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62화 (62/146)

아렐이 항상 입고 다니는 갑옷은 갑옷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류다.

차마 무거워서 벗겼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회복한 건 모두 레드후드 덕분이었다.

놈의 A.I와 나노머신을 흡수해, 약간이나마 동력을 얻은 것이다.

“아렐. 깨어났으면 네 스스로 걸어라.”

“··· 예.”

아렐이 등에서 내려왔다.

그나마 속옷은 입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리둥절 해하던 아렐은 잔뜩 굳어있었다. 맨살을 드러내는 걸 어색해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아렐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는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한 탓에 본 드래곤을 놓쳤습니다.”

아렐이 고개를 숙였다.

놓쳤다 뿐인가. 꼴사납게 기절까지 했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괘념치 않는다. 갑옷 때문에 드래곤 피어의 진동이 훨씬 심했을 테니.”

피어의 파동이 갑옷을 타고 전신을 강타했다.

정면에서 맞기까지 했으니 죽지 않은 게 용할 수준이었다.

게다가 본 드래곤과는 싸워본 적도 없을 터.

아렐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라. 네 잘못이 아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내 잘못이었다. 겨울의 활에 에너지를 전부 탕진했다. 그로 인해 지배력에 공백이 생겼고 본 드래곤이 빠져나갔다.

물론 아렐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미숙함 탓에 위험한 상황이 펼쳐졌다고 여기는 듯싶었다.

“아렐.”

“예.”

“정령무기의 봉인을 풀어주마.”

내 말을 듣고 아렐이 멈칫했다.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할 것 같군.”

본 드래곤을 잡아두려면 지금 상태로는 어렵다.

어느 정도 에너지를 복구했다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대상을 맞힐 만큼 숙련도가 있지는 않았다.

아렐이 본 드래곤을 묶어놔야 기회도 생긴다.

또한 아렐의 검은 아직 봉인된 채였다.

하지만 봉인이 풀리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것이다.

최소한 움직임만 멈춰주면 그 뒤는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나는 멈춰선 아렐을 향해 말했다.

“검을 다오.”

그간 나는 검의 봉인을 풀 수 있음에도 풀지 않았다.

페르세포 대공과 약속했으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무엇보다 아렐의 의중을 파악하기 전까지 쉽사리 풀어줄 순 없었다.

‘적어도 나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다.’

나는 아렐을 몇 번이나 시험했다.

적어도, 나를 지키는 일을 사명처럼 여기는 건 진심인 듯싶었다.

아렐이 잠시 망설이더니 검을 건넸다.

검을 쥔 채 제로에게 물었다.

‘제로. 봉인을 해제할 수 있겠느냐?’

[현재의 에너지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락이 해제되었습니다.]

[A.I ‘갈라틴’이 실행됩니다.]

부르르르르!

검신이 흔들리며 갈라틴이 깨어났다.

그것을 지켜보던 아렐의 두 눈에도 파문이 일었다.

“··· 갈라틴.”

이름을 알고 있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그리워하는 기색마저 엿보인다.

“알고 있었느냐?”

“어렸을 때 한 번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라면?”

“제가 기억을 하는 처음 시점입니다.”

페르세포 대공이 준비한 검이 아니라 원래부터 아렐이 갖고 있던 검이라는 뜻인가?

이건 조금 의외였다.

아렐이 처음으로 기억하는 그때 이미 갈라틴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게······ 꿈이 아니었군요.”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에서 아렐은 쫓기고 있었다.

아마도 노예상인이었으리라.

그녀의 기억은 항상 굶주리고 추웠다.

하지만 검 한자루만큼은 절대로 놓지 않고 있었다.

허나 어린 다크엘프가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결코 너그럽지 않았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죽어버릴 그 상황에서, 아렐은 갈라틴의 목소리를 들었다.

