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주파수 대역으로 신호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오직 용만이 알아챌 수 있는 신호를.
저들은 억지로 관심을 끌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있음을 내게 알리는 중이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관객석에서 그들은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내 관심을 끄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무슨 의도지?’
알고는 있었다. 콜로세움에 들어왔을 때부터 제로가 포착해냈다.
허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천마군림보를 사용한 건 일종의 ‘경고’였던 셈이다. 마나의 흐름을 잃어버린 놈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결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기다리고나서, 이번에는 반대로 내 관심을 끌었다.
‘탐지의 에픽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게 아니다.’
탐지의 에픽인 유진을 찾기 위해서였다면 더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알아봤을 것이다.
내게 신호를 보내어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릴 생각은 하지 않을 터였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경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즉.
‘나 자체에 관심이 있다.’
오로지 나를 보려고 찾아왔다.
왜?
‘······ 곧 찾아오겠다는 거로군.’
다만, 한 가지는 알겠다.
머지않아 다시 찾아오리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닌 적은 곳에서의 대면을 원하고 있다.
아니면······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으라는 걸까.
확실한 건 발뭉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자들이라는 점이다.
눈을 마주치자 전신의 신경이 곤두섰다.
거대한 공룡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이러할 것 같았다. 회귀한 뒤로는 단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벽을 마주한 느낌.
과거 말피엘을 마주했을 때 느껴봤던 바로 그 느낌이다.
‘발뻗고 자기는 글렀군.’
대결에서 승리했으나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허나 겁을 먹지는 않았다.
공포를 심거나 위협을 가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대결이 끝난 다음에 내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진 않았을 것이다.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 저런 행동을 보인 것일 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병사들을 배치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면 역으로 얕잡아보인다.
용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신호를 보냈다는 건 나를 ‘용’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애당초 준비한다고 막을 수 있는 놈들도 아니었다.
‘차라리 잘됐다.’
막지 못한다면 아예 열어둔다.
놈들의 의도를 알아내고, 역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건 여유였다.
생각을 정리한 뒤, 나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이후 검을 하늘높이 치켜세웠다.
“와아아아아아아!”
“라인하르트 황태자 전하 만세!”
“만세!!”
*
황제 데우스의 앞에 라우넬과 라인하르트가 서있었다.
패자인 라우넬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 결과에 승복한다는 의미였다.
승자인 라인하르트 역시 말은 없었다.
하지만, 여유가 있었다.
데우스가 말했다.
“라인하르트, 그리고 라우넬. 실로 훌륭한 승부였다.”
훌륭하다는 말로도 부족할만큼 잘 싸웠다.
제국의 위상을, 황실의 건재함을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을 것이다.
황실에서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동시에 배출됐다.
이는 큰 흥복이고 기뻐해야할 일.
데우스가 탁상 위에 놓인 용이 수놓인 함을 열었다.
주홍빛을 띄는 둥근 구. 용옥이다. 제국이 건국될 때 만들어진 보물이며 황제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
“이 용옥은 황실의 권위가 담긴 물건이다. 용옥을 지닌 자는 황제와 같은 힘을 갖게 되며, 필요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는다.”
평생토록 데우스는 누군가에게 용옥을 쥐어준 적이 없다.
이 자리에서 용옥을 꺼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라인하르트. 철저하게 조사하여 오직 제국을 위협하는 모든 뿌리를 뽑는데에만 이 힘을 사용해야할 것이다.”
데우스의 눈이 라인하르트에게 향했다.
숨겨진 실력을 발휘하며 라우넬을 꺾었다. 그간 라인하르트에 대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믿는다. 믿어야만 했다. 이 힘이 잘못 사용되었다간 피바람이 불 테니.
용옥은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즉결처형권마저 갖고 있었다. 그래서 데우스는 단 한 번도 용옥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적이 없었다.
없지만, 처음으로 라인하르트에게 건넸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용옥을 받아들자, 손가락 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황제가 용옥마저 넘기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옥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기에, 그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용옥을 맡긴 적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지금 내게 용옥을 건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황제폐하.”
하지만 보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게 있었다.
용옥을 받아들자, 손가락 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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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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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름에 데우스가 답했다.
“하고싶은 말이 있더냐?”
“조사단에 대한 저의 절대적인 권한을 인정해주십시오.”
