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59화 (59/146)

괴도.

알려진 이름은 없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다.

그는 귀족들의 보물창고를 털며 유명세를 떨쳤다.

아무리 보안을 철저하게 해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철통처럼 지켜봤자 그는 유유히 원하는 보물을 훔쳐 달아날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발을 소유했다 자부했기에 잡힐 일도 없었다.

도합 100명이 넘는 귀족을 털어먹었으니 세상에서 자신이 훔치지 못할 물건 또한 없다고 여겼다.

간이 커진 그는 세상의 모든 보물이 모인다는 황궁비고를 노렸다.

허나, 마지막 관문을 남겨두고 실패했다.

결국 잡혔고 힘줄이 모조리 잘린 채 특급죄수동에 수감된 것이다.

‘날 풀어준 걸 후회하게 해주마!’

그런데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자신을 치료하고 탈출까지 시켜줬다.

황궁비고의 지도 따위야 자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빠드득!

괴도가 이를 갈았다.

자신을 오랫동안 가둬둔 황실의 인간들. 그들의 보물을 모조리 훔칠 것이다. 속옷 한 점까지 모조리 털어버릴 것이었다.

‘궁을 빠져나온 이상 나를 잡을 수 있는 건 없······.’

쉬이이익-

푹!

숲길을 따라 도망치던 때였다.

그의 바로 앞에 있는 나무 위로 검 한 자루가 날아와 박혔다.

까딱 잘못했으면 저 검에 머리가 뚫릴 뻔했다.

‘추격자?’

뒤를 돌아보자,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기사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순순히 자신을 보내주리라고는 처음부터 생각도 안했다.

침을 삼킨 괴도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빨라봤자 나보다 빠를 순 없을 거다.’

자신보다 빠른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었다.

하지만 괴도도 모르는 게 있었다.

기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숲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인다는 종족, 엘프의 피를 이은 아렐이다.

쉬익!

‘뭐, 뭐야?’

눈 깜짝할 사이에 괴도를 추월한 아렐이 등을 돌며 멈춰섰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풀 플레이트의 갑옷과 투구는 그 무게만 족히 수십 킬로에 달할 것이다.

완전무장을 한 채 달려서 자신을 추월한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나무에 박혀있던 검을 어느새 손에 쥐고 있다.

‘괴물.’

괴물이다.

무저갱 같은 눈빛이 소름 끼쳤다.

수십, 수백, 어쩌면 그 이상을 아무런 감정 없이 죽여온 살인 인형이 분명하다.

수많은 기사와 살인마들을 봐왔지만 이처럼 감정 없는 눈빛은 처음이었다.

그들조차도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만큼은 감정의 변화가 있는 법일진대.

“사······.”

살려달라는 말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툭!

괴도의 머리가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

라인하르트의 명령에 따라, 아렐은 즉각 괴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제도를 벗어난 괴도는 숲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숲은 엘프의 영역이다. 다크엘프라 할지라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아렐은 빠르게 괴도를 따라잡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목을 베었다.

“······.”

아렐은 한참이나 시체를 내려다 봤다.

괴도. 황궁비고로 통하는 길을 모조리 외고 있는 인간이다.

라인하르트는 그에게 지도를 받아냈다. 보안을 해제하거나 피하는 방법도 함께 적힌 그 지도는 억만금의 가치가 있었다.

대륙의 패자인 제국이 천 년간 모은 보물 중의 보물들.

그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괴도를 죽이긴 했으나, 지도는 남았다.

무엇보다 괴도 외의 다른 인물도 풀어주었다.

이후 라인하르트는 굳이 괴도를 제도 밖으로 내보내 자신이 쫓게 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있다면, 이것을 페르세포 대공에게 보고해야 하는 건지.

“······.”

새로운 주인.

자신이 모시고 따라야 할 인간······.

오로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 키워진 자신이, 인간을 따르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눈을 뜨고 자각했을 때부터 그녀는 인간을 죽여왔다.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페르세포 대공에게 거두어진 뒤에는 죽이는 재능을 더욱 갈고닦았다.

그녀에게는 살인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다. 이는 페르세포 대공이 들인 다른 다크엘프들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

―생각하지 마라. 의심을 갖지 마라.

―너는 모든 것을 죽이는 칼이다.

―오직 칼이 되고자 태어난 것이다.

···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새로운 주인은 다르게 말한다.

생각을 하라고. 인형 따윈 필요 없다고.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누구의 말이 옳은가.

“······.”

문득 연회가 떠올랐다.

손을 잡고 춤을 췄던 기억.

그런 치렁치렁한 옷도 처음 입어봤다.

또한, 지금 자신이 따라야하는 건 라인하르트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괴도에 대한 건 적게 알수록 좋았다.

많은 이들이 알게되면 라인하르트는 위험해진다.