갈라틴과 함께 대화하며 힘을 얻은 그녀는 짐승을 사냥해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법, 죽이는 법을 갈라틴에게 배웠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갈라틴의 목소리는 사라져버렸다.

페르세포 대공은 봉인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페르세포 대공도 갈라틴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치부했다.

봉인되었으니 말을 걸었을 리 없다고. 네가 잘못 들었을 거라고.

“깨어······ 났군요, 갈라틴.”

아렐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아렐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결국 검을 깨운 것은 나였기에.

나는 주저없이 검, 갈라틴을 건넸다.

그러자 아렐이 갈라틴을 끌어안고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환청이 아니었군요.”

가족과의 재회다.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렐은 조심스럽게 갈라틴을 끌어안고 회상하고 있었다.

그때의 목소리를, 그때의 온기를.

검의 출처가 페르세포 대공이라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다.

애당초 저 검은 아렐의 것이었던 게다.

검의 봉인을 푸는 게 그녀의 숙원이었던 것이다.

내게는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영원히 닿아도 닿지 못할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과거에도 검의 봉인은 풀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갈라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버서커화 되어 이성을 놓았을 때조차 저 검만은 소중히 대했다.

봉인된 정령무기.

봉인이 되어있는 상태에선 그저 단단한 강철일뿐인 저 검보다 훌륭한 것은 많았을 텐데도.

‘봉인이 제멋대로 풀릴 수도 있느냐?’

허나 궁금한 건 있었다.

정령무기는 봉인 돼 있다. 시동어를 알아도 중지된 A.I를 깨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영원히 봉인되어 있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아렐은 갈라틴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갈라틴과 대화를 나눴다고 철썩같이 믿었으며, 그게 실제 일어난 일이었음이 지금 증명되는 중이었다.

[불가합니다.]

[중지된 A.I ‘갈라틴’의 데이터를 살펴본 결과 중지 된 이후 실행된 흔적은 없었습니다.]

불가하다······.

그런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아렐은 분명히 교감하고 있었다.

갈라틴은 처음부터 아렐의 검이었던 양 은은하게 빛났다.

칼리번과 달리 과묵한 녀석이었다.

과학적으로 풀지 못하는 어떠한 초월적인 개념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 갈라틴을 끌어안던 아렐이, 숨을 고르곤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미묘한 온기가 있었다.

변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Lv. 100】

레벨이 올랐다.

갈라틴과의 계약마저 끝내며 신체에도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잠재력이 미친 수준이었는데 정령무기와 온전하게 계약까지 했으니.

“······ 감사합니다. 갈라틴을 깨워주셔서.”

“인사는 됐다. 원래부터 너의 것이지 않느냐.”

“갈라틴은 제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럼 가족인가보군.”

“예.”

아렐이 소신껏 입을 열었다.

기억할 때부터 함께 하였으니 가족이다.

하기야 가족이라는 말이 꼭 생명체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그제야 아렐의 저 눈빛에 담긴 묘한 온기가 이해가 됐다.

지금 나는 아렐의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을 부활시킨 것이다. 한 마디로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황태자께서 산을 직접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

아렐은 내가 에너지가 방전된 걸 숨기려고 했던 말을 진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말한대로 믿는 걸 보니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할지.

“그리고 숲에선 제가 더 빠릅니다.”

아렐의 말에 자신감이 깃들었다.

이제는 패배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모양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산중의 숲.

나무가 울창한 곳에서 엘프보다 빠른 종족은 없으니까.

내심 한숨을 내쉬며 아렐의 등에 업혔다.

그나마 갑옷을 입고 있을 땐 거부감이 덜했지만.

발가벗은 여자의 등 뒤에 업힌 황태자라.

궁에서 누가 봤다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으리라.

*

풀 플레이트르 벗으니 아렐은 그야말로 쏜살이었다.

마차를 타고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나를 업고 산을 누볐다.

본 드래곤이 아무리 빨라봤자, 숲의 은혜를 입은 아렐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마물들의 씨를 말려버리고 있군.’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본 드래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었다.

