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어······.”
모든 이들을 물리고 난 뒤, 황제 데우스가 피로한 듯 황좌에 앉아 이마를 부여잡았다.
제국이 공격당한 건 그가 즉위하고 처음있는 일이었다.
하물며 궁까지 타격을 입은 상황이다.
가만히 있는다면 황제로서의 자질조차도 의심당할 것이다.
‘단순한 마물에 의한 침공이어선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마물이 수도를 공격했다? 그 전까지 제국은 넋놓고 구경만했다는 소리 아닌가. 제국의 무능함을, 제국의 나약함을 대륙에 공개하는 꼴이었다.
그러니 마물의 배후가 있어야만 한다. 없어도 만들어야하는 상황이다.
평화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제국이 휘청이면 전쟁이 만연해질 것이다.
허나 카를로스 대공과의 보이지 않는 내전으로 힘의 공백이 생겨있는 시점이었다.
제국 군사력의 절반을 카를로스 대공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드러내놓고 알려지지 않았을뿐, 황실이 약해졌음을 자인하는 순간 하이에나처럼 모든 이들이 달려들어 물어뜯겠지.
그래서 이번 조사단장의 선정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라우넬은 잘 커주었다.’
그의 자식 중에 가장 믿음이 가는 아들은 단연코 라우넬이다.
라우넬은 데우스를 실망시킨 적이 거의 없었다. 데우스가 시키는 일이라면 천길 낭떨어지라도 떨어지며 임무를 완수할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평판도 좋았고, 심성도 모난 곳이 없었다.
그러니 조사단장의 직책을 맡기면 착실하게 조사해나갈 터이나.
‘······ 라우넬의 문제는 너무나도 올곧다는 것이다.’
조사만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없던 것도 있는 것처럼 꾸며내어 옭아메야한다.
이번 일의 성과에 따라, 황실의 권위가 결정된다. 황실이 아직 나약하지 않음을 만천하에 알려야하는 자리였다.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황실의 칼이 되어야만 한다.
공명정대한 라우넬이 과연 그런 임무를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카잔이라면 가능하겠지.’
2황자, 카잔.
카잔은 라우넬과 달리 항상 ‘최적의 수’를 찾아 움직인다. 게으르지만 그만큼 확실하게 자신의 몫을 해내는 게 카잔이다.
조사단장의 직책을 맡긴다면 누구보다도 빠르고 확실하게 일을 종결시킬 것이다. 필요하다면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그렇게 할 것이었다.
하지만 카잔은 필요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전체가 아니라 오직 자기자신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그래서 결과를 확신할 수가 없다.
‘3황자 카르몬이나 4황자 리온은 너무 어리니.’
마지막으로 남은 건.
‘라인하르트······.’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아들이라면 단연 라인하르트였다. 북방에 다녀온 이후 극적으로 바뀌었으나 아직도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해서, 명단에 올렸다.
라인하르트가 황비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조사단장의 자리를 내주어도 괜찮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다.
그런 처세술이 라인하르트에게 있다고 여기지 않았으니까.
필요하다면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데 라인하르트는 강골이었다.
‘라인하르트는 3황비 조세핀과 4황비 리아의 마음을 바꾸었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두 황비가 라인하르트를 선택했다.
4황비야 라인하르트가 리온을 구하며 마음이 조금 움직일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의외인 건 3황비 조세핀이었다.
조세핀은 아무도 택하지 않을 줄로만 예상하고 있었다.
2:1이면 라우넬의 우세다.
조세핀은 라인하르트를 고르며 동점을 만들었다.
데우스의 예측을 아득히 벗어난 결과.
‘칼을 쥐어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칼을 잘못 쥐어주면 피바람이 불 것이다.
한 번 쥐어준 칼을 섣불리 빼앗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신중해야만 했다.
‘정말로 라인하르트가 용마저 사냥할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면.’
이제 정말 마지막 관문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인하르트와 라우넬의 대결이라니. 라우넬의 압도적인 승리만 보였을 터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정령의 주인이 됐다.
그 힘으로 말미암아 용마저 죽였다.
라우넬은 로드 슬레이어였으나, 만약 정말 영원궁을 공격한 게 용이라면 라인하르트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는 셈이다. 그 둘은 격이 다른 칭호였다.
‘이번 대결이 인증해주겠지.’
이번 대결의 결과에 따라 모든 게 변하리라.
“후우······.”
데우스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세월이 지나며 늘어나는 나이만큼이나 그의 걱정은 많아지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혜안이 생겨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정작 현실은 그 반대였다.
특히 자식들에 관해선 도저히 알다가도 모를 것 같았다.
