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모두의 시선을 빼앗아간 두 남녀가 연회장의 중심부로 걸어들어왔다.
떡 벌어진 어깨, 진한 눈썹과 호감형의 얼굴형.
장난기 다분한 눈빛까지 갖춘 남자는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특히 둘 다 박쥐를 연상케 하는 검은 복장과 가면이 인상적이다.
함께 걸어들어온 여인 역시 옆구리와 허리가 전부 드러나는 노출된 의상이었는데, 다른 여인들을 코르셋으로 줄인 뒤 드레스를 입어 전면을 가리는 것과는 완전히 대조됐다.
과감한 노출. 황홀한 라인은 남자들을 집중시켰다.
“웃어라, 이사벨라. 변방이라고 우습게 보는 중앙귀족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기회이지 않으냐.”
“······ 제 코가 납작해질 것 같은데요.”
이사벨라는 경련이 올 것만 같은 얼굴 근육을 겨우 진정시켰다.
수도 내의 양장점과 양복점을 돌고 돌아 고른 게 이것이었다. 쉽사리 소화할 수 없는 복장이라 남아있던 옷을 재수선하여 입은 것이다.
‘거짓말. 다 가리고 있잖아!’
이 정도가 수도의 평균적인 파티복이라며 설득당했다.
―요즘 중앙의 영애들은 다 이 정도 노출은 한다는구나. 너무 가리려고만 들었다간 역시 변방의 촌놈들이라며 비웃음을 당할 게다.
이사벨라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같이 온 오라비를 노려봤다.
홀을 둘러보니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거의 모든 여인들은 단이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코르셋으로 몸을 조여 허리와 가슴이 부각되게끔 하는 게 트렌드인 모양인데.
반면 이사벨라의 드레스는 단이 짧다.
퍼진 게 아니라 달라붙는 치마에 가깝다.
움푹 파여있는 부위 덕에 원래부터 몸이 좋지 않으면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그나마 가면무도회가 아니었다면 창피해서 죽었을 것이다.
‘전하께선 아직 도착 안 하신 건가?’
이사벨라는 힐끔힐끔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 특유의 머리색과 눈동자는 의복으로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면 알 수밖에 없을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나저나, 미색이 다들 뛰어나구나. 얼굴을 가렸어도 빛이 나는 것을 보니, 이점만은 분명히 변방과 다르군.”
“이자르 오라버니. 사고치면 안 됩니다.”
이자르는 이사벨라의 오빠였다.
가문을 책임질 차기 후계자인만큼 여러모로 유능한데다 영지민들과의 관계도 좋지만,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는 게 유일한 티였다.
“카르넬 황녀도 아름답구나. 좋다. 이런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다면 가문의 수치일 터.”
“오라버니? 설마?”
“다녀오마.”
이자르가 신이 난 듯, 꽃에 꼬이는 꿀벌처럼 카르넬 황녀에게 날아갔다.
카르넬 황녀도 싫지만은 않은지 금세 이야기 꽃을 피웠다.
혼자 남은 이사벨라는 잠시 현기증이 나는 걸 느꼈다.
부디 이자르가 사고만 치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아무리 여자에 미쳤어도 설마 황녀를 상대로 그 정도 분별은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레이디, 외로워보이시는군요.”
“술 한 잔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이자르가 옆에서 벗어나자 순식간에 남자들이 꼬였다.
이사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의 초대를 받은 이들은 다 한가락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신분이 보장된 장소라고 사교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신분이 보장되어 있으니 더욱 적극적인 경우도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간에.
“권유는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혼자있고 싶군요.”
꺼지라는 말을 최대한 좋게 포장한 것이다.
이사벨라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남성들의 추파를 받았다. 아무래도 옷이 잘못인건지, 지금이라도 갈아입어야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툭.
음악단의 노래가 갑작스럽게 끊겼다.
