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 사냥꾼?
예로부터 용 사냥꾼을 자처하는 인간이 없던 것은 아니다.
강자라 칭송받으며 온갖 권세를 누린 자들.
하지만 모두가 허풍이다. 사기꾼이었다.
강자와의 싸움에 목말라 있던 발뭉을 만족시킨 인간은 없었다.
‘가소롭다.’
그저 가소로웠다.
용은커녕 어지간한 마물 한 마리도 감당하지 못할 인간이 대다수였다.
약자가 강자인 척 하며 유세를 떤 것이다.
하지만 저 인간은 자신이 ‘용’임을 알고 있다.
알고서도 용 사냥꾼을 자처하며 공격해왔다.
여태까지 겪은 인간들과 달리 배포 하나는 크다고 해야 할지.
‘오러를 다를 줄 아는 소드마스터라.’
인간들의 잣대에서 강자를 측정하는 나름의 기준이었다.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검사는 확실히 강하다. 하지만 용인 발뭉의 입장에선 비효율적으로 마나를 소모하는 반푼이일 뿐이었다.
‘둘뿐이로구나.’
다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왔다면 골치가 아파졌을 것이다.
소란이 커지면 자신의 존재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으므로.
하지만 지척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두 개뿐이었다.
하나는 용사냥꾼을 자처하는 저 인간이고, 나머지 하나는······.
‘다크엘프!’
쉭. 쉬쉭.
다크엘프가 그림자 속에서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지척까지 다가온 다크엘프가 목줄기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발뭉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손이 검처럼 변했다.
스아아아아!
부딪히자, 연기처럼 사라졌다.
허상이다.
발뭉이 재차 검을 일자로 세웠다.
스아아악!
이번에도 허상이었다.
잔상이 아니라 용조차 헷갈릴 정도의 허상을 심었다.
마법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령무기?”
상대에게 허상을 심어주는 정령무기.
이전 신의 게임에서 인간이 쥐었던 최강의 무기다.
그 역시 전부 사라지거나 무용지물이 되었어야 정상이건만······.
‘번거롭게 됐군.’
정령무기를 다루는 다크엘프. 게다가 소드마스터다.
조용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일이 번거롭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발뭉이었다. 여덟 개의 위업을 처리한 최강의 용!
‘증폭.’
여덟 번째 위업, 대왕고래를 죽이며 발뭉은 증폭의 힘을 손에넣었다.
주파수를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용언’의 대역폭도 늘릴 수 있었다.
【멈춰라.】
“······!”
한층 더 강력해진 용언에 따라 다크엘프의 움직임이 멎었다.
숨소리도, 심장박동 조차도.
다크엘프를 포함한 주변 모든 사물들이 멈췄다.
“내 용언은 다른 용들의 것보다도 강력하다.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증폭된 용언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을 테지.”
증폭된 용언의 힘은 오러를 뚫는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용언의 효력은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고작 인간이나 다크엘프 따위가 항거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발뭉이 미소지었다.
“그대로 멈춘 채 죽어가라. 천천히 죽어가는 자신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대로 저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면 좋겠지만 여유가 없다.
결계석을 찾아 부숴야 한다.
그러면 궁 내에 숨어있는 ‘탐지의 에픽’의 신호를 잡는게 더 수월해질 것이었다.
탐지의 에픽만 손에 넣으면 대륙에 숨어있는 에픽들을 사냥하며 힘을 키울 수 있다. 위업을 굳이 욕심내지 않아도 신이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그런데······.
휘이익!
키앙!
뒤에서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검 한 자루.
처음 쏘아냈던 검이 조용히 떠올라 상처를 냈다.
순간적인 기지로 피부를 강화시키지 않았다면 얼굴 반쪽이 날아갔을 것이다.
‘뭐?’
발뭉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검이 스치고 지나간 얼굴의 피부를 만지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이곳은 자신의 절대영역이다.
증폭된 용언으로 ‘멈추라’ 말했으니 전부 멈춰있어야 했다.
“용언을 절대적으로 맹신하는 건 모든 용이 똑같나보군.”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마치 연기라도 한 것처럼 웃는다.
용언이 통하지 않는다.
도리어 저놈이 움직이는 것을 기점으로 ‘용언’의 지배력이 풀렸다.
‘아니.’
발뭉은 곧이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저놈이 움직여서 용언이 풀린 게 아니다.
‘상처를 통해 무언가가 들어왔다.’
멈춰있는 척 연기를 하며 쏘아낸 검.
그 검이 발뭉의 피부에 상처를 냈다.
상처를 통해 무언가가 들어왔고, 그것이 용언의 효과를 상쇄시켜버리고 있었다.
‘바이러스?’
간혹 변이를 일으키는 마나가 있다. 그것을 용들은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지금 자신의 신체 내부로 침투한 마나는 바이러스다.
그것도 가파르게 증식하며 주도권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네놈······ 정체가 뭐냐?”
바이러스를 다루는 인간?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구시대의 용이라면 이깟 바이러스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테지만 발뭉은 더욱 완벽하게 태어난 신세대의 용이었다.
자체적으로 바이러스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다만.’
