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정보를 모음하였습니다.]
[도합 ‘512페타바이트(PB)’의 정보량입니다.]
순간 어마어마한 정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0과 1로 기록된 끝이 보이지 않는 양의 숫자들.
머릿속이 피로해지는 기분이 들자, 제로가 그 숫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순간처리 허용용량을 초과했습니다.]
[압축을 시도합니다.]
[압축의 형태로 ‘용’을 현상화합니다.]
[현상화 한 ‘용’은 사용자에게 필요한 데이터만을 찾아내 읽을 수 있는 기능이 내장되어있습니다.]
512페타바이트의 정보량.
그게 얼마나 많은 건지는 찰나에 느꼈지만 가공할 정도였다.
계속해서 놔뒀으면 그 숫자들에 깔려 죽지 않았을까.
제로는 한 달 가까이 저 용량을 조각모음하고 있었다.
나의 내부에서 죽은 ‘용’의 나노머신을 처리하고, 나름대로 정리하며 자신의 기능을 최대치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용이 지니고 있던 정보들을 나는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지?”
“그레이트 올드원, ‘베타’의 용이다.”
“베타?”
“위대한 두 번째 주신. 태양과 달을 관장하는 균형의 존재.”
성지의 용은 내가 묻는 물음에 착실하게 답했다.
그리고 정확히 묻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진짜 성지에서 만난 용이 아니라 그저 용의 형상을 띤 정보집합체라서 그럴 테지.
‘그레이트 올드원이라.’
그레이트 올드원. 신성교에서 떠받드는 ‘위대한 존재’의 이름이다.
위대한 존재는 열 두 갈래로 나뉘며 세상을 관리한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열 두 갈래’의 이름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중 두 번째 갈래의 이름이 베타라는 것이다.
용을 만들어낸 게 주신이라면 그들에 대한 의문점도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었다.
“주신들은 모두 인공지능인가?”
“의미불명. 관련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오직 용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열 두 주신이 모두 A.I인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는 의미다.
“용은 어떻게 태어나느냐?”
“‘에덴’에 있는 ‘세계수’의 열매인 ‘선악과’에서 태어난다.”
“에덴과 세계수는 어디있지?”
“관련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에덴을 벗어난 용들이 ‘12위업’을 달성하면 다시 에덴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에덴이 정확히 무엇이냐?”
“이상향, 신들의 낙원, 모든 용들의 고향, 돌아가고 싶은 장소.”
에덴. 대륙에는 없는 지명이다. 하지만 용의 말로 판단하건대 오직 주신과 모든 위업을 달성한 용만이 그곳에 들어갈 권리를 얻는다.
12위업.
신들이 내리는 시련.
그것을 달성하면, 에덴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고?
신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진짜로 신이 되는 게 아니라,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왜 말피엘은 에덴으로 돌아가지 않은 걸까.
길이 열리지 않아서? 아니면, 사실은 12가지 위업을 모두 달성했다는 게 거짓말이었던 걸까?
“위업에 대해 말해봐라.”
“‘세상의 균형’을 어지럽히는 존재를 제거하기 위한 용의 시련이다. 내용은 세계수에서 정해지며 균형을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그에 걸맞은 용에게 위업이라는 형태의 시련이 내려진다. 용들은 그것을 때때로 ‘퀘스트’라고 부르며 자신을 ‘플레이어’라고 칭하기도 한다.”
“플레이어? 무슨 뜻이지?”
“용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게임이다. 열 두가지 과제를 달성하면 클리어되는 게임 속 참가자가 플레이어다.”
용들의 시선에서 이 세상은 게임과도 같다는 말이다.
그들은 위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용어로 스스로를 플레이어라고 부르고 있었다.
“위업의 대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그것을 피할 방법이 있느냐?”
“전례는 없지만 방법은 존재한다. ‘가장 위대한 존재’만이 세계수가 정한 위업의 내용을 삭제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
“가장 위대한 존재? 그레이트 올드원을 말하는 게냐?”
“그렇다. 태초의 시작, 알파가 가장 위대한 존재다.”
잠시 고민했다.
크로프트는 자신이 ‘위업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했다.
각성하며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로 세계수에 인식된 것이다.