연회장을 환하게 밝힌 불빛들이 하나, 둘 점멸되어갔다.
“갑자기 분위기 전환?”
“오오!”
미리 황실측에서 준비한 이벤트라 생각한 귀족들이 너나할 것 없이 환호를 내질렀다.
부우우.
음악단원 중 한 명이 나팔을 불더니, 이윽고 웅장하기 짝이 없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사교 파티에서 행진가라니, 색다르군.”
“누가 등장하기에 이런 곡을?”
게다가 행진가였다.
파티에서 행진가라니. 분위기를 다 죽일 생각이 아니고서야 하지 못할 발상이다.
특이하고 색다르다며 귀족들의 칭찬이 자자했지만, 카르넬 황녀의 눈빛은 쉴새없이 떨렸다.
‘내가 준비한 곡이 아니야.’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만으로 구성해놨다.
저런 행진곡은 없었다. 저런 비장하고, 전장에서나 나올 법한 노래를 요청한 적은 하늘에 맹세코 없었다.
감히 황녀의 요청에 반하는 행동을 음악단이 그냥 할 리는 없었다.
정오가 되기 전까지는 자유시간이다. 황제 데우스도 이후에나 자리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이런 변화는 비정상적이었다.
황녀보다 더 위의 존재, 더 무서운 존재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아.
순간, 머리를 해머로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라인하르트······!’
황제를 제외한다면, 한 명뿐이었다.
궁 내에서 자신보다 저들이 더 두려워해야할 존재는.
황태자, 라인하르트.
허나 초대장을 가진 두 남녀가 짝을 이뤄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참석하지 못할 줄 알았다.
만에 하나 참석해도 이런 밝은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게끔 노래하나 불빛 하나까지 세세하게 조명해놓았건만.
그것을 그냥 바꿔버렸다.
자신에게 맞게.
제발 아니길 빌며 연회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라인하르트 황태자 전하?”
“저건 대체 무슨 양식의 양복이지?”
“다크엘프······?!”
시선이 집중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라인하르트의 외관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는 황실에선 결코 볼 수 없던 색이니까.
하물며 그 특유의 분위기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처럼 티가 난다는 게다.
‘이 미친 관심종자 같으니!’
안 그래도 눈에 띄는데 등장곡으로도 모자라 옷까지 튀었다.
다른 귀족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 옷.
대부분의 귀족남성들의 옷은 비슷했다.
주로 상의는 더블렛이나 셔츠 위에 솜이 들고 소매가 넓은 외투를 입었다.
하의는 호박을 연상케하는 펑퍼짐한 바지에 부츠를 신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 위에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자 보석이 달린 단추 따위를 늘어놓았다. 진귀한 보석으로 주렁주렁한 목걸이를 차는 것도 과시의 일부분이었다.
제복을 입은 귀족들도 있지만, 색감의 차이일뿐 디자인은 대동소이하였다.
하지만 황태자 라인하르트가 입은 옷은 다르다.
셔츠 위에 검은색 통의 정장. 정장의 가슴팍이 라인에 따라 접혀있고,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
하의 역시 검은통의 발목까지 올만큼 긴 바지였다. 화려함은 없지만, 무릎라인을 잡아주어 담백하면서도 깔끔한 멋이 있었다.
그 위에 다시 검은색의 망토를 걸쳤는데 어깨부분의 검은 털들이 분위기를 잡아주니, 마치 혼자서만 다른 세상에서 온 느낌이었다.
저런 양식의 옷은 카르넬 황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깔끔하잖아······?’
주렁주렁 달린 보석도 없고, 목걸이도 없다.
과시를 위해 무언가를 더 덧대지 않아서 도리어 사람에게 주목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저런 옷을 입었다면 비웃었을 것이다.
화려함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옷이 뭐가 멋있느냐며 혀를 찼을 테다.
하지만 상대는 황태자였다. 절대로 비웃을 수 없는 존재가, 일반 귀족들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뿐만인가.
