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이길 텐데, 너무 노력하는 거 아니야?”
이른 새벽. 라우넬은 연무장에서 검을 쥐고 있었다. 상반신을 적신 땀을 닦아낼 생각도 못한채 오직 일점(一點)에만 몰두하고 있다.
언제까지 과거의 기억에 얽메일 순 없다. 이겨내야 한다. 모든 걸 잊고 나조차 잊은 채 검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라우넬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노력하는 천재라니. 세상 참 불공평하지.”
“······ 카잔. 여긴 뭐하러 왔냐.”
라우넬은 검을 내려놨다. 대답할 때까지 카잔이 혼자 떠들 것을 알았기에. 남의 눈치 따윈 안 보는 녀석이었으니 차라리 빨리 대답하고 보내는 게 낫다.
2황자, 카잔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쪽은 파티하고 난리가 났다니까, 이쪽은 뭘하고 있나 궁금해서.”
“정말 할 일도 없나보군.”
“그치?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할 일 없이 파티라니~”
“······ 너한테 하는 말이다, 카잔.”
라우넬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잔과이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농담이나 나누며 시간을 떼울만큼 좋지도 않았다.
1황비와 2황비의 기싸움은 궁 내에서도 유명했으니, 그녀들의 자식인 라우넬과 카잔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기싸움 같은 게 있을 순 있었다.
하지만 라우넬의 입장에서 카잔은 그냥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인 철없는 동생일 뿐이었다.
“나? 나 할 일 많은데? 한 시간 뒤에 밥도 먹어야하고, 낮잠도 자야하고.”
“그게 할 일이 없다고 하는 거다.”
“재능 있는 사람이 노력까지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난 세상의 균형을 위해서 적당히 요령있게 사는 것뿐이야.”
“삶에 의욕이 없다면 검을 들어라. 의욕이 생기게 만들어주마.”
라우넬의 말에 카잔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농담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같은 핏줄을 이었을텐데 이리도 사람이 다를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곧잘 받아치는 걸 보니 질 생각은 없나보네.”
“지려고 싸우는 사람은 없다.”
“그럼 이기겠지, 뭐. 그 라인하르트인데. 그 인간이 무서웠던 시절은 어릴 때를 제외하면 없잖아?”
어린 시절의 라인하르트는 악귀 그 자체였다.
형제들에게 있어서 귀신보다 무서운 게 라인하르트였다.
폭언과 폭력은 기본이고 침을 질질 흘리며 폭주하는 모습은 인간보단 짐승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카잔과이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농담이나 나누며 시간을 떼울만큼 좋지도 않았다.
“그치?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할 일 없이 파티라니~”
1황비와 2황비의 기싸움은 궁 내에서도 유명했으니, 그녀들의 자식인 라우넬과 카잔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기싸움 같은 게 있을 순 있었다.
3황자 카르몬이나 4황자 리온은 잘 모르겠지만, 어린시절을 함께했던 라우넬과 카잔은 라인하르트의 광기에 대해서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장하며 격차는 벌어졌다. 라우넬과 카잔은 천재성을 끊임없이 증명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라인하르트는 끈 없이 계속해서 추락할 따름이었다.
라우넬이 핀잔을 주었다.
“말을 가려서 해라.”
“헤. 내심은 나보다 라인하르트를 더 싫어하고 있으면서. 황태자 책봉이 물 건너갔을 때 혼자 뒷간에서 울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황실의 권위를 위해 황제폐하께서 심사숙고하신 일이다. 내가 실망할 게 무엇이 있겠느냐.”
“진짜 고리타분하구만.”
라인하르트를 황태자로 책봉한 건 황제다. 하지만 황실에서 그 선택을 인정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번쯤 화를 낼법도 한데, 라우넬은 무덤덤하게 속으로만 쌓고 있었다.
카잔이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인간은 라우넬이었다. 특정한 감정이 아예 없는 것만 같았다.
“카잔, 본론을 말해라.”
“그냥 놀러온 건데?”
