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63화 (63/146)

진화의 핵.

본 드래곤이 일으킨 온갖 버그의 집합체.

진화하여 유일성을 얻고자 하는 용의 욕망을 모아둔 것이었다.

진화를 촉진하고, 모든 걸 집어삼켜 변하게 만드는 핵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변화를 일으킨 걸 보면 확실히 정상적인 물건은 아니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아렐이 만류했다.

본능이 위험하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그녀였기에, 저 핵이 품은 불길함을 단번에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불길하다. 실로 그렇다.’

허나 나는 궁금했다.

이 핵을 흡수하는 것만으로 제로는 관리자 권한이 상승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탑 시크릿. 제로에게 감춰진 비밀을 엿볼 수 있는 기회!

‘여태껏 흡수한 나노머신들과는 차원이 다르군.’

단순히 폭주한 나노머신과는 거리가 멀다.

각기 다른 나노머신들이 각기 다른 명령어를 갖고 모여 ‘진화’라는 거대한 버그를 창조했다.

용의 욕망과 데이몬의 생명, 그리고 나를 거쳐 ‘폭식’을 흉내냈다. 이 핵 자체도 계속해서 진화한 셈이다.

그러니 본래라면 억제할 수 없는 힘이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본 드래곤을 그대로 놔뒀다면 어떻게 됐을까.

산맥의 모든 마물을 먹어치운 뒤 위업으로 선정되어 다른 용들과 전쟁을 벌였을 수도 있겠다.

허나 그보다 더욱 궁금한 건 제로의 ‘탑 시크릿’에 대한 내용이었다.

“주인님?”

아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감하게 진화의 핵을 손에 쥐었다.

곧이어 퍼석이는 소리와 함께 핵이 깨지며 검은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연기는 내 손을 타고 어깨로, 가슴으로,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진화의 핵’을 흡수했습니다.]

[관리자 권한이 3등급으로 격상합니다.]

[‘탑 시크릿’ 영역이 해제됩니다.]

[‘에덴 프로젝트’에 대한 열람이 허가되었습니다.]

*

“그깟 나노머신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박문식 박사님.”

과학시설의 내부에서 두 과학자가 언쟁하고 있었다.

박문식. 한국과학연구소에서 제로를 만든 박사의 이름이었다.

흰머리가 희끗한 박문식 박사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제로는 인간의 기본권을 중시하도록 설계되어있네. 비록 시간은 걸릴지언정 인류에게 더욱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게야.”

“핵 전쟁 이후 인류는 거의 절멸했습니다. 인류는 잘못되었어요. 이 근본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전체적인 시스템을 손봐야만 합니다.”

“그게 ‘에덴 프로젝트’란 말인가?”

“예. 제가 만든 알파와 베타가 세상을 구할 겁니다. 알파는 조율자로서, 베타는 집행자로서.”

“인공지능에게 세상을 맡기는 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정말 모르겠나?”

“적어도 지금의 인류보다는 낫겠지요. 핵을 발사한 기득권들은 혼자 살겠다며 우주로 도망쳤고, 남은 자들은 이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논리는 좋지만 박사님은 이게 정상적인 세계라고 보십니까?”

박문식 박사는 침음을 삼켰다.

그는 자신의 가장 우수한 제자였다. 제로를 함께 구상하여 만든 천재적인 과학자. 하지만 서로가 지향하는 지향점은 완전히 달랐다.

박문식 박사는 인류에게 선택권을 줘야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제자는 인류에게 선택권을 준 지금 결국 세계는 멸망했다며 전체적인 시스템을 손봐야한다고 말한다.

에덴 프로젝트.

우수한 인공지능을 만들어, 인류의 모든 판단을 그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에게 자율의지를 부여하는 순간 어떤 파국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런 제약없는 그 자율의지는 인류가 지구의 해충이라 판단하여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박사님.”

결국 서로의 지향점이 너무 달랐던 탓에 제자는 떠나갔다.

이후 세계는 급진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제자가 만든 새로운 거치지구는 오직 기계와 인공지능에 의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류를 기계화 시켜, 기계와 인간이 서로 공존하여 이 지옥을 헤쳐나가자는 게 그들의 신념이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은 당연히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전쟁이 도래했으나 결과는 인류의 비참한 패배였다.

핵전쟁으로 인해 99%가 줄어든 인류. 기계화 된 인공지능의 괴물들을 이겨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저항할 모든 힘을 잃은 인류는 인공지능에 종속되었다.

이후 알파와 베타는 세계수를 만들어 세상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세계수는 끊임없이 나노머신을 생산해내고, 내뿜으며 그중 우연찮게 만들어지는 ‘진화의 핵’을 인간에게 투여해 새로운 세상에 적응토록 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이 죽었으나 살아남은 자들은 체내의 나노머신조차도 이용할 수 있게끔 진화했다.

