마지막 후보자를 데려왔으니, 이제 심사를 시작할 수 있겠군.”
심사라니.
따로 시험이 있다는 말인가?
‘세 명이 동의하면 입회할 수 있다는 게 이걸 말하는 거였나.’
이제보니 레벨이 높은 용 두 마리와 아돌프가 심사관인 것 같았다.
아돌프가 급하게 나를 데려온 것도 왜인지 이해가 갔다.
그는 용혈회에 입회할 후보를 데려오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이 안 보이는군. 후보는 셋일 텐데?”
아돌프가 물었다.
그러자 알렉이 쯧 혀를 찼다.
“그놈은 로드께서 허락하셨으니, 심사를 볼 필요가 없다.”
“로드께서?”
“그래. 녀석이 꽤 마음에 드신 것 같더군.”
“로드께서 직접 입회를 허락하신 건 오백년 만 아닌가? 누구기에?”
로드가 심사를 뛰어넘어 직접 입회를 허락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처음 들었다는 듯 아돌프가 묻자, 알렉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피엘.”
“처음 듣는 이름이군.”
“음. 이름이 알려진 녀석은 아니다. 심사가 끝나면 보게 될 테니, 그때 확인해봐라.”
다소 설명하기 애매하다는 듯 알렉이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 말피엘?’
순간, 잘못 들은건가 싶었다.
말피엘이라니. 그 빌어먹을 놈의 이름이 왜 갑자기 튀어나온단 말인가.
< 말피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