재차 다크엘프가 움직였다.
하지만 반복되는 허상에 더 이상 속지도 않았다.
“큽!”
진체를 잡아내고 내팽개쳤다.
발뭉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 질질 시간을 끌렸다간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용언이 통하지 않는 이상 인간의 형태로는 빠르게 이 상황을 종결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직후 발뭉의 신체 전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폴리모프가 풀리며 전신이 까맣게 물들었다.
갑옷 같은 비늘이 돋아나고 꼬리가 자라났다.
진정한 용의 형태다.
그러나 신화로 전승되는 거대한 용의 모습은 아니었다.
더욱 작았으며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다. 용을 압축시켜놓은 것만 같은 모양새.
‘본 드래곤이랑은 완전히 다르군.’
······ 확실히 다르다.
성지의 용도, 본 드래곤도 다 거대한 사족보행의 용의 모습을 본체로 갖고 있었다.
이족보행하는 용이라니. 용이라기 보단 용인(龍人)에 가깝다.
“압살해주마.”
쉬잇-!
사라졌다.
발뭉의 신체가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사라져버렸다.
숲에서의 아렐보다도 훨씬 빨랐다. 눈으로 잡을 수 없는 속도.
전신이 무기처럼 단련된 발뭉이 목을 노렸다.
쿠우우우웅!
촤아아악!
하지만 막혔다.
그것도 검에 의해서 막혔다.
‘내 속도를 잡아냈다?’
발뭉의 눈이 커졌다. 변이한 이후 자신의 속도는 그야말로 빛과도 같다. 절대로 막힐 리 없는 공격이 막혔다.
허나 당황하지 않는다.
촤르르르르!
변신한 발뭉은 전신이 무기였다. 모든 부위를 활용하며 수백의 연타를 계속해서 꽂아넣었다. 초근접전으로 간 이상 패배란 있을 수 없었기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뭉은 이상함을 느꼈다.
한 번의 공격만 스치고 지나가도 치명상이건만 모조리 반격당하고 있었다.
‘미리 읽고 움직이고 있다.’
자신의 움직임을, 미래를 읽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움직임이다.
0.1초. 혹은 그 이상.
몇 백의 수를 전부 읽고 그에 대응하고 있었다.
허나 인간에겐 불가능한 연산이다.
용들 역시도 수십 수 앞을 내다보는 초연산은 가능했지만, 지금 눈앞의 인간은 그 열 배 이상의 연산을 해내고 있었다.
그것도 고작 1초도 안 되는 시간 내에 말이다.
쿵! 쿠르르릉!
짜증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의 뒷공간에서 튀어나온 수십 자루의 검들이 오러를 두른 채 끊임없이 발뭉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압살 당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이건 강자와의 싸움이 아니다.
마치 농락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
보인다. 용의 움직임이.
수십, 수백 가지의 경우의 수.
그중 가장 확실한 한 가닥의 움직임을 잡아내며 대응하고 있었다.
뇌의 영역이 열리며 초감각의 기능 또한 상향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발뭉의 움직임을 100% 잡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A.I ‘발뭉’의 연산기능을 해킹했습니다.]
[연산되어진 결과값에 따라 마스터의 신체기능을 보좌합니다.]
놈의 상처로 흘려보낸 제로의 나노머신.
그 나노머신이 발뭉의 연산능력을 해킹하여 엿보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발뭉의 움직임을 예상하여 대응한다.
발뭉의 움직임은 데이터에 의해 ‘확정된’ 공격들이었다.
입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발뭉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읽어낼 수만 있다면 대응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
물론 행동을 읽더라도 대응할 실력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벽을 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터.
‘훤히 보인다.’
머리가 과부하되는 느낌은 있었지만 덕택에 발뭉의 수들이 훤히 보였다.
제로가 보내오는 정보들을 토대로 초감각이 순식간에 구별해낸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공방을 계속하고 있었다.
발뭉은 왜 자신의 공격이 읽히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는 낌새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제로가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연산하면 된다.
아니면 무의식으로 싸워야하는데 A.I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오직 발뭉의 싸움에만 집중했다. 내가 검들에 오러를 입혀놓으면 제로가 원격으로 조종하며 발뭉의 허점을 노렸다.
1:1의 싸움이 아니라 발뭉은 일대 다의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재밌군.’
이런 감각이었나.
강자간의 싸움이라는 게.
여태껏 이토록 격렬하게 움직이며 싸운 적이 없었다.
비록 몇 가지 수를 동시에 쓰고는 있다지만, 죽고 죽이는 싸움에 자신의 모든 걸 활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집중하자 세상에는 나와 발뭉만 남았다.
주변경관 따위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쥐 새끼 같은 놈!”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발뭉이 발악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발뭉도 사라졌다.
나는 오로지 싸움 자체에 빠져들었다.
*
아렐은 할 말을 잃고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끼어들 틈이 없어.’
돕고 싶지만, 도울 틈조차 없다.
도리어 자신이 도우려고 움직이면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게 용······.’
발뭉. 그의 ‘용언’에 아렐은 꿈쩍할 수도 없었다. 이전 본 드래곤을 마주하며 느낀 드래곤 피어와는 차원이 달랐다.