“네가 이 이른시간에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연무장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찾아올 리가 없지 않느냐.”
“흠······ 나를 너무 잘 아는군.”
정곡을 찔린 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품에서 청록색의 구슬 하나를 꺼냈다.
“이건? 바람의 보옥이지 않느냐?”
황제에게 받은 보물이었다. 그것을 카잔이 넘기고 있는 것이다.
“잠깐 쓰라고. 마나감응력을 높여주는 물건이니까.”
“······.
라우넬은 말 없이 카잔을 바라봤다.
카잔은 천재다. 나서길 싫어하지만, 어지간한 대마법사들보다도 더 뛰어난 능력이 많았다. 아마도 자신의 마나가 불안정함을 카잔은 진즉 알고 있는 듯싶었다.
“제발 그딴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줄래? 아, 닭살 돋는 것좀 봐. 역시 내 동생이라거나 뭐 이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역시 너랑은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을 것 같군.”
“······ 잠깐 빌려주는 거야. 이번 대결, 절대로 지지 말라고.”
카잔의 눈에 진심이 담겼다.
진심으로 라우넬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라인하르트가 이기는 꼴을 볼 수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카잔. 넌 왜 그렇게 라인하르트를 싫어하는 거냐?”
“그냥.”
“그냥?”
“어릴 때는 너무 무서웠는데, 막상 커보니 정말 별 거 아닌 놈이더라고. 그런 놈한테 겁을 먹었던 내가 한심해져서 그냥 싫어하기로 했어.”
그저 미쳤을 뿐인 라인하르트는 무능력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북방에서 본 라인하르트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꿈이라고, 리치가 보여준 환상 같은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지만, 왜 계속 라인하르트가 걸리는 건지 모르겠다.
“만약 라인하르트가 별 거 아닌 놈이 아니었다면?”
“갑자기 회귀라도 해서 숨겨진 힘을 깨닫는 게 아닌 이상, 그런 일은 없지 않을까?”
라우넬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갑자기 바뀔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라인하르트는 바뀌고 있었다.
북방에 다녀와 정령의 주인이 되더니, 사교계 데뷔마저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특급죄수동에서 귀족들을 엮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잔은 라인하르트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잠시의 변덕 정도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중요한 대결을 앞두고 파티를 열며 흥청망청 노는 걸 보니 역시나······ 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과가 말해주겠지.’
라우넬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건 대결의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져줄 생각 따윈 터럭만큼도 없었다.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반드시.
*
“······ 전하. 미안하게 됐습니다.”
“괜찮소.”
“리온이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기에······ 하아.”
리아 황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는 이유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황자 때문이었다.
리온.
영원궁에서 가프에게 구해진 이후로 틈만나면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조상님.”
“라인하르트 전하는 조상님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니?”
“조상님 맞는데······.”
리온은 나에 대한 호칭을 포기하지 않았다.
살덩이에 불과한 가프를 알아본 것도 신기한 일이다.
가프와 리온이 서로 교신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도 소드마스터를 능가하는 신력의 소유자.’
죽이지 않을 거라면, 옆에 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리온은 진짜로 신력의 소유자니까.
성인이 되기 전에 죽였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말피엘2가 되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는 리온의 팔목을 보며 말했다.
“리온의 힘을 왜 억제해두고 있는 것이오?”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인명사고가 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리아 황비가 리온의 힘을 억제해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리온이 지금 차고 있는 팔찌는 특정 이상의 힘을 발휘할 때 억제해주는 능력이 담긴 물건이었다.
아직은 팔찌가 버티고 있지만 1년만 지나도 부서질 것이다.
“리온이 크면 더 강해질 텐데. 그때가서 힘을 조절할 수 있게 가르치면 너무 늦지 않겠소?”
“검을 가르쳤지만 검을 부숴트렸습니다. 몸을 쓰는 법을 가르치자 궁 내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어지더군요.”
“그거야 아이니까 당연한 일이지. 함께 뛰어놀 친구도 없으니 좀이 쑤셔서 벌어지는 일 아니오.”