“절대적인 권한이라 하면?”
“임명권을 비롯한 조사단에 대한 모든 개입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조사단장이 조사단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권한만큼은 확실히 해야만 했다.
특히 조사단을 꾸리는데 외압이 들어오면 조사단 자체가 힘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건 1황비와 귀족들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일 것이었다.
“외압은 없을 것이다. 짐 역시 조사단의 일에 일체 개입하지 않을 것인즉. 조사단장이 자유롭게 하라.”
*
황태자 라인하르트의 승리, 조사단장의 임명은 수도와 제국 전체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특히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직관한 이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뭐?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소드마스터라고?”
“라우넬 황자님을 꺾었어? 그게 말이 돼?”
“이게 무슨 거짓말 같은 사실이야?”
사람들을 통해 전해들은 이들은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모두가 라우넬 황자가 발가락으로 싸워도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라인하르트 황태자의 승리였다.
만오천명이 모두 보는 앞에서 승패가 결정났다.
믿기지 않지만 진실이다.
그리고 진실이라면 라인하르트에 대한 그간의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라인하르트 황태자에 대한 소문은 뭐야?”
“미치광이가 어떻게 소드마터일 수가 있겠냐고.”
“다 음해였나?”
“황제폐하의 안목이 그럼 옳았다는 거로군.”
미친 황태자 라인하르트에 대한 소문은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 공통점은 ‘무능한 악마’였다. 실질적인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지위만 높아 악마처럼 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결을 통해 적어도 ‘무능하다’는 소문은 잘못되었음이 확인됐다.
그것만으로도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다시 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황태자 책봉이 사실 제대로 된 것이라며, 데우스의 안목을 칭송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가 가장 못마땅한 건 다름아닌 귀족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황태자가 소드마스터라니요!”
“황태자가 조사권을 온전히 쥐게되면 제국의 앞날이 어찌될지······.”
“한동안은 바짝 엎드려있어야 합니다. 대공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지금이라도 줄을 서는 게 낫지 않겠소?”
그동안 황태자를 모함했던 귀족들은 사색이 됐다.
특히 1황비에게 줄을 댔던 귀족들의 이탈이 계속되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결판이 났다. 결과를 뒤집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는 건 바짝 엎드리는 것뿐이다.
칼을 쥐었으니 그것을 어떻게 휘두를지는 쥔 사람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까지 아는 귀족은 몇 없었다. 다만, 내막을 알고 있는 1황비는 극도로 대노할 따름이었다.
“용옥을 내어주시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용옥은 황실을 상징하는 물건.
그 권위에 대해선 1황비도 익히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황제와 같은 권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작정하면 1황비를 말 그대로 폐위시켜버릴 수도 있었다. 반발은 사겠지만, 조사과정에서 탈탈 털려버린다면 답이 없다.
무엇보다 그녀를 따르는 귀족들이 하나, 둘 이탈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이탈은 권력의 약화를 가져온다.
자신의 권력이 약해지면, 라우넬의 입지 또한 좁아지는 건 당연지사.
“라우넬. 부조사단장으로 들어가거라.”
1황비는 최후의 수를 내었다.
라우넬을 부조사단장으로 미는 것이다.
제아무리 라인하르트라도 1황비가 밀어붙이면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라우넬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지금 네가 그렇게 태평할 소리나 할 때더냐?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 미친놈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제가 졌습니다. 어머니께서도 패배를 인정하셔야합니다.”
“그럼 인정하고 가만히 앉아서 죽자는 것이냐?”
“······ 그만하십시오. 졌을지언정 추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라우넬은 진절머리를 치며 떠나갔다.
정정당당한 승부에서 패배했다. 자신의 압도적인 우위라고 믿었던 대결에서 패배한만큼, 인정할 줄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라우넬은 연무장에 틀어박혀 검만 휘둘렀다.
그럴수록 초조해지는 건 1황비였다.
‘이 일을 어떡한단 말이냐.’
그간 가장 라인하르트를 못살게 군 게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라인하르트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특급 죄수동에서 귀족들을 엮은 것도, 모두 자신을 겨냥한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1황비가 불안한 눈빛으로 손톱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
“먼지 한 톨 남기지 말고 모두 끄집어내라.”