그중 라인하르트에 대해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알을 깨고 튀어나와 무엇이 되려는가.
자신의 예상을 모조리 깨버리는 행보를 보이며 라인하르트는 증명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위치를.
그 이상을.
또한 이번 결과에 따라 라인하르트는 날개를 달 수도, 더 낮은 지옥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라인하르트가 라우넬을 이기는 그림은 그려지지가 않았다.
기회를 주었으나 이게 독이 되는 건 아닐는지.
그것을 알기에 데우스의 심정이 편하지가 않았다.
*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황제 데우스의 ‘실력으로 증명하라’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치고받고 싸우며 누가 더 ‘강자’인지 확인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일정을 잡고 이 싸움의 결과를 ‘대대적으로 공개’하겠다는 의지마저 보였다.
‘판을 깔아주겠다?’
앞으로 7일 후.
모두에게 공개된 장소에서 라우넬과 한 판 붙는다.
결과에 따라 내 처우도 결정된다.
이기지 못하면 ‘무능한 황태자’로 낙인 찍힐 테고,
이기면 ‘실력을 감추고 있던 황태자’가 되는 것이다.당연한 일이지만 져줄 생각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덤덤히 창밖을 바라보던 나를 향해 제르민이 물어왔다.
“안 괜찮을 게 뭐 있나.”
“수심이 깊어보이십니다.”
“어느 정도로 눌러줘야할지 고민중이었다.”
“전하. 라우넬 황자전하를 얕보시면 안 됩니다.”
“농담이다. 나는 녀석을 얕본 적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없다.”
진심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라우넬은 얕본 적이 없었다.
부러워했으면 했지.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라우넬에게 시기심을 느꼈다.
주제를 바꿔 제르민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제르민. 마법은 잘 배우고 있나?”
“예. 부족하지만 4서클에 올랐습니다. 에디스님 덕분이지요.”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제르민의 꿈은 마법사였다. 하지만 대대손손 집사 가문이었기 때문에, 재능이 있음에도 3서클까지만 배우고 내 전속 집사가 되었다.
나이를 먹었으나 제르민은 여전히 마법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에디스는 내게 마법을 가르치고 싶어했지만, 나는 이미 사이오닉 에너지를 다룰 수 있다. 굳이 마법을 따로 배워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조건을 달았다.
제르민에게 마법을 가르치면, 내가 제르민에게서 배우겠다고.
회귀후 제르민에게 했던 약속을 이제야 지키는 셈이다.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로군. 이제 어엿한 마법사라 할 수 있겠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갈 길은 멀어도 마법사는 마법사지. 자, 슬슬 준비하지.”
“무슨 준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앤드류.”
끼이익!
전속 디자이너인 앤드류가 시녀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앤드류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준비한 것을 가져오거라.”
“예!”
앤드류가 다시 문 뒤로 걸어가더니, 미리 재단해놓은 정장을 가져왔다.
앤드류가 직접 맞춤형으로 제작한 정장이다.
이윽고 정장을 제르민에게 이리저리 갖다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치수는 딱 맞습니다.”
“전하. 이게 무슨······?”
눈을 깜빡이며 묻는 제르민에게, 미소지으며 답해주었다.
“오늘 주인공은 내가 아닌 제르민 그대다. 오랜 고생 끝에 정식 마법사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파티를 해야지.”
“예······?”
제르민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허나 제르민이 4서클에 올랐음을 나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게 많다.
“어서 갈아입히거라. 준비가 끝나는대로 수도로 향할 것이다.”
*
펑! 퍼엉!
불꽃이 터지고, 음악단이 노래를 부르며, 광대들이 춤을 춘다.
수도의 중심부. 심장과도 같은 그곳에서 월계수 양복점이 재탄생했다.
5층으로 증축되었으며 어지간한 대저택은 이름도 못 내밀 정도의 크기다.
1층 입구에는 내가 카르넬 황녀의 성인식날 입었던 옷이 전시되어있었으며, 그 뒤로도 앤드류의 작품들이 도열해있었다.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요······.”
앤드류가 또 다시 울먹이며 완성된 양복점을 바라보았다.
이만한 크기의 양복점은 수도 내에서도 없었다.
심지어 위치마저도 황금의 노른자 땅이니 그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제 그대의 것이다.”
“제 목숨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 가게의 평판이 내 평판과도 같을 테니.”
월계수 양복점은 수도와 제국, 대륙의 모든 옷의 기준을 바꿔놓을 것이었다. 앤드류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위로 올라가자, 이미 도착한 이들로 층이 붐볐다.
술과 음식, 귀족들과 마법사들이 한데 어우러져 파티가 진행중이었다.
