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 동안 끈질기게 느껴지던 시선들.
내가 눈치챈 것을 알면서도 그림자에 숨어 용들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도 가보고, 혼자 있는 시간까지 가져봤지만, 놈들은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정작 모습은 보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 말려 죽이려는 건가? 긴장감에 잠 못 이루게 만들어 미치게라도 하려고?
일주일 동안 고민을 거듭했으나 결론은 하나였다.
······ 내가 부르길 바라고 있다.
그 생각이 맞았다는 듯, 사방에서 놈들이 튀어나왔다.
“북부의 용이여. 유희를 정말 재밌게 하더군.”
그중 독수리 가면을 쓴 놈이 말했다.
셋 다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독수리, 멧돼지, 그리고 개구리 가면을 쓰고 있었다.
수도에 나가면 쉬이 구할 수 있는 종류의 가면이다.
그나저나 북부의 용이라니, 유희라니?
‘나를 북부의 용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난 일주일간 나는 여유를 보였다. 놈들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생활했다.
그것이 유효하게 먹혀든 모양이다.
성지에 갇힌 북부의 용. 그 용으로 나를 착각하고 있다. 발뭉의 사념을 듣고 나를 자세히 살핀 결과 나를 북부의 용이라 결론 내린 것 같았다.
“귀찮게, 왜 내 주변을 계속 맴도는 거냐?”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곤 도리어 따지듯 묻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나는 북부의 용이어야만 했다. 아니라면 죽을 테니까.
‘강하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겠다.
강하다. 그냥 강한 게 아니다. 과거를 통틀어 내가 여태껏 만난 모든 강자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강하다.
과거 전쟁이 본격화된 이후 튀어나온 강자들.
이전의 무력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던 그들 중에서도 이만한 압박감을 주는 이는 몇 없었다.
마치 말피엘을 처음 마주했을 때 들었던 느낌이었다.
【Lv. 155】
근처에서 스캔한 결과를 토대로, 제로가 저들의 무력을 수치화해 내놓았다.
그 숫자가 155였다.
미친. 155? 그것도 셋 다?
[심장박동수를 조정합니다.]
[긴장감을 완화합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려고 하자, 제로가 억제했다.
눈앞의 용은 내 작은 몸짓 하나, 하나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절대로 긴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내가 북부의 용이라면 다른 용의 출현에 긴장 따위는 안 했을 것이므로.
독수리 가면이 말했다.
“귀찮았다면 사과하겠다. 그러나 유희 중인 용에게 다가가지 않는 게 불문율인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용들에게도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게 있었다.
유희 중인 용을 건드리지 않는 것도 그러한 규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작 ‘유희’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겨를이 없었다.
그조차도 모른다면 들통날 것이다.
크로프트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 무려 셋이었다.
그때 제로가 관련된 내용을 설명했다.
[‘성지의 용’의 데이터 중 ‘유희’에 관한 내용을 추출합니다.]
[유희란 에픽화 된 인간이나 짐승의 몸을 빼앗아, 용이 아닌 대상의 삶을 살아가는 용들의 놀이를 뜻하는 언어입니다.]
[일반적인 ‘에픽’과는 달리 용이 차지한 ‘에픽’은 용의 권능과 힘을 승계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본체가 취약해지는 약점이 생겨 소수의 용들만이 하는 놀이로 전락했습니다.]
[본체를 숨긴 채 유희 중인 용은 서로 모르는 척 하는 게 용들 사이의 불문율입니다.]
데이몬이 하던 짓이다.
눈이 마주친 상대 육체의 지배권을 빼앗아 휘두르는 것.
그와 다른 점이라면, 용이 본래 가진 권능과 힘까지 대상에게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예 대상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는 용들만의 놀이.
······ 그러니까, 저들은 내 몸인 ‘라인하르트’의 삶을 북부의 용이 빼앗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유희 중인 용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으니, 내가 직접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규칙을 잘 지키는 성실한 용이라고 칭찬이라도 해야하는 걸까?
게다가 사과도 해왔다.
