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72화 (72/146)

―군림하는 자의 걸음걸이는 천지를 진동시키니.

거구의 남자가 춤을 추고 있다. 역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그의 발걸음에 천지가 영향을 받는다.

―잘 보아라. 이것이 진정한 왕의 첫걸음이다.

그 모든 흐름을 한데 집중하여 이윽고 내딛자, 세상의 모든 기운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천마군림보.

하늘의 마귀가 내딛는 걸음은 한 번이면 족하다.

그 한 번의 걸음걸이에 모든 것을 담는 자만이 군림할 수 있다.

북부의 마왕이라 불렸던 가프가 일평생을 일구어 만들어낸 ‘한 걸음’이었다.

역으로 기운을 펼쳐내 상리에 역행하는 것. 그 미묘한 흐름을 읽는 자만이 펼쳐낼 수 있는 극도의 걷는 법이었다.

가프는 내게 자신의 역작을, 비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타나 끊임없이 묘리를 보이며 내 눈에 익도록 만들었다.

마나의 역순환. 나노머신의 에너지를 다루는 법에 대한 강의와도 같았다.

허나 여태껏 가프는 자신의 의지를 내게 투영한 적이 없었다.

폭식과 용갑주로 말미암아 나를 지키기는 했어도,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 적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리온을 구해서인가?’

4황자인 리온은 그의 피를 진하게 이은 후손이다. 가프의 신력을 그대로 타고난 리온을 보자 마음이 동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걷는 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저 ‘한 걸음’에 모든 진리가 담겨있다. 진정한 군림자의 걸음걸이는 한 번이면 족하다는 가프의 의지도 투영되어있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번번이 실패했으나, 콜로세움에서 라우넬을 마주하자 왜인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리는 간단했다.

시계방향으로 도는 심장의 나노머신을 역으로 돌린다.

이어 나노머신들이 부딪히며 생기는 공명을 그대로 발 끝에 담아내기만 하면 순간적으로 진공현상이 일어나며 주변 나노머신들의 에너지를 방전시킨다.

하지만 그 공명의 순간은 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감각으로 잡아내지 못하면 그대로 폭주하는 양날의 검이었다.

몇 번이나 폭주하고 죽을뻔 했으나 마침내 이 한 걸음에 나는 모든걸 걸었다.

쿠르릉!

천마군림보를 펼치자 순간적으로 모든 나노머신의 에너지가 방전됐다.

[전자기펄스(EMP) 현상입니다.]

[경고. 나노머신의 에너지실드가 해제됩니다.]

[연달아 사용하면 체내의 나노머신이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아쉬운 건 두 번은 못 쓴다는 점이다.

허나, 한 걸음이면 족했다.

애당초 이 한 걸음을 위해서만 만들어졌으니.

그 효과는 대단했다.

나노머신이 두른 자체적인 에너지실드를 벗겨버렸다.

라우넬이 두르던 오러가 사라진 것이다.

“뭘······ 한 거냐?”

라우넬은 당황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물론 순간적으로 나노머신이 가진 에너지를 방전시키는 것뿐이기에,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체내의 나노머신은 빠르게 리부팅되었다.

천천히 라우넬의 오러가 회복되는 게 보인다.

‘대략 3초.’

나노머신이 자체적으로 회복되기까지 3초.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 상대의 헛점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내 나노머신도 방전되어버리는 양날의 검이지만, 제로로 인해 나는 리부팅하는 속도가 현저하게 빨랐다.

라우넬의 오러는 회복되는데 3초가 걸렸으나, 내 나노머신은 1.5초 정도면 충분했다.

그 공백의 사이.

1.5초면 삶과 죽음을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방심하지 말라는 거다.”

“······ 안 한다. 특히 너를 상대로는.”

무슨 사술인지는 모르겠으나 순간적으로 오러까지 무효화시켰다.

라우넬은 회복된 오러를 2차, 3차로 둘렀다.

거대한 오러의 장막을 신체에 입었다. 피닉스 자체가 된 것이다.

‘무슨 사술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은 안 될 거다.’

피닉스 연공법을 대성하면 불의 신이 될 수 있다.

지금 라우넬은 불의 오러를 몇 겹이나 둘러 각성한 신과도 같았다.