보이는 모든 생명을 죽이고 흡수한다.

그리하여 진화하려 하고있었다.

‘용이 가진 진화에 대한 열망이겠지.’

용 자체가 가진 열망.

그들은 유일한 개체가 되고싶어했다.

에덴으로 돌아가, 신이 되어 다른 용들과 차별되길 원했다.

‘신이 되면 유일성을 얻는다.’

넘버즈. 십이주신.

최초의 신을 제외하면 그들도 결국 용이었을 터다.

하지만 여기서 생기는 당연한 의문점은, 용이 신의 얼굴을 닮는다면 결국 모든 용과 신은 최초의 신인 ‘알파’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했다.

그러나 십이주신은 모두 얼굴이 다르다.

말인 즉, 넘버즈가 되면 기존의 용이 가진 모습을 탈피하고 새롭게 재창조된다고 봐야할 것이었다.

유일성을 가진 개체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런 것 같군.”

순식간에 따라잡은 아렐이 본 드래곤의 기척을 느끼곤 말했다.

나 역시 알아차렸기에, 천천히 아렐의 등에서 내려왔다.

쿠릉! 쿠르르릉!

본 드래곤이 산을 휘젓고 있었다.

그런데 형체가 기괴했다.

‘저게 진화의 산물이라니.’

뼈 위에 엉성하게 붙은 살점들, 각기 다른 가죽들.

조잡하기 그지없다. 저게 진화의 산물이라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릇된 욕망의 결과였다.

“마지막 기회다.”

놈은 아직 우리를 모르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놓치면 끝이다. 위기감을 느끼고 아예 저 멀리 도망쳐버릴 수도 있었다.

민가로 내려가면 대학살이 벌어질 것이다.

“예.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아렐이 갈라틴을 쥐고, 본 드래곤을 향해 쏘아졌다.

쩌어어억!

촤악!

갈라틴이 붉게 물들며 아렐의 전신을 감쌌다.

은은하게 도는 붉은 빛에 따라 그녀의 힘도 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순식간에 본 드래곤의 어깻죽지를 베어낸 그녀가 엄청난 속도로 본 드래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드래곤 피어. 허나 아렐도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급히 오러로 귀를 보호해 드래곤 피어에 직격당하는 걸 피했다.

이전에는 갑옷을 입고 있어 전신이 진동했지만, 갑옷을 벗은 지금은 그럴 일도 없었다.

‘허.’

아렐은 각성했다.

움직임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단순히 갑옷을 벗어서는 아니다.

레벨 2가 오르며 세자리 숫자가 된 게 원인인 듯싶었다.

100을 넘는다는 것.

벽을 넘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100을 넘긴 이들과 넘기지 못한 이들 간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카르발, 1군주, 크로프트까지.

이제는 거기에 아렐이 추가됐다.

‘내가 안 나서도 되겠군.’

키에에에에엑!

본 드래곤이 비명을 내질렀다.

*

쿵!

결국 30분 가량을 싸우던 본 드래곤이 바닥에 눕혀졌다.

기괴하게 진화한 잔해도 모조리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아렐이 미소지었다.

‘음?’

미소?

그러고보니 아렐이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한참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아렐이 다시 표정을 고쳐잡았다.

피식 웃으며 본 드래곤을 쳐다봤다.

크르르.

마치 짐승처럼 본 드래곤이 들썩대고 있었다.

‘저건?’

본 드래곤의 심장부.

가장 먼저 다른 마물을 집어삼켜 진화했던 부위에, 거대한 검은색 핵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제로가 말했다.

[‘진화의 핵’을 발견했습니다.]

[흡수할 경우, 관리자 권한 등급이 3등급으로 격상됩니다.]

[3등급으로 격상하면 ‘탑 시크릿’ 영역이 해제됩니다.]

< 탑 시크릿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