저들의 입장에서 ‘북부의 용’이 가진 위상이 실로 작지 않음을 시사하는 바다.
‘싸우면 닿을 수조차 없다.’
발뭉과는 다르다. 비교도 할 수가 없다.
그나마 발뭉은 방심을 유도해서 검에 흘린 나노머신을 닿게 만들었다.
그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닿아서 제로의 나노머신을 흘려넣으면 승산이 있겠지만, 닿지조차 못한다면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싸우게 된다면 100%의 확률로 닿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 상태에선 그렇다.
허나, 저 용들에게도 싸울 의사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스캔결과 셋의 나노머신 성질이 99.99% 일치함을 확인했습니다.]
[A.I역시 셋으로 나뉘어져있으나, 공통의 주파수 대역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제로의 스캔으로 알아낸 건 레벨만이 아니다.
저들의 특성.
저 용들은 셋인척 하고 있는 단 하나의 개체라는 뜻이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연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셋이나 몰려온 이유가 무엇이냐? 아니, 아니지. 말을 잘못했군. 셋인척 하지만 사실은 한 명인 것을.”
“······.”
독수리 가면이 말을 아꼈다.
정곡을 찔렸으니 할 말을 잃을 게다.
“놀랍군.”
곧이어 그가 살짝 감탄한 듯 말을 내뱉었다.
“우리의 연결을 단번에 알아본 건 네가 처음이다. 북부의 용이여.”
“칭찬으로 듣지.”
“······ 북부의 용이여, 우리 ‘용혈회’에 들어오지 않겠는가?”
용혈회?
그건 또 뭐냐.
[해당하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로도 모른다. 성지의 용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더욱 신중해졌다.
북부의 용조차도 모르고 있는 단어를 내뱉으며 회유를 시도하고 있었다.
떠보는 건가? 아니면, 용들 사이에도 비밀단체가 있는 건가?
이럴 때 가장 좋은 건 입을 닫는 거다. 내가 침묵하자, 녀석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해한다. 갑작스럽겠지. 허나 ‘용혈회’는 자격이 있는 용만이 들어올 수 있는 특수한 용들의 조직이다.”
“내가 그 자격이라는 것에 부합하다?”
“북부의 용이여. 자격 자체는 천 년전에 이미 부합했다. 열 개의 위업을 달성했고, ‘에이션트 드래곤’마저 죽이지 않았나?”
자격에 부합하기에 직접 찾아왔다.
그런데 북부의 용이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나?
하기야, 끊임없이 그 방대한 방사성물질을 내뿜으면서도 천 년을 버텼다. 천 년간 약해진 결과가 그것이었을 뿐이다.
전성기 시절이었다면 놈을 이기는 건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런 북부의 용과 가프는 무승부를 이뤘다. 여러모로, 인간의 정점에 서있는 존재가 가프가 아닐까 싶었다.
하여튼 간에.
“내가 들어가야하는 이유는?”
용혈회가 용들의 조직인 건 알겠지만 그게 내가 위험을 무릎쓰고 들어갈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나의 물음에 독수리 가면이 답했다.
“십이주신 중 절반이 용혈회의 출신이다.”
······ 오호라.
이건 조금 흥미롭다.
세계가 멸망할 때마다 용혈회가 깊게 개입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녀석은 나를 용혈회에 입회시키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정확히는 북부의 용을 입회시키는 것이겠지만, 저 용혈회에 들어가면 용들에 대해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을 터.
더불어 에덴과 세계수의 위치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진짜 북부의 용이 아니라는 것.
가짜라는 게 들통나면 죽는다.
“또한 열 두 번째 위업의 실행 시기도 알 수 있다. ”
하지만······ 흥미롭다. 실로 흥미로웠다.
마지막 위업의 실행시기를 알 수 있다면 그에 맞춰 준비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용들에 대한 동태를 파악하고, 제로의 나노머신을 단체로 주입시킬 수만 있다면 강력한 용들을 반대로 멸절시키는 것도 가능하리라.
‘용을 잡으려면 용굴에 들어가라······.’
