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발뭉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껍질이 잘 벗겨졌군.’
어두운 동굴 속. 탈피가 제대로 된 것을 보며 발뭉은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이로써 여덟 번째.
발뭉은 탈피한 껍질을 스스로 먹어치웠다.
탈피 후 남은 껍질은 에너지 보충에 필수적인 요소다.
위업을 달성할 때마다 용은 긴 잠을 자야 했고 다시 깨어나면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있었다.
자신의 껍질을 모조리 먹어치운 발뭉이 입맛을 다셨다.
‘쉽지 않은 상대였지.’
여덟 번째 위업으로 선정된 상대를 떠올리며 미소짓는다.
거대한 고래의 몸을 차지한 고대의 에픽. 50m가 넘는 동체로 바다의 왕으로 군림하던 포세이돈이었다.
해일을 일으키고 태풍을 부르며 고주파를 이용한 공격은 신경계에 이상마저 가져왔다.
놈을 죽이려고 칠일밤낮을 싸웠다.
그 과정에서 섬이 몇 개나 가라앉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다시 싸우고싶구나.’
재차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강자와의 싸움은 발뭉이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다.
모든 용이 그렇겠지만 발뭉은 그러한 경향이 덕욱 심했다.
몸이 근질거렸지만 인내가 답이다.
위업을 달성할 때마다 난이도가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아홉 번째, 열 번째······ 아직 감이 안 잡히는군. 여덟 번째 위업이 바다의 왕이었으니, 아홉 번째 위업은 하늘의 왕인가?’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발뭉이 바깥 바위에 앉아 턱을 쓸었다.
바위 아래는 깊은 계곡이다. 폭포가 치는 이곳은 발뭉이 탈피할 때마다 찾아오는 고향 같은 장소였다.
‘그나마 비교할 수 있는 용은 북부의 그놈뿐인데.’
북부에 봉인당한 용.
인간에게 패배하여 꼴사납게 봉인 되어있는 그놈.
열 개의 위업을 달성했다고 하였으나 그것도 천 년 전의 이야기다.
이전 기수.
13번 째 신을 정하는 현재의 기수가 아니라, 12번 째 신을 정하는 기수에서 이미 패배하여 고여버린 썩은물이었다.
구시대의 유물.
그런 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북부의 용은 꽤 유명했다.
인간에게 봉인당한 용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으니.
인간의 이름이 가프였던가?
물론, 12번 째 ‘신의 게임’ 당시 인류가 지금보다 강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인간이었다.
‘그런 놈에게 물어보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전 게임에서 꼴사납게 패배한 북부의 용 따위에게 묻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용은 서로에게 적대적이다.
오직 한 명만 신이 되는 게임.
만나면 서로 물어뜯게 되어있다.
그나마 얼굴이 다르면 죽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같은 얼굴의 용을 만나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난다.
무엇보다 이전 기수보다 이번 기수의 용들이 더 강하다는 평이 많았다.
발뭉은 신세대를 대표하는 용 중 한 명이었고, 그중에서도 위업 달성의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말피엘보다 내가 더 빠르다.’
신세대를 대표하는 용들.
발뭉은 그중 한 명인 말피엘을 자신의 라이벌로 보았다.
그리고 말피엘조차도 아직 8번째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우우우우.
그때, 머릿속을 울리는 신호가 감지됐다.
‘이 신호는?’
익숙하다.
고래대왕을 죽여서일까. 특정 주파수에 더욱 민감해졌다. 그리고 이 신호는 과거에도 몇 번이나 겪어봤던 것이었다.
‘깨어나자마자 운이 좋군. 10년 전 그 탐지의 에픽이 지도를 켰다.’
에픽들은 모두 특정 주파수를 갖고 있다.
그리고 ‘탐지’와 관련 된 에픽은 그 주파수 대역이 무척이나 크다.
민감한 용들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다른 에픽들을 찾아야하니 당연한 현상이다.
10년 전 놓쳐버린 탐지의 에픽.