황태자가 특급죄수동의 죄수 두 명을 꺼내고, 황궁비고를 노린다는 게 알려지면 폐위당할 위험조차도 있었다.

라인하르트를 지키고자 한다면, 설령 페르세포 대공이라 할지라도 알려선 안 되는 것이다.

크릉! 크르르!

그때였다.

숲을 거닐던 거대한 늑대 두 마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피냄새에 이끌려 찾아온 것이다.

낑! 끼잉!

하지만 흉포한 늑대들이 아렐의 눈치를 보듯 일정영역을 두고 다가오지 못했다.

낑낑대며 아렐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배고픔과 본능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천천히, 아렐은 손가락 끝으로 괴도의 시체를 가리켰다.

크르르! 크릉!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듯.

아렐이 가리키자마자 거대한 늑대 두 마리가 달려와 괴도의 시체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굶주렸던 늑대들은 뼈까지 씹어먹으며 모든 증거를 없앴다.

“······.”

그것을 지켜보던 아렐은 조용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유진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내가 허무의 속성인 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인데?’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단번에 꿰뚫어봤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무영창의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허무 속성의 마법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유진은 태도를 바꿨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자다.

심지어 용에 관한 내용까지 언급하는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미친 것으로 유명했는데, 가면을 쓰고 있던 걸까?

“한 번 맞춰보거라. 내가 어떻게 알아냈을 것 같으냐?”

“그걸 제가 어떻게······?”

유진은 라인하르트의 언행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한참을 뚫어져라 라인하르트를 쳐다본 유진이 말했다.

“허무의 속성을 지니셨군요.”

“역시 알아보는군.”

허무의 속성을 알아본다는 것.

말하자면 상대방이 ‘에픽’임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용도, 데이몬도 내 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제로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했다. 바알 역시 눈치만 챘을뿐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하였다.

반면 제로는 상대방이 A.I인지 근처에 있다면 판별할 수 있었다.

[지금 마스터와 대화하고 있는 ‘유진’은 A.I가 아닙니다.]

[하지만 스캔결과 그의 머릿속에서 불안정한 전기자극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런데 유진이 A.I가 아니란다.

A.I에게, 에픽에게 인간성을 잡아먹히지 않았다.

몇몇 에픽을 보았지만 인간성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네놈의 머릿속에 있는 그것. 네가 무영창의 마법사가 될 수 있게 도와준 그 에픽이 내가 ‘허무의 속성’이라고 알려준건가?”

“······!”

유진이 한차례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놀랄 일이 없다고 여겼는데, 모든 걸 간파하고 있었다.

설마 자신을 죽이러 온 용인 걸까?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상대는 제국의 황태자였다.

자신과 같은 허무의 마법사라면 용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에픽’의 존재를 알아보는 건 별개다.

그것은 오직 자신의 에픽만이 갖춘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유진은 반쯤 포기했다.

의도가 무엇이든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모두 얻어낼 것이다.

“전부. 네놈이 머릿속의 그놈을 얻은 경위부터 시작하지.”

“그럼 용에게 죽기 전에 먼저 저를 죽여준다고 약조해주십시오.”

“인간답게 죽고 싶다는 건가?”

“에픽이 용에게 죽는다는 건 모든 것의 상실입니다. 상상조차 못하실 겁니다.”

유진은 두려움에 양팔을 감싸안았다.

용이 에픽을 죽이는 장면을 본 뒤 그는 이곳에 틀어박혔다.

용에게 죽을바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죽는 게 나았다.

“오냐. 네 원대로 해주마.”

“······ 전하. 저는 고아였습니다. 아무런 재능도 없는.”

유진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

태어날 때부터 유진에겐 마법적인 재능이 없었다.

천애고아가 무슨 재능이 있겠느냔마는, 설령 있었더라도 살아남기 바빴으니 재능을 개화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렁뱅이로 살던 어린시절, 겨우 웬 금실 좋은 부부에게 거둬져 입에 풀칠이나 하나 싶었지만, 알고보니 그 둘은 악명높은 악마교단의 흑마법사였다.

그 뒤로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만큼 모진 인체실험이 이어졌다.

하루 24시간 중에 제정신을 차리는 건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5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유진은 각성했다.

정신이 맑아지고 무영창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인체실험을 진행한 두 부부 흑마법사를 죽이고, 영의 마탑을 세워 자신이 있을 자리를 만들었다.

대마법사 행세를 하며 황궁마법사까지 되었으니 천애고아치고는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돈과 명예. 모든 게 손에 들어왔다.

정말 행복한 나날이었다.

눈앞에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도?’

대륙 전지도가 떠올랐다.

지도 위에는 여러개의 점들이 있었고, 자신의 위치에도 붉은 점이 찍혀있었다.

본능적으로 유진은 그것이 자신과 같이 ‘각성’한, 혹은 ‘에픽’의 위치를 찍어놓은 지도라고 확신했다.