제정신만 차리면 용을 잡을 수 있다.
허나 입회 권유를 한다고 무작정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나를 끌어들여서 그쪽이 얻는 이득은 뭐지? 어차피 우리는 모두 경쟁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게끔 설계됐으니까. 하지만 설계된 본능에 따르는 건 발뭉같은 어린 헤츨링들이나 하는 짓이다.”
용에게도 구분이 있었다.
어리고 약한 용들은 헤츨링으로, 나이가 많고 강한 용들은 성룡이나 고룡으로.
발뭉의 변신 형태가 내가 봤던 것과 달랐던 이유를 그제야 알겠다.
‘발뭉이 헤츨링이라.’
이족보행에 용의 태만 입은 생김새였다.
헤츨링이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했다. 제로가 실시간으로 행동연산을 해킹하지 않았다면 상대하지 못했을 정도로.
“신의 탄생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은 북부의 용, 그대도 알 것이다.”
모른다.
그런 걸 내가 알 턱이 있나.
“용혈회는 더욱 많은 신의 탄생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끼리 싸우지 않아도 신의 탄생 주기가 짧아지는 만큼 기회는 있기 마련이다.”
“싸우기 싫어서 모인 겁쟁이들의 모임이라는 건가?”
“북부의 용이여,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이다. 쓸데없는 짓에 시간낭비를 하는 것보단 앞으로 들이닥칠 미래를 준비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타당한 의견이다.
한정적인 용의 숫자, 그중 고룡으로 거듭나는 용은 더욱 적다.
그런 이들끼리 싸우면 세상이 뒤집어지리라.
뜻이 맞지 않으면 싸우겠지만 뜻이 맞는 이들끼리 싸울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신의 탄생주기가 짧아지는 것만큼 어차피 기회는 돌아올 테니까.
더불어 더 많은 신의 탄생을 노리는 이유도 궁금했다.
‘용이나 신들끼리도 파벌같은 게 있나보군.’
말하는 투를 보면 그런 것 같다.
녀석은 나를 진심으로 설득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많지만 가장 중요한 요건을 물었다.
“입회 조건은 아까 말한 게 전부인가?”
“드래곤 로드의 허가, 혹은 용혈회에 재적 중인 용들 중 세 명이 동의하면 입회할 수 있다. 북부의 용이라면 자격은 충분하니 당연히 입회될 것이다.”
북부의 용이 아니라면?
차마 이건 물을 수가 없었다.
“북부의 용이여, 용혈회에 들어오겠는가?”
상당히 직설적이다.
녀석은 나를 북부의 용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용들이 내가 북부의 용이 아님을 알아본다면?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하면 거절하는 게 맞다. 목숨이 열 개라도 되지 않는 이상에야.
“······ 들어가지.”
하지만, 너무나도 매혹적인 유혹이었다.
이만한 기회는 평생 안 찾아올지도 모른다.
내가 입회하겠다고 말하자 독수리 가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출발하자. 지금 유희중인 그 몸 말고 본체는 어디있는가?”
바로 출발하자고?
처리해야할 일이 산더미였다.
조사단장의 직함을 맡은 게 고작 일주일 전이다. 그간 열 명이 넘는 귀족들을 조사했고 세 명을 처형시켰다.
하지만 내가 용이라면 이 사안은 ‘유희’보다 훨씬 중요하다.
내 입장에선 지금의 삶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북부의 용의 입장에선 라인하르트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용혈회와의 접선이 백배, 천배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니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 여기서 시간을 달라거나, 일 좀 처리하고 가겠다고 했다간 도리어 의심의 눈길을 받을 수도 있었다.
“꼭 본체로 움직여야하나?”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이유가 있는가?”
“본체의 상태가 좋지 못해서.”
“아아. 봉인에서 깨어난지 얼마 안 되었을 테니, 이해한다.”
다행이다. 알아서 착각해줘서.
그런데.
“제도 바깥에 비행수단을 마련해놨다. 따라와라.”
······ 속전속결도 이런 속전속결이 없었다.
< 용혈회(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