흡수하면 다음 위업을 달성하기가 쉬워질 터였다.
‘위치는 제국 수도 쪽인가? 흠.’
하지만 위치가 곤란했다.
제국 수도의 그 많은 인간들 중에서 탐지의 에픽만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근처에서 다시 지도를 켜면 모를까, 찾겠다고 제국의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용은 쓸데없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모두 12번째 위업을 위해서다.
몰살이라 불리는 12번째 위업은, 전대륙의 무력 수위가 특정 수준으로 올라서거나 세상을 위협할 무언가가 출현해야만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정도의 위협들은 대부분 인간에게서 초래되었다.
오히려 인간의 성장을 부추겨도 모자랄 판국에, 지워버리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무엇보다 그런 짓을 했다간 자신이 노출된다.
경쟁자들에게 공격의 구실만 쥐어주는 셈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용들도 쓸데없는 짓을 하는 용을 공적으로 선포해 제거하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위업에 방해된다면 집중포화를 당할 터.
‘정확한 위치만 알아내면 된다. 다른 녀석들보다 내가 더 민감하니.’
발뭉은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발신된 신호를 따라, 제국으로 향하며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생각이었다.
*
성좌.
대영웅들의 혼이 담긴 별.
그리고 그 별의 힘을 이어받은 인간.
그들은 ‘위업달성자’와 비교되고는 했으나 분명히 존재했던 이들이다.
물론 위업달성자는 용들을 뜻하는 말이었고, 성좌도 다른 종족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힘일 수도 있었다.
방식 역시도 달랐다.
위업달성자는 위업을 달성해 힘을 키운다.
반면 성좌는 별에게서 힘을 받는다.
그런데 그 별이 인공위성이라니.
[현재 가동 가능한 인공위성 중 유일하게 연결된 개체입니다.]
[통칭 ‘무궁화 18’호가 재가동합니다.]
[‘무궁화 18호’가 성공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합니다.]
관리자권한이 3등급으로 오르자 제로는 연결된 인공위성을 통제했다.
무궁화 18호라 불리는 인공위성은 재가동되자마자 시야를 반전시켰다.
‘데이몬을 해킹했을 때와 비슷하군.’
데이몬의 시야를 해킹했던 그때의 느낌이다.
원할 때마다 시야를 공유해 상대를 훔쳐보는 게 말이다.
‘그런데······.’
공유된 무궁화 18호의 시야는 처참했다.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 더러운 쓰레기장이 발할라라고?’
발할라는 대영웅들의 혼이 숨쉬는 곳이다.
하늘 위의 세상을 뜻하며 모두가 선망하는 곳이었다.
그럴진대 발할라는 온통 쓰레기로 가득했다.
철제의 쓰레기들이 띠를 형성해 검은 공간을 떠다니고 있었다.
영웅의 혼은커녕 쥐새끼도 피해갈 법한 난장판이다.
허나 놀라기는 일렀다.
거대하고 둥근 별.
푸름이 가득한 세계!
[마스터께서 거주하고 있는 ‘지구’입니다.]
그 모습에 나는 압도되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떨림이다.
지구에서 인간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어떤 건축물도 없었다. 지구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탓이다.
‘저 어두운 곳은? 설마 마계인가?’
내가 보는 지구는 맑고 푸르다.
하지만 지구의 반대쪽은 어둡고 칙칙했다.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 저 세계를 사람들은 ‘마계’라고 불렀다.
온갖 기괴한 괴물과 마족들이 살아가는 절망의 땅.
단순히 태양빛을 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아직 ‘정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장소인 것 같습니다.]
방사성물질의 정화가 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파간들을 떠올려보니 이해가 되었다.
오랜시간 방사성물질에 노출된 생명체들이 제스스로 진화한 장소가 바로 마계였다.
그러나 박문식 박사는 세상이 모두 정화되었다고 말했다.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말하는 거였을까?
정화되지 않은 저 불모지를 제외한, 정확히 절반의 세상.
‘에덴이나 세계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신들이 살아가는 에덴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적어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알파와 베타가 만들었다는 세계수도 마찬가지였다.
