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61화 (61/146)

나도, 아렐도 할 말을 잃었다.

산등성이가 사라졌다.

압축된 나노머신들이 빨려가듯 쏘아지더니 거대한 분화구를 만들어놓았다.

내가 가진 나노머신의 양으로는 절대로 실현 불가능한 기적이다. 삼신기의 위명은 높이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나노머신튜브.’

겨울의 활에 장착된 오버테크놀로지.

나노머신튜브가 사용자의 나노머신 활용을 극대화해준다.

이만한 파괴력을 보이려면 최소 7서클의 마법사가 칠중첩의 영창을 해야 가능하다. 그것도 자신의 영역 안 수백m 내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활을 쏜 곳은 산으로부터 못해도 1km는 떨어진 곳이었다.

이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마법은 보이지만 겨울의 활이 만들어낸 화살은 보이지도 않는다.

‘30km 밖에서 맞혔다는 전승이 과장이나 거짓은 아니었나보군.’

마나만, 나노머신만 충분하다면 화살은 그 이상의 거리도 쏘아질 터.

멀어질수록 파괴력은 줄지언정 사람을 죽일 수준의 살상력은 유효할 것이다.

크로프트 같은 자가 겨울의 활을 들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라면 산등성이가 아니라 산 전체를 없애버렸겠지만.

[98.1%의 반동억제에 성공했습니다.]

[나노머신의 재충전까지 48시간이 필요합니다.]

[특급 프로세스 ‘용갑주’가 해제됩니다.]

[특급 프로세스 ‘폭식’이 비활성화됩니다.]

문제가 있었다.

마나만, 나노머신만 충분하다면 화살은 그 이상의 거리도 쏘아질 터.

크로프트 같은 자가 겨울의 활을 들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어깨가 터질 것 같다.’

우선 반동이다.

제로가 활과 신체를 동시에 조율하여 억제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팔이 터졌을 것 같다.

제로가 반동억제를 했는데도 팔이 빠질 것만 같았다. 평범한 이들이 이 겨울의 활을 다루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노머신을 마나로 여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모든 인간이 여기에 포함된다.

뛰어난 에픽, 혹은 용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다룰 수 있을 듯싶었다.

‘거기에 이만한 무기력함이라.’

나노머신의 에너지를 한꺼번에 사용해, 무기력해진다는 것도 단점이었다.

덕분에 용갑주도 폭식도 비활성화됐다.

물론 한꺼번에 방전되는 기분은 몇 번 사용하다보면 익숙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위험한 상태이긴 하였다.

삼신기는 황궁비고에 박아놓기만 하기는 아까운 보물이다.

하지만 몇 백년간 겨울의 활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 다루기는 위험한 물건이라 판단한 거겠지.’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사용자의 목숨 또한 앗아간다.

삼신기 중 하나가 황궁비고에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대의 황제들이 황궁비고에 감춰둔 건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드마스터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겨울의 활을 쏘면 아무런 징조없이 성 자체를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전쟁 중 사령탑을 부순다는 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카를로스 대공의 휘하 소드마스터들이 초장거리에서 겨울의 활을 쏘아댄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걸 어찌 막는단 말인가.

마법은 영창을 해야되고, 보이기라도 한다.

미리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겨울의 활은 그 수십배에 달하는 사거리에서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날아와 모든 걸 박살내버릴 것이다.

결계? 한 번은 막겠지만 두 번 연달아 쏘아진다면?

황궁이라고 멀쩡하겠나.

쏜 사람은 폐인이 되거나 죽겠지만 어차피 전장은 죽고 죽이는 곳이다.

소드마스터, 혹은 대마법사의 희생으로 전쟁의 판도 자체를 바꿀 수 있다.

그야말로 전략무기인 셈.

신기가 아니라 마궁이나 마신궁으로 불려야하는 건 아닐는지.

‘제로가 없었으면 나도 죽었을 거다.’

성능을 확인한다고 목숨을 걸었다.

무기력하고 무방비하다.

농담이 아니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우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게 전부다.

나는 아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렐.”

“······ 예.”

“날 업어라.”

“······?”

멀뚱히 사라진 산등성이를 바라보던 아렐이 정신을 차렸다.

업으라는 게 무슨 소리인가 잠시 생각해야할 정도로 넋을 놓고 있었다.

차마 힘이 빠져서 업어달라고 하기에는 모양새가 빠졌다.