적당히 실력을 파악하며 몰아붙일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라인하르트가 마나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파악하지 못한 이상, 처음부터 최선을 다한다.

‘오러를 피워내지 못한 이상,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라인하르트.’

강자가 약자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자비는 빠르게 끝내주는 것뿐이었다.

사술을 쓸지언정 어차피 오러를 다루지 못하면 한계가 있다.

‘한 번에 끝낸다.’

쿠릉!

라우넬은 전력을 다해 바닥을 박찼다.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위로 치솟아오른 라우넬이, 태양을 던지듯 검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끝······!’

콰르르르릉!

땅이 파인다. 고막이 아플 정도로 광음이 하늘을 찢어발긴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소리가 난다는 건, 그만한 힘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뜻이니까.

라우넬의 눈매가 떨렸다.

촤아앙!

쳐내는 공격에, 라우넬이 몸을 틀어 바닥에 착지했다.

몇 겹이나 둘러낸 오러를 정면에서 막아냈다.

그도 모자라서 쳐냈다.

이게 가능하려거든 같은 마스터여야만 한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마스터가 아니다.

소드마스터의 격은 하늘이 내려준 재능과 노력으로 닿는 것이었다.

그러니 라인하르트가 소드마스터일 리가 없지 않은가.

“오, 오러! 오러다!”

“라인하르트 황태자께서 오러를 피워내셨다!”

“미친. 푸른색의 오러라고?”

“그럼 황태자께서 소드마스터라는 소리인가?”

관중석에 소란이 일었다.

당연하다. 라인하르트의 검술실력은 형편없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 어떤 것에도 재능이 없는 무능함의 아이콘이 라인하르트였다.

그런데 저 푸른색의 오러는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만 명이 넘는 이가 동시에 잘못보았을 리는 없었다.

“방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마스터······ 라고?”

라우넬은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의 붉은색과 비견되는 푸른색의 오러.

하지만 어떻게?

검을 휘두르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건만, 언제 마스터가 되었단 것인가.

“······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라우넬이 이를 갈았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갑자기 강해질 순 없었다.

마스터의 벽이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평생을 단련해야 닿을까 말까한 지고의 경지거늘.

그간 실력을 숨긴 채 단련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궁에 칩거한 채,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으며 홀로 수련한 것이다.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모든 이들의 관심이 주목된 이 날을 위해!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어차피 듣지 않을 테니.”

나는 라우넬의 착각에 웃고 말았다.

하기야,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나 역시도 제로가 아니었다면 평생을 수련해도 닿지 못했을 영역이 소드마스터였으니까.

그만한 고난과 역경을 겪었느냐? 하면, 고개를 저으리라.

그럼에도 나는 당당했다. 라우넬이 검의 재능을 지녔듯, 나도 제로라는 재능을 지닌 것에 불과했으므로.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죽일 생각으로 임하지 않으면 못 이길 거다.”

“닥쳐라!”

키아아아아악!

피닉스가 울었다. 피닉스 자체가 된 라우넬이 드디어 본심을 내었다.

형제싸움은 사실 이번이 두 번째지만, 라우넬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치 데이몬에게 몸을 지배당했던 기억이 온전치 않았다.

당연히 그때와도 대결의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위해 자의적으로 검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니까.

‘미안하다, 라우넬.’

형으로서 양보하면 좋겠지만.

양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자.

나도. 너도.

*

푸른색의 오러.

그것을 본 데우스는 전율했다.

이만한 충격은, 실로 수십년 만이었다.

“라인하르트 전하께서······ 오러를 피워내셨습니다.”

“저, 저만한 실력을 여태껏 감추고 계셨단 말인가?”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경하드린다고?

데우스는 말문이 막혔다.

라우넬이 벽을 넘었을 때도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지금의 놀람은 그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라인하르트가 소드마스터라니?

순간적으로 마나를 진동하더니, 이번에는 오러를 피워냈다.

가짜가 아닌 진짜다. 데우스에게도 그만한 눈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크로프트도 라인하르트를 ‘소드마스터’라고 한 적이 없다. 만약 벽을 넘었다면 크로프트는 진즉에 언질했을 것이다.

그가 언질하지 않았다는 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는 못 이르렀기 때문이었을 터.