다음날, 황궁마법사 제네릭이 기습적으로 조사를 받았다.
황룡기사단을 앞세워 시작된 조사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저택과 숨겨둔 창고들이 모조리 개방되며 숨겨진 비밀문서와 보물들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제네릭. 제국법으로 금지된 노예를 사고파는 걸 넘어, 직접적으로 노예시장을 운영했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변명할 말이 있더냐?”
“······.”
제네릭이 황궁마법사의 직위를 이용해 노예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제국법으로 금지된 노예들을 대량으로 경매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는 게 밝혀졌다.
경매장은 결계로 철저히 은폐해놨기에, 그간 들키지 않고 운영이 가능했다.
또한 그와 결탁된 귀족들도 파헤쳐졌다.
결국 제네릭은 스스로 옷을 벗고 황궁마법사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결계가 몇 번이나 깨진 것도 뒤로 양질의 마정석을 팔아먹고 싸구려 마정석을 사용했다는 게 밝혀졌다.
나는 처형대에 묶인 제네릭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국의 기생충 같은 놈이로군.”
“이, 이런 경우가 어디있습니까! 모든 재산을 국고에 환원하고 직위도 내려놓지 않았습니까! 노예를 사고판다고 사형시킨다는 법은 없습니다!”
“결계에 사용할 마정석을 되팔아 싸구려 마정석으로 대체한 죄는 몇 번을 죽여도 시원찮을 중죄다. 노예는 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나는 처형수를 향해 명했다.
“처형하라.”
“아악······!”
제네릭은 처형대에 목이 잘렸다.
군법에 의한 즉결처형이다. 그간 쉬쉬하고 넘어갔던 일들을 점화시킨 것이다.
제국법으로 정해놨지만 귀족들은 법을 지키며 살지 않았다. 그야말로 법 위의 존재들이다.
노예가 없는 귀족이 없으며, 어떻게든 눈먼 나랏돈을 조금이라도 털어먹으려는 자들로 가득했다.
그걸 제제하지 못한 건 그런 귀족들의 힘이 너무 커서였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카를로스 대공을 비롯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지레 겁을 먹어서다. 굳이 평화를 깨트릴 필요는 없으니까.
‘평화의 뒷면에 존재하는 암덩어리들.’
황제 데우스도, 라우넬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는 폐단들.
나는 시작부터 벌집을 건드렸다.
가만히 놔둬서 저들은 괴물이 됐다.
또한 저 폐단적인 귀족들 대부분이 카를로스 대공의 끄나풀이다.
내가 조사단장에 올라 해야할 일은 제국을 습격한 마물의 뒷배경을 찾는 게 아니다.
발뭉이 일으켰으나 이미 죽은 놈을 내세워봤자 아무런 효력도 없다.
내가 진정으로 해야할 일은 카를로스의 끄나풀들을, 제국을 좀먹는 암덩어리들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안 그러면 똑같은 과거가 되풀이될 뿐이므로.
“이자르. 그대를 부조사단장으로 임명하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이자르. 이사벨라의 오빠인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마음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모두가 썩은동앗줄이라고 칭했던 줄이, 사실은 황금줄이었다는 게 밝혀진 순간이었다.
이 어찌 감동스럽지 않으랴. 자신의 선택이, 모든 것을 건 베팅이 성공했다.
나는 몸을 잘게 떠는 이자르를 향해 말했다.
“결계에 사용했어야할 마정석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철저하게 파고들어라. 관련된 귀족이 있다면 모조리 재판대에 세워야 할 것이다.”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결계의 약화로 인해 궁이 습격받았다.
제네릭이 결계에 써야할 마정석을 뒤로 빼돌린 탓이다.
그러니, 그 마정석을 받아먹은 귀족들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물론 그 마정석들이 어디로 흘러갔을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애당초 제네릭이 이런 간 큰 짓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카를로스 대공 덕분이다. 연관된 귀족들 역시 카를로스 대공의 끄나풀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 기회에 싹을 자른다.
그렇게 일주일가량이 흐르자 제국의 수도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중앙정계의 모든 귀족들이 숨쉬는 소리마저 죽이며 바짝 엎드려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에, 결국 내가 먼저 그들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 그만 지켜보고 나오거라, 용들이여.”
< 용혈회(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