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은 있으나, 그 재능이 꽃피우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사벨라를 떠올리며 이자르는 웃어보였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사벨라는 수많은 형제자매 중에 한 명일뿐이었다.
기사가 되겠다며 몰래 검을 휘두르는 건 알았지만 어차피 포기할거라고 여겼다. 제대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면 결국 안주하게 되리라고.
그런데 황궁을 다녀오더니 사람이 변했다.
여자 용병 시말리아 고용하여 자신에게 맞는 검술을 고안하더니 가문의 어른들과 한 치 밀리지 않는 싸움을 시작했다.
흥미가 생겼다. 이사벨라는 다른 고리타분한 형제자매들과는 달랐다.
게다가 이사벨라는 자신이 봐도 검에 대한 재능이 넘쳤다.
이자르는 그 재능을 꽃피워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문에선 그토록 자신감 넘쳤던 녀석이 라인하르트 황태자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드는군.’
문제는 라인하르트다.
이사벨라는 라인하르트에게서 편견에 맞서싸우는 법을 배웠다.
친구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시야에 들어오자 주눅이 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도 창피했던 모양인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어여쁜 동생이나, 남녀문제는 제3자가 끼어들어선 안 되는 법.’
그래서 이자르는 선택지를 줬다.
라인하르트를 통해 일단 황룡기사단의 견습으로 들어가는 방법.
다크엘프 아렐과 경쟁하며, 계속 보고 대화를 나누면 자신의 마음이 더 확실해질 터였다.
다만, 제대로 된 기사는 못 된다.
신경쓰이는 사람의 근처에서 검을 휘두르겠는가.
하지만 라인하르트를 얻을 수만 있다면 가문에도, 그녀에게도 더없이 좋은 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제대로 된 기사가 되는 걸 택했다.
‘지금쯤이면 도착했겠지.’
이사벨라는 용병왕 카르발에게 맡겼다.
용병왕 카르발은 무자비한 자다.
성별의 상관없이 그는 냉혈안처럼 용병들을 훈련시켰다.
온실 속의 화초이기만 해선 기사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작금의 시대에서 여자가 기사가 되려거든 소드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했다. 아니면 성별을 숨기거나.
짧고 굵게. 6개월 정도면 어느 정도 완성되어 나올 것이다.
이 거래를 위해 벌어둔 저금 대부분을 썼지만, 후회는 없다. 재능있는 동생에게 하는 투자였으므로.
아무리 동업관계라도 카르발은 돈거래는 확실히 했다.
그만큼의 성과 또한 가져왔으니, 그저 무운을 빌었다.
어차피 그도 한동안은 중앙에 있어야했으니까.
언제까지 변방에만 머무를 순 없었으니까.
‘게다가 돌아가는 꼴이 딱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야. 아주 좋다.’
황실은 제국의 중앙이다.
중앙은 지금 고요하다. 폭풍이 불기 전 폭풍전야와 같이.
황태자를 중심으로 한차례 폭풍이 불 것만 같다.
부디 자신의 베팅이 맞기를 바란다.
정말로 인생을 건 풀베팅이었다.
만약 이게 썩은 동앗줄이라면 모조리 숙청당할 테니까.
그것을 위해 우선 자신의 능력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바로 월계수 양복점을 제국수도에서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 간지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이자르를 상념에서 깨웠다.
“이자르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요?”
“아. 미안합니다, 레이디. 그대의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어머. 제 눈이 그렇게 예쁜가요?”
“저녁의 잔잔한 호숫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마침 떠오르는 시 한 구절이 있는데, 읊어봐도 되겠습니까?”
“너무 좋아요.”
그나저나 눈앞에 있는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수도에 가장 많은 땅을 가졌다는 땅부자 후작가의 영애.
그 정도면 됐다. 그 외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자르는 장난기 다분한 미소와 함께 시를 읊어나갔다.
*
특급죄수동의 간수장은 헐레벌떡 일어나 간수들을 이끌고 입구에서 대기했다.
‘황태자가 죄수동의 관리소장으로 임명됐다는 말은 들었다만······ 이제와서?’
관리소장으로 임명된 게 벌써 몇 달 전이다.
하지만 그간 황태자는 단 한 번도 특급죄수동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제국을 위협하는 대역죄인들만 수감되는 특급죄수동.
여타 다른 황실의 사람들처럼 황태자도 이곳에 들어오길 꺼려하는 건가 싶었다.
차라리 간수장의 입장에선 그러는 편이 더 좋았다.
호랑이가 없는 산에서는 여우가 왕인 법이었으니.
“오, 오십니다!”
“일동 차렷!”
저 멀리서 보이는 황실마차를 보고 간수장이 외쳤다.
‘그런데 생각보다 조촐하군.’
고작 마차 하나.
그것도 마부와 기사 한 명만 대동했다.
황실 황태자가 이끌고 온 인원치고는 조촐하다.