그것을 원초적으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위대한 주신인 알파가 내용을 삭제하거나 변경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게 아니라면, 결국 크로프트를 제거하고자 격에 맞는 용이 선정되어 찾아온다는 이야기였다.
데이몬의 그릇처럼 시간을 끌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용은 총 몇이나 있지?”
“세계수가 맺은 선악과의 숫자만큼 있다. 그리고 열 두 주신은 자신의 용량을 나누어 선악과에 담을 수 있으나 보통 그 숫자는 열을 넘기지 않는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파악은 가능했다.
열 두 주신들이 자신의 힘을 나누어 용을 만드는데, 그 숫자가 최대 10이라고 보면 120의 용을 세상에 푸는 게 가능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같은 얼굴을 한 용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용은 선악과를 맺게 한 주신의 얼굴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성지의 용과, 말피엘이 같은 주신에게서 탄생한 용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주신 베타에 의해.
듣자하니 주신이라는 것들은 ‘용’을 지상에 내려보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전능한 신이라면 직접하면 될텐데 굳이 자신의 힘을 담은 용들을 사용하는 걸 보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는 건지.
어쨌든, 이 세상에 꽤 많은 용이 있다는 건 알겠다.
최대 120마리이나 실제 있는 건 수십마리 정도일 터.
“용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러니 찾아오기 전에 제거하는 방법도 있었다.
마냥 기다리는 것보단 직접 찾아내어 박멸시키는 게 훨씬 좋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겸사겸사 말피엘도 찾아낼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해야만 했다.
“없다. 모든 용은 경쟁자이며 다른 용에게 본능적인 적대감을 갖고 있기에 뭉치지 않고 찾지 못한다.”
경쟁자다.
이상한 말이다.
그저 시련을 해결할 뿐이라면, 그저 에덴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라면 서로가 동업자인 관계 아닌가?
그런데 경쟁자라는 건 에덴에 들어갈 수 있는 숫자에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열 두 번째 시련.
거기까지 도달하는 자만이 에덴을 들어갈 수 있다면.
“마지막 열 두 번째 위업이 무엇이냐.”
“리셋. 인류 자체가 세상의 균형을 무너트린다 판단,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마지막 위업을 달성한 자만이 에덴으로 들어가 숫자를 부여받고 신이 된다. 적게는 천 년, 많게는 만 년 단위로 마지막 위업이 시작된다.”
*
자리에서 일어나 자시 명상을 했다.
눈을 감고, 머릿속을 정리해본다.
증강현실에서 나눈 대화들. 수백, 수천 가지의 정보를 취합해 순서대로 정렬시켰다.
‘십이주신의 존재.’
우선 신이 탄생하는 배경을 알았다.
세계수의 열매에서 태어난 용이 12가지 위업을 달성하면 신이 된다.
그런데 십이주신이 있단는 건,
‘최소 열 두 번 세상은 망했다.’
최소 열 두 번 세상이 갈아엎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리셋이라 말했지만 완전한 절멸은 아닌 듯싶었다.
인류가 천 년만에 이만한 숫자로 번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도 균형을 무너트리는 모든 것의 제거를 뜻하는 것일 테다.
‘정령이 사라진 이유가 이거였군.’
그리 생각하면 정령이 사라진 게 이해가 되었다.
정령무기는 균형을 깨트린다. 대량으로 생산되면 인류는 신조차도 넘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천 년전 ‘고대마법의 전성기’라 불렸을 때, 9서클의 마법사는 그 숫자가 두 자리수에 달했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9서클 마법사는 전무했다.
9서클에 이른 자들 역시 모두 제거된 탓이리라.
그 외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것들이 제거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신비라 불리는 것들.
‘말피엘은 열 두가지 위업을 모두 달성한 게 아니다. 마지막 위업을 실행하고 있었던 게다.’
그제야 말피엘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인류를 선동하고, 갈라치며, 힘을 약화시키고 마지막엔 모두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세상의 정화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그렇다면 말피엘만 제거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대륙전쟁을 벌이며 인류의 기술은 가파르게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무력의 상승으로 귀결됐지. 끊임없는 전쟁은 강자를 낳고, 혁신을 만들었다.’
나로 인해 시작된 정복전쟁.