투자한 귀족들이야 당연히 참석한다지만 마법사들이 있는 건 의외였다.
특히 모두가 한가락하는 마법사들이라서 그런지 더욱 눈에 띄었다.
앤드류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헉! 저, 저분은 빛의 마탑의 안드로센님 아니십니까?”
“돌풍의 마탑에서도······.”
“천의 마법사! 저런 유명한 마법사님께서 찾아와주실 줄이야!”
혼자서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유명한 마법사라면 전부 아는 것 같았다.
“마법사에 관심이 많나보군.”
“제 어릴적 꿈이 마법사였습니다, 전하. 비록 재능이 없어서 포기했습니다만, 유명한 마법사들을 먼발치에서라도 한 번 보려고 대륙 전역을 돌아다녔었습니다.”
대단한 열정이다.
제르민은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파티장의 중심으로 갔다.
그러자, 정적이 들며 그들 모두가 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소. 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도 자리해준 그대들 모두를 내 잊지 않으리다.”
“당연한 일입니다, 전하.”
“이런 멋진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저희야말로 감사하지요.”
파티를 위해 모였다.
하지만, 단순한 파티는 아니다.
저들이 바로 내 ‘지지세력’이었다. 이자르를 포함한 귀족의 숫자 열이 채 안 되지만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특히 마법사들은 내가 정령의 주인이 된 뒤로 어떻게든 나와 접선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초대에 응해준 모두에게 앤드류가 직접 맞춤형 정장을 한 벌씩 선물할 것이오.”
“오오!”
“그리고 또 한 가지 축하할 일은, 나의 집사 제르민이 4서클 마법사가 되었다는 것이오.”
“······?”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일이지.”
갑작스러운 나의 발언에 모두가 벙쪘다.
갑자기 집사가 4서클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왜 여기서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중 눈치빠른 마법사 한 명이 외쳤다.
“4서클이면 마탑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실력이지요. 전하, 혹시 집사께서 이름을 올릴 마탑을 아직 정하지 않으셨다면 저희 ‘돌풍의 마탑’은 어떻겠습니까?”
그제야 마법사들의 눈에 이채가 뗬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일’이라 언급할 정도로, 라인하르트는 집사를 아끼고 있는 것이다!
제르민의 이름을 올리는 마탑은 라인하르트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다.
더 나아가 ‘정령’에 대한 비밀을 공유할지도 모른다!
마탑주들의 시선이 단번에 제르민에게로 옮겨갔다.
“적을 올릴 마탑은 아주 중요하지요. 마탑의 격만큼은 저희 ‘하늘 마탑’도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빛의 마탑’은 어떠십니까?”
제르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터럭만큼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정점이라 불리는 게 마탑주들이다.
모든 마법사가 선망하는 존재이며 하늘에 닿은 거인들.
그들이 이제 고작 4서클에 이른 제르민의 이름을 자신의 마탑에 올리고자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제르민이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라인하르트는 그저 웃어보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입모양으로 ‘그대가 선택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반백년을 한참 넘긴 나이.
뒤늦게 마법을 다시 배우고 있는 그가, 마법의 거인들에게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제르민의 멈춰있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라인하르트와 라우넬의 대결은 수도의 모든 시민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고작 하루만에 모든 신문사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여론은 썩 좋지 못했다.
― 중요한 대결을 앞두고 파티를 벌이는 황태자.
― 마물들의 공격에 백성들은 고통받고 있다.
― 황태자는 백성의 고통이 고통으로 보이지 않는가?
― 방만한 황태자. 노력하는 황자.
신원미상의 신문들이 거리 곳곳에 수놓였다.
일종의 찌라시다. 수도의 중심부에서 공공연연하게 파티를 연 라인하르트를 지탄하는 기사의 내용이 대다수였다.
“라우넬 황자의 압승이겠군.”
“결과는 보나마나겠어.”
“그러니까 다 포기하고 파티나 벌이고 있는 것 아니겠나?”
수도의 모든 시민들이 라우넬의 압승을 점쳤다.
애당초 승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자포자기한 것이다.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니 다 포기하고 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시국에 파티라니.
시민들은 분노했다.
“그러고 보니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수도가 습격받을 때 뭘 하고 있던 거지?”
“라우넬 황자와 카잔 황자는 병사들을 이끌고 싸웠지 않나.”
“쯧쯧. 황태자가 변했네 뭐네하는 소문들은 다 거짓이었군.”
“한 두 번 속나? 차라리 이번 기회에 후계구도가 싹 바뀌어버렸으면 좋겠군.”
< 착각(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