그간 관리소장을 맡았던 황실의 사람들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항상 기사단을 대동했던 탓이다.
‘무슨 산책하는 것도 아니고······.’
간수장은 내심 혀를 찼다.
제아무리 황태자라고 할지라도 이곳은 특급죄수동이다.
만만한 생각으로 왔다면 크게 후회할 것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라인하르트가 내리자, 백에 가까운 간수들이 허리를 빳빳하게 펴고 경례했다.
이윽고 라인하르트가 간수장에게 말했다.
“내가 많이 늦은 것 같군.”
“아닙니다, 전하!”
늦기는 늦었다.
그래도 보통 관리소장으로 임명되면 한 달 내엔 얼굴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어찌됐든 이곳의 관리를 황제폐하께서 맡기신 바, 오늘은 죄수동을 한바퀴 돌아볼 생각이다.”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전하.”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수장은 숨을 가다듬었다.
미친 황태자라고 불려서 내심 걱정했는데 이만하면 과거의 다른 소장들보다 양반이다.
‘최대한 안전하게 돌려보내자.’
적당히 안전구역만 안내하고, 내보내면 다시 이곳은 자신의 왕국이 될 터.
어차피 황태자도 구석구석을 전부 자세하게 살필 생각은 없을 터였다.
기껏해야 ‘시늉’만 하는 거겠지.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게 끝인가?”
“예, 1구역은 전부 돌았습니다.”
“3구역까지 전부 돌아볼 것이다. 안내하거라.”
“전하. 2구역부터는 정말 위험합니다.”
간수장이 땀을 삐질 흘렸다.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특급죄수동안 모두 3구역으로 나뉜다.
1구역은 죄수동에서 가장 안전한 수감자들은 모아둔 곳이다.
주로 황실의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볼모로 잡힌 이들이 이 1구역에 갇힌다.
하지만 2구역부터는 잔악무도한 범죄자들이 모여있었다.
가장 위험한 놈들은 3구역에 있고, 철저하게 봉쇄되어 이곳은 간수들도 들어가길 꺼려하는 곳이었다.
“안내하거라.”
하지만 까라면 까야하는 게 간수장의 위치였다.
간수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2구역만 가도 생각이 달라질 거다.’
허나 그 생각도 틀렸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특급죄수동은 무법지대였다.
그나마 1구역은 관리가 되고 있었지만 2구역부터는 모든 게 달라졌다.
시체썩는 냄새. 짐승 같은 눈들.
그들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배식이 부족해 벌레를 먹고, 썩은물로 삶은 연맹한다.
인간이하의 취급이나 그럴만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목을 자르지 않고 특급죄수동에 갇혀있는 이유는 이들이 귀족이기 때문이었다.
특급죄수동은 귀족에게 벌을 주기 위한 나름의 제도적 장치였다.
1구역은 가문이 빵빵하거나, 갱생의 여지가 있는 자들만 모아둔 반면 2구역은 죽이긴 애매하나 답이 없는 귀족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오직 제국에만 존재하는 귀족재판.
귀족들도 법을 위반할 경우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미명하에 세워진 국가기구다.
차별을 없애겠다는 방침에서 나온 발상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황실황가의 사람은 그 재판으로부터 자유롭다.
황실황가의 사람은 오직 황제만이 벌할 수 있다.
말인 즉, 황제는 그 누구도 벌하지 못한다.
어쨌든 재판에서 구형을 받은 귀족은 모두 특급죄수동에 갇혀있었다.
‘특급죄수동의 존재의의는 오직 3구역을 위해서지.’
귀족들도 처벌한다는 이 제도는 3구역을 위해 만들어졌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실의 중요한 비밀을 아는 자들.
황궁비고를 털기 직전까지 갔다가 마지막 문을 열지 못해 잡혀온 자도 이곳에 있었다.
괴도라고 불리는 남자.
그리고 공허의 마법사까지.
힘줄을 자르고, 마나를 다룰 수 없도록 폭주시켜 폐인으로 만들어놓았다.
하물며 일곱 개의 문으로 막혀있었으니 탈출은 불가능하다.
“아주 엉망이군.”
3구역까지 모두 돌아본 뒤 총평했다.
소장실로 돌아와 간수장에게 말하자 간수장이 눈치를 보았다.
“무엇이 엉망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황실로부터 마련되는 자금이 적지 않을 터인데, 그 돈은 다 어디로 새고 있는 것이냐? 명색이 황실에서 유치한 기구일진대 유지도 보수도 되어있지 않으니 기가 찰 노릇이구나.”
“아, 아닙니다, 전하. 모두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그래? 장부를 가져오너라.”
장부까지 훑는다고?
간수장의 입이 말랐다.
황실에서의 자금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보통 관리소장으로 임명된 황실의 사람이 죄다 써버리거나, 쓰고 남은 것들은 간수장과 간수들이 나눠가졌다.