유진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붉은점이 찍힌 위치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또 다른 에픽 ‘벨라’를 만났다.

벨라는 인간세계에 적응한 에픽이었다.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에픽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세계에 적응한 벨라는 주기적으로 주거지를 옮기며 유목민 생활을 하였고, 유진에게도 꽤나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같은 에픽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며, 특히 자신같이 착한 에픽을 만나는 건 하늘에서 별을 따기보다 어려울 것이라며 유진이 궁금했던 바를 시원하게 알려주었다.

유진은 벨라에게 끌렸다.

벨라 역시 유진에게 끌렸다.

어쩌면 유진의 머릿속에 있는 에픽 때문일지도 모른다.

행복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진정한 행복감.

벨라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줬다. 황궁에서의 거짓된 시간마저도 지금의 이 행복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년이 아니었나?”

궁에서 돌아오자 마을이 박살나있었다.

모든 사람이 죽어있고, 그 가운데 벨라와 ‘용’이 있었다.

죽어가는 벨라를 보며 용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탐지’ 신호가 왔는데. ‘탐지의 기능을 가진 에픽’을 가진 건 네가 아닌 것 같군.”

유진은 숨어서 용의 대화를 엿들었다.

곧 용이 말하는 ‘탐지의 기능을 가진 에픽’이라는 게 자신이라는 걸 눈치챘다.

에픽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

벨라를 찾고자 켠 그 지도가 용까지 불러모은 것이다.

또 다른 용들마저도.

“한 발 늦었군.”

“씁, 탐지의 에픽은 귀한데. 탐지의 에픽을 흡수한 용은 다 십이주신이 됐다며?”

“발뭉. 오백년 만이라 반갑긴 하다만, 네놈이 흡수하기 전에 힘으로 빼앗아주마.”

“··· 우리끼리 싸울 필요 없다. 이년은 탐지의 에픽이 아니야. 저급한 최하급 에픽이다.”

발뭉.

마을을 전멸시키고, 벨라를 죽인 그가 벨라의 시체를 거적대기마냥 던졌다.

“먹어봤자 맛 없다. 허나 기억은 공유한다. ‘탐지의 에픽’을 찾는 건 서로 경쟁해야할 게 아니라 힘을 합쳐야하는 일이다.”

발뭉의 발언에 따라 용들이 다가와 곧이어 벨라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벨라에게 손을 얹자 뼈와 살이 벗겨지고, 녹으며, 사라졌다.

그 광경은 진저리처지게 끔찍한 수준이었다.

이어 벨라를 흡수한 용들 중 하나가 말했다.

“강렬한 기억조각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에픽은 의도적으로, 주기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지우니까 관련자들을 색출하기 여간 귀찮거든.”

“······ 유진.”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다. 먼저 찾는 게 임자다.”

용들이 마을을 떠났다.

유진은 최대한 자신을 지웠다. 그녀를 놀래켜주고자 기척을 지운채 다가온 게 주효했다.

이후 유진은 궁으로 돌아가, 자처하여 특급죄수동에 수감됐다.

벨라와의 기억을 잃고싶지 않았다.

그토록 끔찍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용들에게 빼앗겨 조롱거리가 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게 특급죄수동에 갇힌지 10년이 지났다.

*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전하.”

유진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진이 왜 에픽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인간성을 잃지 않은 건지 알겠다.

오랜시간 인체실험을 당하며 고통받았다.

24시간 중 제정신으로 있을 때가 고작 한 시간도 안 되었다니, 자신과 비슷한 수순으로 에픽을 역으로 지배하게 된 건 아닐까.

오랜시간 고통받은 뇌에서 어떤 현상, 혹은 변화가 일어나 에픽의 주도권을 빼앗아오는 것이다.

시간마저 되돌아온 건 아닌 듯하지만.

‘다른 에픽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지도. 하지만 켜는 순간 용들에게 노려진다.’

기능은 탐이났다.

그런데 먹었다간 배탈이 날 것 같다.

물론 에픽을 찾아내는 건 내가 강해지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바알에게서 받은 사이오닉 에너지, 성지의 용에게서 얻은 용갑주, 데이몬에게서 뺏은 본드래곤.

무엇하나 버릴 것 없이 훌륭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생각보다 에픽이 많고, 그들은 인간사회에 숨어들어 인간들을 조종하며 살아가고 있다. 용과 인간들에게 들키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에픽을 흡수하는 에픽의 힘은 용에 가깝다.

제로의 나노머신을 ‘지배’하는 힘이 그렇다.

심지어 용의 기억마저도 조각모음해서 엿보았으니, 에픽들이 가장 두려워해야하는 건 용보다 제로였다.

어쨌든······ 유진은 약은 약인데 독이 들어있는 약이었다.

허나, 오히려 잘 된 것일지도 모른다.

독도 잘 쓰면 약이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지도를 켜라, 유진.”

< 독도 잘 쓰면 약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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