호위는 필요없다며 ‘내가 더 강하다.’는 인식을 심어준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아렐이 변심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황태자인 내가 직접 산을 오를 순 없지 않겠느냐? 날 업고 산을 올라라.”

“알겠습니다.”

아렐이 고개를 끄덕이며 등에 나를 업혔다.

*

보이지 않는 화살이 산등성이를 폭파시켰다.

가공할 위력이다. 만약 저 화살이 자신을 향해 쏘아졌다면 막아내리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렐은 겨울의 활과 라인하르트를 번갈아 쳐다봤다.

황궁비고에서 꺼내온 활이지만, 저런 보물은 주인을 가리기 마련이다.

라인하르트는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것인냥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이상한 인간.’

그냥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이상하다.

다른 인간들과 비교해도 비교가 되지않을만큼.

물론 아렐은 다크엘프고, 인간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이라곤 신체의 장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였다.

어딜 찌르면 죽는지, 피가 많이 흐르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실제로 그녀가 아는 인간은 어릴 때 겪은 탐욕적인 자들이 전부였다.

그들과 비교할 때, 라인하르트의 탐욕은 그 이상이다. 하지만 탐욕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탐욕을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억제할 수 있는 수준의 탐욕을 부리고, 활용한다.

그 ‘억제할 수 있는 탐욕’이 황궁비고에다가 겨울의 활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지만, 그는 마치 자기가 주인인양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저 활에서 불길한 느낌이 든다.’

다크엘프의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은 초월적이다.

가뜩이나 숫자가 얼마 되지 않기에, 생존에 대한 감각은 타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느끼기에 저 활은 무척이나 위험하다.

생명을 빨아먹는다는 마검도 저 활의 위험도에 비할 순 없다.

그야말로 활을 쏘면 죽는 수준으로 위험하다. 생명을 담보로 활을 쏘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라인하르트가 활을 쥐자, 굉장히 안정되어보였다.

죽음을 부르는 활에 대한 경고가 사라졌다.

‘활을 제압했다? 길들였다?’

그것도 순식간에.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현상이다.

활이 라인하르트에게 굴복했다.

그럼 라인하르트는 죽음조차 굴복시킬만큼 강렬한 존재인가?

인간의 사냥을 위해 키워진 아렐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인간은 나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눈앞의 라인하르트만은 도저히 그 끝을 알 수가 없었다.

죽음조차 굴복시키는 강자라니.

“아렐.”

“······?”

업으라니.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인 내가 직접 산을 오를 순 없지 않겠느냐? 날 업고 산을 올라라.”

“알겠습니다.”

정말 알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

산등성이에 도착하자 궤멸적인 상황이 시야에 들어왔다.

레드후드 도적단의 본거지였던 곳.

죄다 쓸려나가 그 흔적만 남았다.

인간이고 건물이고 전부 증발하듯 사라진 것이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이 정도면 에픽도 남아나질 못하겠군.’

아차싶었다. 설마 겨울의 활이 이 정도나 강력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탓이다.

[A.I를 발견했습니다.]

[반경 30m.]

[코드네임 ‘레드후드’입니다.]

폐허 가운데 제로가 신호를 감지했다.

30m 앞으로 나아가자 무너진 목조건물의 잔해 사이로 한놈이 뭉게져있는 게 보였다.

아렐의 등에서 내려와, 놈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놈이 레드후드냐?”

“너··· 넌 뭐냐, 대체 뭐냐고!”

“평범한 인간이라면 즉사했을 텐데, 역시 에픽은 내구성도 좋나보군.”

“······!!”

레드후드의 전신에 경련이 일었다.

“서, 설마 너도 용이냐? 씨발! 이 개 좆같은 놈들아!”

황태자의 면전에서 참으로 상스러운 욕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궁금증부터 푸는 게 먼저였다.

“‘너도’라니. 나 말고 또 누가 왔다 갔느냐?”

나는 유진의 지도로 찾아왔다.

설마 벌써 용 한 마리가 이 산등성이를 지나갔단 건가?

그렇다면 생각이상으로 빠르다.

하지만 레드후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그 거지같은 본 드래곤! 너도 그놈과 한패냐는 말이다!”

본 드래곤?

떠오르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데이몬의 심장역할을 했던, 내가 지배한 본 드래곤.

궁에 놔둘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산맥에 숨겨두었다.