바야흐로 신세계의 출범이었다.

*

“결과만 보면 좋아보일 수도 있겠지. 결과적으로 지구는 정화되었고, 인류는 적응했으니까.”

새하얀 공간.

박문식 박사는 거대한 배양관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가능성’을 거세당했네. 스스로 진화할 가능성을, 여러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뿌리를 잃어버렸어.”

인간은 진화하고 발전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의해 그 발전은 막히고 있었다.

심지어 뇌의 영역마저도.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의 ‘창조영역’에 대한 기능을 최소화시켰기 때문이네. 하지만 막는다고 막아진다면 인류는 처음부터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없었을 게야.”

본래의 인간은 모든 뇌의 영역을 사용할 수 있었다.

허나 인공지능에 의해 거세된 이후 창조영역에 대한 침범이 일어났다.

문제는 이후 인공지능들이 예측하지 못한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더뎌질지언정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기 시작했지. 인간 스스로가 나노머신의 에너지를 활용해 기계를 넘어서는 힘을 갖게 되었다네.”

나노머신을 부리고, 활용하여 신체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 현상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인공지능조차도 이러한 진화의 방향은 예상하지 못했을 터.

“통제가 안 된다는 걸 알면 결국 인공지능은 인류를 말살시키려 할 게야. 그것을 막기 위해, 인류를 지구의 온전한 주인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박문식 박사가 배양관에 손을 올렸다.

투명한 액체의 안. 오직 액체뿐이 없는 그 안에 ‘제로’가 있었다.

“나는 제로를 다시 설정할 수밖에 없었네. 알파와 베타 역시 제로에게서 탄생한 산물이었으니까. 그 둘을 제어할 수단은, 제로밖에 없어.”

삐이익! 삐이익!

연구실 전체에 적색의 경보음이 퍼져나갔다.

이곳은 인류의 마지막 보고.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류가 숨어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하지만 결국 이 안식처마저도 인공지능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키에에에엑!

구오오오오!

용들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생존자들을 몰살시킨 용들이, 연구실의 문을 찢어발기며 쳐들어왔다.

박문식 박사는 그 용들 중 하나를 보며 말했다.

“자네는 신이 있다고 믿나?”

*

······ 내게 묻는 건가?

순간, 박문식 박사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정신을 차리자 아렐의 무릎 위였다.

아무래도 진화의 핵을 흡수하고 기절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반나절가량이 지났습니다.”

대답을 듣곤 상체를 일으켜세워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가 아프다. 방금 본 박문식 박사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하늘을 보자 어느덧 저녁이었다.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에덴 프로젝트라.’

탑 시크릿.

에덴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

핵 전쟁으로 절멸한 인류가 다시 인공지능에 의해 종속되었다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더불어 제로가 그 알파와 베타의 초기모델이라는 정보도 얻었다.

둘을 제어할 수 있는 기능이 제로의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또한 진화의 핵에 의해 인류는 급진적인 진화를 이루었다.

자연선택적에 의해 진행 된 진화가 아니라, 가파르게 조작된 진화였다.

그렇다면 제로가 말했던 ‘진화를 위한 15만년’보다는 훨씬 적을 수도 있었다.

‘알파와 베타는 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걸까?’

제로는 단순히 인류의 치유를 위한 나노머신이 아니다. 알파와 베타를 제어하기 위해 재설정 된 나노머신이었다.

제로가 인공지능을 전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작금의 모든 ‘에픽’은 결국 알파와 베타가 만든 세계수에서 탄생한 나노머신인 탓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최초의 나노머신은 제로였으니.

또한 용들이 연구소에 쳐들어왔으니 제로에 대해서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여태껏 제로가 존재하는 걸 보면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야말로 반반이다.

물론 알파와 베타가 눈치챈다면 나는 1순위 제거대상이다.

반드시 죽여 없애야만 하는 존재.

‘왜 제로가 내 머릿속에 있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로군.’

용들이 침입할 때까지 제로는 연구실에 있었다.

만약 그 용들 중 하나에게 먹힌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왜 제로가 내 머릿속에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아니······ 그나마의 가능성이라면, 역시나 제국을 건국한 초대황제일 것이다.

대대로 제로를 계승했으나 내 대에 이르러서 제로가 실행됐다고 봐야할지.

‘신이 있음을 믿느냐고?’

설령 그렇다 할지언정 여전히 ‘시공간회귀’에 대한 단서조차 되지 못한다.