심장마저도 멈춰버렸으니까.
그런데 라인하르트가 움직이자 모든 게 풀렸다.
용언의 힘이 사라지고, 도리어 용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둘의 싸움은 아렐이 보기에도 고차원의 공방이다. 특히 라인하르트는 모든 수를 읽어내며 대응하고 있었다.
‘느림이 빠름을 이긴다.’
이해할 수 없다.
단적인 면만 보면 라인하르트는 발뭉보다 느렸다.
하지만 느림에도 불구하고 더욱 빠른 발뭉을 잡아내고 있었다.
반면 발뭉은 훨씬 빠른데도 느린 것을 이기지 못한다.
상식 바깥의 일이다.
게다가 오러를 검에 주입해 조작하는 능력이라니.
직접 활용하는 모습을 보자 넘을 수 없는 벽이 느껴졌다.
‘느림이 빠름을 이긴다······.’
아렐은 라인하르트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움직임과 대응을 보자 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아렐이 지닌 압도적인 잠재력은 고차원의 싸움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머릿속의 빗장이 풀리는 기분.
갈라틴과 계약하며 강해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렇게 된 이상 다 죽여주마!”
발뭉의 입가에 마나의 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드래곤 브레스.
광역을 삭제시키는 용들의 비기!
궁을 초토화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다.
더이상 시간이 끌리면 불리해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발뭉이 급속도로 뭉쳐낸 마나의 덩어리를 뱉어냈다.
쿠아아아아아아!
*
영원궁이 무너졌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드래곤 브레스는 닿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용의 권능이다.
하지만 발뭉은 사고할 수가 없었다.
‘터졌··· 다고?’
브레스가 터졌다. 그의 전신을 태우고 얼굴이 날아갔다.
자폭이었다.
체내에 침투한 바이러스가 브레스를 발사하기 전에 터트린 것이다.
하지만 궁이 무너질 정도의 폭발이다.
주변의 모든 것이 지워졌어야만 했다.
그러나 브레스가 터진 직후, 발뭉은 보았다.
‘저건······ 북부의 용?’
북부의 용.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한 용이 튀어나와 폭발로부터 주변을 감싸는 걸.
북부의 용이 지녔던 절대적인 갑주.
그에 대해서 익히 들었었던 발뭉은 저것이 ‘용갑주’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럼 저놈이 북부의 용이란 말인가?
북부의 용이 대체 왜 여기에?
‘설마 동족 사냥을 하겠다는 거냐?’
발뭉은 아차 싶었다.
낚였다.
탐지의 에픽을 빌미로, 저 미친 용은 동족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에픽이 아니라 용을 사냥해 힘을 키우려는 게 분명했다.
어쩐지 미묘하게 용의 냄새가 나더라니. 착각이 아니라 진짜 용일 줄이야!
본체로 변하지 않고도 자신을 이렇게 갖고 노는 놈이라면 저놈은 북부의 용이 분명했다.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하고, 가장 ‘신’에 가까웠다 전해지는 이전 세대의 전설 중 하나.
봉인된 채 무시당했지만 그 일만 아니었다면 열두 번째 신이 됐을지도 모르던 자.
‘네놈 뜻대로는 안 될 거다!’
발뭉은 자신의 사념을 증폭시켰다.
비록 패배할지언정 놈의 뜻대로 흘러가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주변 용들에게 ‘이곳에 북부의 용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
북부의 용이 용 사냥을 위해 용들을 불러모으고 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와중에 장문의 말을 신호로 바꿔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
고작해야 몇 글자 정도만 퍼트릴 수 있으리라.
찰나지간에 증폭을 통해 사념을 퍼트렸으나 발뭉의 사고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툭!
실 잃은 인형처럼 몸만 남은 발뭉의 신체가 바닥에 드리누웠다.
*
무너진 궁의 사이로, 아렐과 4황자가 보였다.
용갑주가 발뭉의 브레스를 막아준 것이다.
하지만 4황자까지 살려낼 겨를은 없었다.
용갑주는 나와 아렐을 지켰지만 4황자는 한참이나 떨어져있었던 탓이다.
‘가프.’
놀랍게도, 4황자를 지킨 건 마왕 가프였다.
브레스가 터지기 직전 내게서 떨어진 살뭉치가 4황자를 지키고자 움직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4황비는 북부 마왕의 피를 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4황자 역시 가프의 후손이라는 뜻이었다.
가프가 자신의 후손을 직접 지키고자 행동한 셈이다.
“리온! 어디 있는 거니, 리온!”
저 멀리서 기사들과 함께 허겁지겁 누군가가 달려왔다.
4황비다.
그녀는 무너진 잔해의 틈바구니에 있는 나를 보자마자 쏘아댔다.
“라, 라인하르트 전하? 궁을 무너트린 게 전하입니까? 설마 리온을?”
“아닙니다, 어머니.”
4황자, 리온이 쓰러진 얼음새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리온. 괜찮니?”
“예. 조상님께서 지켜주셔서 괜찮아요.”
“그게 무슨 소리니. 조상님이라니?”
리온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 착각(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