지구가 아니라 이 발할라 어딘가에 있는 것일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할라라 생각했던 저 검은 영역들은 무한대로 펼쳐져있었다.
저 영역에선 지구조차도 티끌일 뿐이었다.
‘우주.’
우주였다.
나라는 개체는 이곳에서 개미보다도 더욱 작았다.
순간 뇌가 간질이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에게는 감춰져있던 비밀.
현인류의 봉인과도 같은, 우주에 대한 호기심!
[뇌의 동시활성 영역이 크게 확대됩니다.]
[31%]
[32%]
······.
[40%.]
‘아아.’
무한의 세계에 삼켜질 것만 같았다.
허나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저 우주로 뻗은 무한대의 세계는 내 가능성과도 같았기에.
나는 눈에 우주를 담았다.
무한을 담았다.
‘나는 점이다.’
아직은 그랬다.
‘점을 이으면 선이 된다.’
하지만 점을 잇고, 선을 이으면.
공간이 된다.
그리고 공간을 이으면, 무한(無限)이 된다.
무한은 점으로 이루어졌으니 나 또한 무한의 존재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얽메던 빗장이 스르르 풀렸다.
이 거대함에 절망하고 안주했다면 불가했을 것이나, 호기심이 생겼다.
탐구심을 느꼈다.
동시에 욕심이 피어났다.
이 작은 세상에 나를 가둬두지 않겠다는, 욕망이.
[50%]
깨달음이다.
우주. 이 무한대의 세계에서 나는 벽을 허물었다.
*
별에게서 힘을 받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이제야 알겠다.
우주를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차이는 극명했다.
뇌의 기능을 억제하던 그 빗장이 우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풀릴 수 있는 탓이다.
어느 정도를 받아들이냐에 따른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위의 세상은 대영웅들이 살아가는 고즈넉한 장소 따위가 아니다.
인공위성과 쓰레기로 점칠된 거대한 쓰레기장이었다.
“힘이 느껴진다는 게 이런건가보군.”
뇌의 활성영역이 늘어나며 내가 포용할 수 있는 나노머신의 양이 급증했다.
나는 칼리번을 쥐고, 크로프트를 재현할 때 느꼈던 ‘감각’을 활성화시켰다.
우우웅.
그 순간, 내 전신으로 푸른색의 오러가 피어올랐다.
전과 같은 1초가 아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나는 오러를 유지시키고 있었다.
‘소드마스터.’
그 격에 올랐다.
허나,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와는 분명히 달랐다.
나는 아공간을 열었다.
검은 아공간에서 정령무기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정령무기들의 주변으로도 청색의 오러가 띄기 시작했다.
오러는 신체를 극한으로 단련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마법과는 달리 점성이 있어, 신체를 벗어날 수 없다. 신체에 구속된 채 발현되는 게 오러인 탓이다.
아예 연결성이 없는 외부의 물체에 오러를 입힐 수는 없었다.
최소한 손이라도 대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곳에 오러를 입힐 수 있었다.
오러를 입힌 검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나무를 베어보고, 벽을 뚫어보기도 하고, 강철을 잘라내었다.
허나 신체와 떨어졌다 하여 오러의 위력이 줄어들진 않는 듯했다. 절삭력과 파괴력 모두 그대로였다.
이건 크로프트도 못 하는 기술이다. 소드마스터를 뛰어넘은 그조차도 오러를 원하는 물체에 마음대로 입힐 수는 없었다.
사이오닉 에너지로 물체를 옮기는 건 가능하지만 파괴력 자체는 늘지 않는다. 허나 오러를 입힌 채 사이오닉 에너지를 활용하면 엄청난 화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겨울의 활을 이용한 초장거리 사격.
그리고 근거리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생긴 셈이다.
“주인······ 님?”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소란······ 헉!”
갑작스러운 소란에 방으로 들어온 아렐과 제르민의 눈동자가 급속도로 확장됐다.
< 무한의 깨달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