‘다크엘프라니?’
마치 인어 같은 은빛의 드레스를 입고 라인하르트의 옆에 나타난 여자.
뾰족한 귀와 피부는 분명히 다크엘프였다.
멸족 직전의 다크엘프는 은빛의 비늘 같은 것을 덧댄 몸에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안 그래도 신비한 종족이 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드레스를 입자,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풍겼다.
카르넬 황녀가 이를 갈았다.
녀석이 등장한 순간, 주인공이 바뀌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인식이 아니라 정말로 라인하르트의 데뷔식이 되어버렸다.
평범한 가면을 쓰고 있다지만 그가 라인하르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카르넬 황녀는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기어코 참석했군요, 라인하르트 전하.”
“가면무도회일 텐데, 내 정체를 알리면 안 되지 않느냐?”
노래까지 바꾼 놈이 뻔뻔하기까지 했다.
카르넬 황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누구시죠? 저는 다크엘프에게 초대장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만.”
초대장을 받은 귀족가문 중에 다크엘프 여식이 있는 집안은 없었다.
당연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설령 있더라도, 라인하르트와 짝을 지으려 하겠는가.
“설마,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노예를 데려온 건 아니겠죠?”
그러니 존재한다면 그것은 노예일 것이다.
제국의 법은 노예를 금지시켰지만, 귀족들은 알게모르게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다크엘프라면 그중에서도 최상급이다.
성 한 채 값이라도 살려고 하는 귀족들이 줄을 설 정도로.
법을 어겨가며 노예를 귀족영애로 둔갑시켜 데려왔다.
아무도 그에 대해 책을 잡지 목할 거라 생각했나본데, 카르넬 황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황태자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미친 황태자가 진짜로 미쳐버렸다며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었다.
“왜 대답이 없죠? 정곡을 찌른 건가요?”
짝짝짝!
그때였다.
누군가가 정적을 깨고,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허허. 아렐, 못 알아볼 뻔했구나.”
그 목소리를 듣고 카르넬 황녀는 굳어버렸다.
‘페, 페르세포 대공?’
이 특유의 간지러운 목소리는 페르세포 대공이 분명했다.
모든 귀족을 통틀어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 말이다.
귀를 가리는 모자를 쓰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써서 못 알아봤다.
이윽고 가면을 벗은 페르세포 대공이, 황녀를 향해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오래전에 제가 들인 아이입니다, 황녀님.”
“······.”
어지러웠다.
눈앞이 빙빙 도는 것 같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페르세포 대공에게 자식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러니까, 양녀라는 소리인가?
설령 양녀라도 대공이 들였다면 귀족이다.
그런데 ‘노예’ 운운을 해버렸으니······.
‘망했다.’
카르넬 황녀의 얼굴근육이 쉴 새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페르세포 대공은 어느 귀족에게나 존댓말을 사용하기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권위를 세워준다’고 착각한다면 큰일이다.
도리어 존댓를 함으로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자신의 권위로 착각하고, 무례하게 굴면 내일은 없어진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페르세포 대공도 다크엘프였다.
지금 자신의 발언은 ‘다크엘프는 모두 노예’라고 말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페르세포 대공의 양녀라고?”
“그 양녀를 왜 라인하르트 전하가 데려온 거지?”
귀족들도 패닉에 빠졌다.
페르세포 대공의 양녀를,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짝으로 데려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둘이 손을 잡았다?’
‘페르세포 대공이 황태자의 편을 드는 건가?’
‘페르세포 대공은 중립 아니었어?’
‘후계구도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귀족들의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중립을 선언한 거인이 지금 라인하르트와 함께 있었다.
모두가 버리는 패라고 여겼던 황태자의 존재감이 단번에 커졌다.
“죄, 죄송합니다, 대공. 제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결국 카르넬 황녀는 꼬리를 내렸다.