라우넬과 비슷한 시기에 벽을 넘었다는 소리다.

혹, 정령의 도움인가?

‘아니다. 오러는 본연의 힘. 깨달은 자만이 피워낼 수 있는 진리와도 같은 힘이다.’

정령이 도와봤자 오러를 피워낼 순 없다.

저토록 선명하고 푸른 오러는 더더욱.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냐.’

오러는 상징이다.

수많은 천재가 모두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벽이 아니다.

재능과 노력 중 한 가지라도 부족하다면 절대로 닿을 수 없다.

그렇다면, 라인하르트는 홀로 칩거한 채 노력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음에도 홀로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는 증거였다.

‘바뀌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포기했다······.’

라인하르트에게 기대를 걸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광증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 포기가 너무나도 빨랐던 모양이다.

라인하르트는 포기하지 않고서 계속해서 노력한 모양이었다.

왜 크로프트가 같은 시선으로 지켜보라 하였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이미 바뀌었음에도 그 변화를 자신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하할 일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을 꾸짖어야할 일이었다.

‘황제 이전에 아비로서 면목이 없다. 자격이 없다.’

꽈아악.

데우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황제 데우스가 이 정도로 놀랐을진대, 다른 황비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특히 1황비는 전매특허인 표정관리조차 되지 않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라인하르트가 소드마스터라니.

알았다면, 어떻게든 이 대결을 무효로 돌렸을 것이다.

라우넬을 조사단장으로 만들 방법이 대결만은 아닌 탓이다.

‘저 정령검이 오러를 피워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건 분명히 정령의 소행이다. 정령무기가 아니라면 라인하르트가 어떻게 오러를 피워낼 수 있겠나.

‘검술실력 자체는 형편없겠지.’

도구의 도움을 받았다면 실력 자체는 형편없으리라.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바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검술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경험치 자체가 라우넬과 라인하르트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헌데······.

“라우넬. 왜 봐주고 있는 게냐? 혈육이라고 봐주고 있는 것이냐!”

1황비가 소리쳤다.

라우넬과 라인하르트는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밀 수 없고, 밀리지도 않는다. 첨예하게 수십, 수백합 검을 나누며 서로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허나 비등하게 싸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해한 일이다.

라우넬은 두 발로 설 때부터 검을 휘둘렀다.

천재라고 칭송받으며 수많은 명검사들에게 배움을 받았다.

오직 라우넬을 위한 마나연공법의 개발에만 어마어마한 금액을 쏟아부었다. 국고가 한차례 텅 빌 정도로 투자했다.

그런데 라인하르트는?

걷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라우넬에 비하면 한참이나 느렸다.

검?

제대로 쥘 줄도 몰랐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잘 받았나?

누가 미치광이 황태자를 가르친단 말인가.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는데.

직함뿐인 라인하르트가 어떻게 라우넬과 같은 수준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랬기에, 상식이 파괴되었을 때 1황비는 견디지 못했다.

촤르르르!

툭!

라우넬의 검이 하늘을 날아, 바닥에 꽂혔다.

“아아······.”

그것을 본 1황비가 몸을 비틀대며 쓰러졌다.

*

“······.”

정적이 일었다.

관람석의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분명한 건 결판이 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본 게 맞는지 누구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예상이 깨졌으니까.

맹신했던 믿음이 산산조각났으니까.

98.2 : 1.8

압도적인 승률. 지는 게 거의 불가능한 싸움이다.

그런데 라우넬이 졌다.

검을 손에서 떨어트린채, 그 목에 라인하르트가 검을 겨누고 있었다.

“내가······.”

라우넬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차마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다.

평생을 져본 적 없이 살았으니.

심지어 그 대상이 나임에야.

“······ 내가 졌다.”

하지만 결국 인정하였다. 참으로 라우넬답다고 해야할지.

“와아아아아아!!!”

“황태자 전하 만세!!!”

사람들은 열광했다.

승리자의 여유와 미소를 가질 법도 하지만, 정작 나는 웃지를 못했다.

라우넬에게 미안해서는 아니었다.

어쨌든 서로 최선을 다했고, 내가 이겼으니 이는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 결과였다.

······ 그러나, 눈이 마주친 것이다.

관객석의 용 세 마리와.

< 라인하르트 VS 라우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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