레드후드를 수집하는 건 겸사겸사고 본론은 본 드래곤을 아공간에 집어넣고자 찾아온 것인데, 레드후드는 마치 본 드래곤이 움직이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본 드래곤이 이곳을 공격이라도 했다는 게냐?”

“아닌 척 하지 마라! 이 상황이 벌어지자마자 다시 이곳을 공격해왔으니까!”

음.

본 드래곤이 자의를 갖고 공격했다?

그것도 방금 전에?

어쩐지 겨울의 활에 공격당한 것치곤 주변 관경이 어지럽다 했다.

허나 이상한 일이다.

내 명령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해야 정상일진대.

나는 손을 들고 말했다.

“와라.”

근처에 있다면 그 즉시 날개를 펼치고 나타나야 했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방금 전까지 공격했었다면 어쨌든 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다.

[에너지가 방전되어 ‘본 드래곤’이 ‘지배’에서 한순간 풀려났습니다, 마스터.]

[본 드래곤의 자기방어 시스템이 가동중입니다.]

본 드래곤은 데이몬의 원천이었다. 리치가 자신의 생명을 보관해두는 그릇으로 사용한 게 바로 본 드래곤이다.

죽은 용의 시체에 리치의 생명을 담았다.

용 자체도 강력할진대 리치의 생명까지 담겼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일 수밖에.

내가 지배한 이후 억누르긴 하였으나, 한 순간 지배에서 풀리자 용에게 기재된 자기방어 프로그램이 실행됐다는 의미였다.

제로의 에너지는 48시간 이후에나 충전된다.

“주인님.”

아렐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내가 쳐다보자, 아렐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근처에서 강대한 마물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이곳은 마물의 천국으로 유명한 로카리 산맥이다.

마물은 많으나 아렐의 상대가 될만한 마물은 거의 없다.

하물며 ‘강대한’이라는 표현을 써야할 마물은 더더욱 없었다.

있다면 그것은.

쿵! 쿠르릉! 쿵! 쿵!

······ 본 드래곤일 터였다.

산의 나무를 휩쓸며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

진득한 살의와 함께 정확히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본능적으로 나를 죽여야만 자신이 온전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걸까.

“조심하십시오.”

아렐이 검을 들었다.

붉은색의 오러가 맺혔다.

끼이이이익!

아렐이 본 드래곤의 진로를 막아섰다.

계속해서 밀려났으나 어떻게든 버텨내는 중이다.

쿠오오오오오!

순간적으로 아렐의 신형이 멈췄다.

드래곤 피어.

그 가공할 위력에 정신이 말려든 것이다.

투구의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드래곤 피어를 정면에서 맞았으니,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리라.

그 순간이었다.

아렐의 오러가 더욱 비대해졌다.

아렐의 등에서 마치 날개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버서커.’

그것은 과거 보았던 버서커의 모습이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덤벼드는 광전사.

다크엘프 군단 중에서도 발군이며, 가장 기피해야할 1순위였던 버서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종의 정신을 놓아버린 상태.

더 이상 드래곤 피어는 통하지 않았다.

이후 미친 듯이 치고 받자, 본 드래곤이 뒤로 물러나 날개를 펼치곤 날아가버렸다.

적이 사라지자 버서커가 나를 쳐다보았다.

적의만이 가득한 상태.

저것은 오로지 죽이기 위한 검이었다.

생명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털썩!

······ 그나마 힘이 다해 쓰러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쯧. 나는 작게 혀를 찼다.

*

본 드래곤은 산맥을 휘젓고 있었다.

마물이란 마물들은 모조리 학살하고 다녔다.

왜 굳이 생명체들을 죽이고 다니는 것인지 의문이었으나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몇몇 프로그램들이 오작동을 일으켜 버그가 탄생한 것 같습니다, 마스터.]

[본 드래곤의 ‘자기방어 프로그램’에 이상현상이 감지됐습니다.]

[‘자기진화’ 프로그램으로 진화한 후 모든 연결이 끊겼습니다.]

본 드래곤이 진화하고 있었다.

마물들을 죽이고, 먹으며.

그 과정에서 제로가 심어놓은 나노머신도 먹어치운 모양인데.

“······ 주인님?”

“깨어났느냐?”

등 뒤에서 깨어난 아렐을 향해 말했다.

아렐이 당황하며 물었다.

“제 갑옷은 어디갔습니까?”

“거추장스러워서 벗겼다.”

“······.”

< 본 드래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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