더 덤볐다간 성인식이고 뭐고 오늘이 인생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발언은 충분히 페르세포 대공을 거슬리게 할 수 있었고, 만약 그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황실은 황녀를 축출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그럴 순 없어!’
차라리 카툴루 왕국의 두꺼비 같이 생긴 왕자와 결혼하는 게 행복했다 생각할 정도로 오지에 팔려나갈 운명이 되리라.
“아닙니다, 황녀님. 그보다 가면무도회를 망쳐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비밀을 전제로 하는 게 가면무도회다.
하지만 페르세포 대공은 가면을 벗었다.
“괜찮습니다. 괜찮고 말고요.”
카르넬 황녀는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만 숙인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원점으로 되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 라인하르트 전하, 제가 잠시 눈이 삔 모양입니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초대장을 보낸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라인하르트에게도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옆의 영애에게도.
이만한 굴욕은 없었다.
자신이 성인이 되었음을 축하하고자 모인 자리에서, 잘못을 빌고 있다니!
“눈이 나쁘면 안경을 써라, 황녀.”
“예······.”
살다살다 라인하르트의 눈치를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윽고 라인하르트는 시선을 돌렸다
“대공, 술 한 잔 하시겠소?”
“좋습니다, 전하.”
순식간에 홀로 남은 카르넬 황녀는 몸만 부르르 떨뿐이었다.
*
새삼스럽지만 말피엘을 욕하던 그때가 다시 떠올랐다.
미친 관심종자라고 욕할 때가 엊그제같은데, 이제는 내가 그 자리에 섰다.
허나 기분이 나쁘진 않다.
자리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가 만들어주길 바란다면 영원히 제자리일 수밖에 없다.
“놀랐습니다. 정말로 아렐을 데려오실 줄은.”
술잔을 나누며, 페르세포 대공이 말했다.
선물이라고 줬더니 짝을 맞춰 데려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평생을 갑옷만 입던 아렐이 드레스를 입을 줄이야.
‘고집있는 녀석을 어떻게 다룬 건지.’
아렐은 외골수적인 고집이 있었다.
선물로 줬다한들 쉽게 다룰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친 말 같은 녀석을 고작 며칠사이에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
“대공의 양녀라면 다른 귀족영애들보다 더 값어치 있는 존재이지. 놀랄 게 무엇이오?”
“······ 다크엘프 아닙니까.”
말을 하면서도 입이 썼다.
다크엘프는 인간이 아니다.
대륙의 주인이 된 인간들은, 그런 다크엘프를 노예처럼 부렸다.
가뜩이나 숫자가 적은 다크엘프가 살아남기 위해선 더 외진 곳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페르세포 대공은 그 인식을 바꾸고자 인간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대공인 그가 권력을 쥐고 200년이 지났음에도, 인간사회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쟁 이후 페르세포 대공은 독립하려 했지.’
지금도 페르세포 대공의 영지는 공국과 비슷한 취급을 받지만, 아예 따로 독립을 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숨겨둔 다크엘프 군단을 일으켜, 페르세포 대공은 제국과 완전히 다른 노선을 탔음을 세계에 공인했다.
독립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말피엘을 제거해주겠다며 내게 제안해왔다.
결과적으로 그게 그가 멸망한 근본적인 이유였지만.
덕분에 내가 죽는 게 한참 미뤄졌으니 나의 입장에선 은인과도 같다.
말피엘과 가장 격렬하게 주고받은 이들 중 하나가 페르세포 대공이었으니.
‘한 번은 죽이기 직전까지 몰고갔다고 들었다만.’
말피엘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었을만큼 대공의 숨겨진 힘은 대단했다.
당연히 그가 독립하려는 이유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같은 인간도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오. 하지만 ‘인간’이라 불리는 이유는 서로 같은 사고를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지. 다크엘프라고 다를 건 뭐겠소?”