“또래 아이들과 놀게 했다가 한 번 크게 사고를 쳐서······.”
리아 황비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라고 왜 리온이 뛰어놀게끔 놔두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뒀다가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어쩔 수가 없었다.
“내게 맡겨보는 건 어떻겠소?”
“예?”
“리온의 신력은 선천적인 것이오. 막으려고 들었다간 반발심만 더 커지겠지.”
“괜찮겠습니까? 그······ 대결의 준비로 바쁘신 건 아닙니까?”
“며칠 더 준비한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 괜찮소.”
리아 황비는 의외라는 듯 라인하르트를 쳐다봤다.
리온이 누군가를 이렇게 따르는 건 확실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소 걱정은 되지만,정말로 ‘용’을 잡은 게 라인하르트라면 엄청난 실력자란 이야기다.
‘선뜻 리온을 맡겠다는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지.’
북부인의 가문이라는 인식이 강해 고명한 검사나 선생들은 모두 리온을 가르치는 걸 꺼려하고 있었다.
설령 있더라도, 리온의 신력을 경험하면 넌더리를 치며 도망갔다.
황태자가 직접 나서준다니 기꺼운 일이긴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아직 리온의 신력에 대해 잘 몰라서 저러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허나, 언제든 힘들면 그만두셔도 좋습니다.”
거절하면 거절하는 대로 기분만 상하게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직접 경험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게 제일이었다.
하지만 리아 황비의 예상과는 달리, 며칠이 지나도 라인하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리온은 팔찌를 벗고 생활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힘의 사용법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 대,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비밀이오.”
리아 황비의 놀라움을 뒤로하고 나는 내심 미소지었다.
리온을 잡아두면 그녀를 잡아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4황비의 지지 외에도 얻는 건 분명히 있었다.
‘가프. 너의 원을 들어줬으니, 내게 빚을 진 거다.’
내 안에 흡수된 가프는 살덩이의 형태로 방출되어, 리온과 노는척 힘을 쓰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바깥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하루에 한 시간 정도였지만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성지에서 가프는 내게 흡수되었지만,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A.I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가프는 내게 큰 빚을 졌다.
후손을 만나고, 직접 가르치기까지 하고 있으니.
그리고 그날 이후, 꿈 속에서 계속 가프가 나타났다.
그가 춤을 추며 내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천마군림보’라 불리는 마왕의 발걸음을.
후손을 만나고, 직접 가르치기까지 하고 있으니.
그리고 그날 이후, 꿈 속에서 계속 가프가 나타났다.
그가 춤을 추며 내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천마군림보’라 불리는 마왕의 발걸음을.
*
시간이 흘러, 대결 당일.
콜로세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숫자만 어림잡아 일만을 넘겼다.
“황자와 황태자의 공개대결이라니, 세상 오래살다 볼 일이군.”
“어차피 라우넬 황자님의 승리가 확정된 싸움 아닌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후계자를 교체하겠다는 건지······.”
데우스가 황제에 즉위하곤 봉인해두었던 콜로세움이다. 수도의 외곽에 있지만 오늘 황태자와 황자의 대결을 위해 특별히 다시 연 것이다.
라우넬은 차분한 모습으로 갑옷을 입고 콜로세움의 중앙에 섰다.
‘······ 파티를 열고, 애와 노느라 일주일을 보냈다지.’
라인하르트는 자신과의 대결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리온 황자를 라인하르트가 맡았다는 소문은 빠르게 황실에 퍼졌다.
대결이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에서 검술의 연습은커녕 노는데 다 소비한 것이다.
‘절대로 질 수 없다.’
이 싸움, 반드시 이긴다.
지난 일주일간 라우넬은 본신의 실력을 되찾고 넘어섰다.
카잔이 건네준 보옥 덕분에 마나감응력이 급격히 좋아진 것이다.
지금이라면 북방에서 만났던 리치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황태자 전하 납시오!”
부우우우우!
나팔 부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라인하르트가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 착각(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