근 몇 달간 황태자는 이곳에 눈독도 들이지 않았다.
그 눈 먼 돈들은 모두 자신들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장부를 보여달라니. 그런 게 제대로 기재되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여태껏 그런 적도 없거니와······.
‘기강잡기인가?’
확실한 건 지금까지의 관리소장들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 기강을 잡겠다면 적당히 맞장구쳐주면 될 일이다.
“여기있습니다, 전하.”
“흐음.”
장부를 훑었다.
하지만 역시나 제대로 기재되어있는 게 없었다.
되어있지도 않은 건물 유지보수로 책정된 금액 따위를 보면 어이가 없었다.
식비로 책정된 것조차도 놀라울 따름이다. 죄수들 모두가 매일 고기식사를 하고도 남을 금액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인원도 달랐다.
수감된 범죄자의 인원과, 간수의 인원조차도 두 배 이상 부풀려져 있었다.
황실 사람들은 재정에 어둡다고 생각해 이렇게 적어놓은 것이다.
하기야, 물가 따위를 신경쓰며 밥을 먹는 귀족은 없었다.
하물며 황실임에야.
“다른 장부는? 이게 전부는 아닐 텐데?”
“왜··· 그러십니까?”
“대조하며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식자재 등을 매입해오는 상인도 전부 조사할 생각이다. 그들의 것과도 비교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간수장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좆됐다!’
전수조사하면 들통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억울했다.
황실의 돈이 새어나가는 게 어디 이곳 뿐이겠나.
모두들 자신처럼 하고 있는데, 황태자는 왜 굳이 벌통을 쑤시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들켰다간 바로 모가지다. 진짜로 목이 잘린다.
“사, 살려주십시오, 전하!”
간수장이 넙죽 엎드렸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황실의 돈을 사적으로 유용한 죄. 연관된 모든 자들을 법대로 처리할 것이니 그렇게 알라.”
특급 죄수동에 피바람이 불었다.
*
그 소식은 순식간에 귀족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특급죄수동에 피바람이 불었다는 이야기가.
모든 간수가 교체되었다. 간수장을 비롯한 몇몇은 본보기로 처형됐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간수장과 간수들이 해먹은게 특급죄수동만이 아니었던 탓이다.
연관된 귀족들은 재판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특급죄수동에 갇힌 귀족들의 편의를 위해 뒷돈을 주었던 자들. 그들도 당연히 조사대상이었다.
귀족들은 항의했다.
“진짜 미친 거 아닙니까?”
“황비님. 이건 아닙니다. 제가 재판장에 서야 하다니요?”
“제발 막아주십시오. 그간 저희 가문과의 연을 봐서라도!”
자신이 줄을 댄 황실의 사람들에게.
그중에는 권력실세인 황비들도 있었다.
직접 황제에게 말을 할 수는 없으니, 황비들을 움직여 라인하르트의 이 미친 짓거리를 멈추려는 것이었다.
“라인하르트 전하. 이런 중요한 일을 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서 처리하시다니요?”
“멈추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전하.”
위협에도 불구하고 라인하르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당초 어느 귀족과도 연결되어있지 않은 라인하르트다.
황제를 제외하면 압박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다.
후에는 아예 귀를 막고 문을 걸어잠궜다.
라인하르트도, 황제도 아무런 반응도 없으니 황비들은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황실에 한바탕 태풍이 불었다.
황궁비고가 털리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채로.
*
[··· 해킹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안이 해제됩니다.]
끼이이익-.
거대한 황궁비고의 거대한 문이, 마침내 열렸다.
이 문까지 다다랐던 괴도를 구슬려 설계도 수준의 지도를 받아낸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황실 지하에 존재하는 황궁비고.
천 년 전 제국을 만든 초대황제가 지었다는 보물창고!
오직 황제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비밀번호가 고안된 문이다. 그리고 데우스는 주기적으로 황궁비고의 비밀번호를 바꾸었다.
3구역에 갇힌 괴도조차도 포기하게 만들만큼 이 문은 어떤 방식에도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자유를 대가로 몰래 잠입할 수 있는 경로를 지도로 그려주라고 하자, 괴도는 코웃음쳤다.
어차피 마지막 문을 열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열렸다.
‘예상대로군. 성지에서의 그 문과 비슷해.’
성지의 용을 가뒀던 그 문과도 비슷했기에 제로를 통해 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적중한 것이다.
문이 열리자, 어마어마한 숫자의 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보물의 산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무시한 채 걸었다.
과거 내가 황제에 즉위했을 땐 이미 황궁비고가 어느정도 털린 뒤였다.
황제 데우스가 크로프트를 시켜 몇 가지 보물을 빼내었다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허나 지금이라면, 그 보물들조차 있을 것이다.
‘······ 있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있었다.
나와 카를로스 대공의 손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빼돌린, 지고의 보물이.
< 지고의 보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