“위험한 사고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절대로 황제에 즉위하실 수 없을 겁니다.”
페르세포 대공이 충고했다.
다크엘프 또한 인간이다.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천 년 제국의 역사상 어느 황제도 다크엘프를 인간으로 규정짓지는 않았다.
그것은 200년 전 여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간사회에 일어날 파장을 걱정해서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반대할 게 뻔했고,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게 뻔한 생각이었다.
저런 사고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마음대로 생각도 못한다면, 황제가 무슨 소용이겠소? 걱정도 많군.”
확실히 미친 황태자라 불렸던 이유는 알겠다.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의 앞이니 하는 빈말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다크엘프니까.
맞장구를 쳐주는 것일 테지. 그런 경우는 많이 겪고 봐왔다.
“잠시 춤을 추고 와도 되겠소?”
“누구와 말입니까?”
“당연히 아렐이지. 함께 왔으니 춤 정도는 춰야하지 않겠소?”
“······!”
단순히 데리고 입장만 한 것과, 사교계의 데뷔에서 처음으로 함께 춤을 추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무게였다.
천천히 아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은 아렐의 눈동자가 다시금 흔들렸다.
춤을 춰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내게 몸을 맡기면 된다. 어려운 춤을 추진 않을 테니, 걱정말거라.”
나는 천천히 아렐을 이끌고 연회장의 중심으로 갔다.
춤은 과거에 질리도록 춰봤다. 사교에서 보이는 춤 정도야 이미 끝장을 본지 오래다.
음악소리에 맞춰 아렐을 리드하며, 조금씩 스텝을 밟아나갔다.
“호흡에 집중해라. 검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게다.”
아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귀족들이 비켜나며 둥근 원이 만들어졌다.
‘황태자가 춤을?’
‘저건 왈츠 아닌가. 그런데 일반적인 왈츠는 아닌 듯한데······.’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거운 행진곡이 끝나자, 밝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에 맞춰 왈츠를 추고 있다. 숙련자도 추기 힘든 춤을 곡의 음에 맞춰서. 심지어 약간의 변주마저 하여 상대를 리드하고 있었다.
이쯤되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미쳤다고 하지 않았나?’
‘저게 어딜 봐서 미친 황태자라는 거냐.’
‘멋있군.’
남자가 봐도 멋이 있었다.
다름을 어색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있게 치고나가는 기백은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복장과도 잘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사벨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 잘 어울리네.’
*
폭풍 같은 여운이 지나가고, 연회장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아렐이 자리했다. 초보자가 이정도면 훌륭했다.
짧게 칭찬하고 나는 시선을 돌렸다.
연회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 시선을 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제로의 관리자권한이 4등급으로 격상하며 모든 사람들의 스캔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레벨이었다.
무력의 정도를 수치화한 이것으로 강함과 약함을 어느정도 구분해낼 수 있었다.
이곳 연회장에 모인 모두의 머리 위에도 마찬가지로 숫자가 떠있었다.
【Lv. 115】
그리고 그 중 한 명.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자의 머리 위에, 무려 세 자리의 숫자가 떠올라 있는게 보였다.
동시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피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분명한 ‘적의’를 읽었다.
‘용병왕 카르발.’
나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공교롭게도 황녀의 이름과 비슷한 용병왕 카르발이 바로 저 자라는 것을.
―내가 죽이지 못할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카를로스 대공이 고용한 최강의 용병.
죽고 죽이는 싸움이라면 무패를 주장하며, 단순 암살의 임무마저도 성공률 99%를 자랑하는 희대의 용병이자 암살자였다.
나도 그가 검을 쓰는 장면은 여러번 보았기에, 실력에 의심은 없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가 왜 내게 적의를 보인 걸까?
이곳은 어떻게 들어온 것이며, 지금도 카를로스 대공의 밑에서 일을 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물론 위의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는 과거, 황제 암살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 때문이었다.
< 황녀의 성인식(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