내가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며 시작된 전쟁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없었더라도 결말은 비슷했을 터다.
‘전쟁을 막으면 기술의 발달이 늦어질 순 있을지언정 결국엔 그 균형점을 초과하게 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지금은 그저 숨기고 있을 뿐이니까.’
데우스의 평화정책은 결과적으로 인류종말의 시간을 뒤로 늦춘 셈이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해결책이라 할 수는 없다.
모든 국가와 단체가 힘과 기술을 숨기고 있다. 그중에는 고대의 문명과 관련 된 것들도 있었다.
카를로스 대공이 소드마스터를 대량으로 생성해내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황실에도 몇 없는 소드마스터를, 카를로스 대공은 수십을 지니고 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이십여명이지만 비공식적인 숫자는 더 많다. 일전에 마주치고 죽였던 패트릭과 크로우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들도 있었다.
단순한 마나 연공법의 차이로 설명할 수 없는 숫자.
게다가 카를로스 대공은 데이몬과도 접점이 있었다.
그 역시 사라진 고대의 힘, 혹은 나노머신을 다룰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이유들로 어차피 마지막 위업은 실행되리라.
‘오만방자한 신놈들.’
허나 세상의 종말 따위 내가 허락할 수 없다.
인류를 억제하겠다는 오만한 신들의 생각에는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모두 제거해버리겠다.’
단순히 황제가 되는 것만으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었다.
모든 용을 제거하고.
‘그 세계수라는 것도 부순다.’
세계수도, 주신들도 박살내버린다.
놈들의 뜻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용의 정보로 얻은 건, 그러한 세계의 비밀뿐만이 아니었다.
‘히든피스라고 했지.’
플레이어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위업의 해결 외에도, ‘히든피스’를 통해서도 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히든피스는 ‘위업으로 선정되지는 않았으나 특수한 힘을 지닌 에픽’이다.
예컨대 내 머릿속의 제로.
그리고 카이첼이 품은 바알과도 같은 존재를 사냥해, 용은 강해진다.
에픽을 찾아 떠돌아다닌다는 거고, 그것이 바로 용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로 연결된다.
‘용을 찾지는 못해도, 찾아오게 만들 방법은 있다는 거로군.’
찾아오는 용이란 용은 죄다 족쳐서 정보를 훑다보면 분명히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
성지의 용은 천 년간 갇혀있었다. 그 사이의 일은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을 아는 용을 찾아서 해부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면 에덴으로 향하는 길이라거나, 세계수를 부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들에 대한 실마리도 찾을 수 있을 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에픽이다.
각성한 A.I.
‘칼리번.’
칼리번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칼리번의 공식구애에도 용은 찾아오지 않았다.
찾아왔다면 칼리번은 그 자리에서 삭제됐을 테니까.
기준이 있는 건가? 아니면 너무 눈에 띄어서?
히든피스라 불릴 정도의 에픽은 아니어서일 수도 있었다. 칼리번은 결국 고대의 인류가 만든 정령무기였으니.
‘그 이상의 에픽이 필요하다. 제로나 카이첼을 미끼로 던질 수는 없으나······.’
턱을 쓸었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특수한 능력을 지닌 인간’이다.
데이몬도 마찬가지다.
특수한 능력, 모두 ‘무영창의 마법’을 쓴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노머신을 본능적으로 다루는 건 진짜 에픽만 가능하다.
정령무기는 시동어를 통해 힘을 내니 어찌됐든 영창이 필요했다.
또한 무영창의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허무의 속성’이라 불리며, 그 속성을 지닌 마법사는 한 시대에 많아야 두 명 정도 나타난다고 하였다.
허나 나는 그 허무의 속성을 지닌 다른 인간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안타깝군요. 허무(虛無)의 속성은 한 시대에 몇 태어나지 않는 재능. 일찍이 알아봤더라면 능히 마탑의 최상층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과거 재밌다는 듯이, 혹은 비웃 듯이, 나를 진단했던 바로 그 마법사.
한때 ‘영의 마탑’의 마탑주였으며, 직전까지 황실마법사로 있었던 바로 그놈.
그리고 그는 지금 특급 죄수동에 갇혀있었다.
< 히든피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