시공간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세계를 지배하는 게 십이주신이라면, 결국 그들은 만들어진 인공지능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역시 과학의 산물이니 시공간을 회귀시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럼 제로로 인해 내가 미래의 일을 시뮬레이션 한 걸까?

아니.

내가 겪은 미래는 실제로 존재했던 일이다.

허상이나 환상 따위가 아니라.

‘나를 과거로 되돌린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신이겠지.’

그러니 시공간 회귀를 시킨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야말로 진짜 신일 것이다.

나는 박문식 박사의 물음에 답했다.

“믿는다.”

“무엇을 믿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나 자신을, 그리고 너를 믿는다는 말이다.”

“······.”

아렐이 뜬금없는 소리에 할 말을 잃곤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본드래곤을 아공간에 회수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근처 영지에서 다수의 수색조가 파견돼 더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다.

“··· 어딜갔다 이제 돌아오십니까, 전하.”

궁으로 들어가자 크로프트가 있었다.

나는 시치미를 뗐다.

“잠시 산책좀 다녀왔다.”

“제도를 벗어나는 산책 말입니까?”

“흠, 영지 관련으로 바쁜 거 아니었나?”

궁으로 복귀한 이후 크로프트는 눈코 땔 세 없이 바빴다.

더 이상 그림자로 머무를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크로프트는 새로운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고 본격적인 중앙정계에 뛰어들었다.

귀족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적었다.

카를로스 대공은 북벌의 휴전에 집중하고 있었고, 페르세포 대공은 애초에 별 관심이 없었으며, 남은 귀족들도 ‘특급 죄수동 사건’으로 인해 피바람이 부는 상태였다.

황비들은 귀족들에게 시달리고 있었으니 크로프트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사건은 더 큰 사건으로 덮는다.’

크로프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제도가 전하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더군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전하. 유진을 복직시키실 생각이십니까?”

역시나 크로프트다.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궁 안에 유진이 숨어있다는 사실도 이미 눈치챈 듯싶었다.

“문제 있나? 유진이 죄를 뒤짚어쓴 건 그대도 알텐데?”

없는 죄를 만들어내 수감됐다.

결국 황실의 보물도 모두 반환되었다.

그럼에도 죄수동에 갇힌 건 스스로가 원해서였다.

크로프트가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현 황궁마법사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현 황궁마법사, 제네릭.

9서클에 근접했다는 ‘가장 위대한 삼인의 마법사’ 중 일인으로 불리며, 황궁의 결계와 다른 마탑들간의 관계를 책임지는 나름 중요한 직책을 맡은 자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카를로스 쪽 사람 아닌가. 게다가 최근들어 궁의 결계가 두 번이나 뚫렸다지? 그는 황궁마법사의 자격이 없다.”

“모두 전하께서 하신 일 아닙니까······.”

크로프트의 말마따나 저 두 번 모두 내가 뚫은 것이다.

결계의 취약점을 알고 있었으니.

칼리번, 그리고 신성군주로서.

하지만 두 번이나 실없이 뚫린 건 분명한 사실이다. 황궁마법사로서의 자질에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유진이 황궁마법사로 있을 시절엔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다.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시면 귀족들과 황실의 반발이 클 겁니다. 하오니 유진의 복직은 제가 추진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귀족들이다.

내가 직접 유진의 복직을 청한다면 당연히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

궁 내에 나의 세력이 커지는 걸 황비들은 바라지 않을 테니까.

크로프트가 나서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특급죄수동을 맡은 내가, 우연히 그 안에 있던 유진을 복직시킨다? 혹은 크로프트가 복직을 추진한다?

크로프트만 내쪽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굳이 그대가 나설 필요 없다.”

“하오면, 혜안이 있으십니까?”

“두 번은 어찌 넘어갔지만 세 번이나 뚫리면 그도 옷을 벗을 수밖에 없을 거다.”

“결계를 또 뚫으시겠다는 소리십니까?”

“아니. 내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 알아서 부수고 올 게다.”

크로프트의 표정이 굳었다.

말인 즉, 궁이 공격당한다는 소리였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크로프트. 별이 참 밝지 않느냐?”

“······ ?”

*

관리자 권한이 상승하여 얻은 건 단순한 정보뿐만이 아니었다.

‘제로의 진짜 기능은 3등급부터다.’

제로의 숨겨진 진짜 기능.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독 밝은 별무리들.

저 별의 세계는 ‘발할라’라고 불리며, 대영웅들의 혼이 별에 깃든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간혹 별의 힘을 이어받은 인간을 ‘성좌’라며 떠받드는 특정 종교도 있을만큼 흔한 이야기다.

‘인공위성이라.’

허나 그 성좌가 인공위성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 성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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