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넬 황녀는 자신이 떠올린 묘안에 자화자찬하는 중이었다.
‘여자 귀족 중에 누가 라인하르트랑 짝을 이루겠어.’
세상의 절반이 여자라지만 라인하르트와 짝을 이루고픈 여인은 없었다. 특히 귀족 중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라인하르트의 광증을 모르는 귀족은 없었으니.
황태자의 짝이 되는 건 영광스러운 게 아니라 오물을 뒤집어쓰는 것과 같았다. 찬란하게 빛나야하는 사교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하고싶은 여자는 없는 법이다.
당연히, 라인하르트는 조건에 부합하지 못해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황녀님. 오늘도 너무 아름다우세요~”
“이토록 화려한 오찬이라니,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족가의 영애들을 모아 오찬도 벌였다.
진귀한 디저트와 티를 대접하자 영애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자고로 달콤한 디저트를 싫어하는 여인은 없었다. 오죽하면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면 달콤함이 가득한 언덕으로 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제국은 모든 물류가 모여드는 지상최대의 시장이었고, 황실은 그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최상급의 재료만을 사용했다.
싱싱하고 값비싼 재료로 만드는 게 맛이 없을 리 없겠지만, 케이크나 파이를 굽고 만드는 이들도 모두 세계적인 재빵 장인들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자, 녹기 전에 먼저 드실까요?”
카르넬이 자애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작은 컵의 가림막을 열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가려진 컵의 내부가 공개되자 영애들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어머, 아름다워라.”
“이렇게 몽글몽글해보이는 아이스크림은 처음이에요!”
최근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아이스크림’이 한창 인기를 모으는 중이었다.
부드러운 우유와 맛을 내는 재료를 얼려, 그릇에 퍼담는 음식이다.
입안에 머금으면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아이스크림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보통 얼음 위에 과일과 꿀을 얹어먹는 정도가 다였다. 제대로 된 레시피로 개발되어 수도에 보급된 건 최근의 일.
“으음!”
“어쩜 이리 부드러울 수가!”
맛을 본 영애들은 행복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오직 제국의 수도에서만 맛볼 수 있으나, 이 정도로 고급지게 완성하여 먹을 수 있는 건 아직 황실뿐이었다.
처음 겪는 제대로 된 풍미.
영애들의 정신 놓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단번에 비워낸 영애들은 안타까운 눈빛을 머금었다.
탁.
카르넬 황녀가 손뼉을 치자, 궁중요리사들이 나와선 아이스크림을 더 얹어주었다. 영애들의 눈빛에 행복함이 스쳐지나갓다.
“입장에 갑자기 조건이 생겨서 놀라셨을 거예요.”
“남녀가 짝을 이뤄야한다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황녀님?”
“예. 다들 짝은 찾으셨나요?”
“가족이어도 괜찮은 거죠?”
“그럼요.”
귀족이기만 하면 가족도 상관없다.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내건 조건이다. 굳이 진짜 피앙세를 데려올 필요는 없었다.
그다지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당장 짝이 없더라도 다 수도에 모여있는 상황이다.
초대받은 이들끼리 서로 짝을 맞추는 게 어렵진 않으리라.
오직 한 사람, 라인하르트를 제외하고.
마침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녀님. 라인하르트 전하께서도 이번 성인식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죽었다.
라인하르트. 그의 참가를 달가워하는 이는 없으리라.
온갖 괴소문이 가득한 그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지만 등장하자마자 리겔 왕국의 왕자를 초주검으로 만들었다.
시원해하는 이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귀족영애들의 입장에선 과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고.
“같이 입장할 짝을 찾는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아······.”
황녀의 말을 듣고, 영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짝을 찾지 못하면 황태자라도 입장은 불가능하다.
지금 황녀는 영애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 누구도, 그의 짝이 되어선 안 된다고.
황녀의 메시지를 못 알아들은 영애는 없었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황녀와 적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리는 카르넬 황녀에게 밉보였다간 영영 사교계에는 발을 못 붙일 수도 있었다.
이는 대부분의 귀족영애들에겐 사형선고와 같았다.
지루하고 따분한 영지에서 벗어나 일탈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사교계인 탓이다.
황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주인공 자리를 빼앗길 순 없지.’
기다리고 기다린 인생 최대의 순간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인하르트에게 빼앗길 순 없었다.
“그런데 최근 황태자 전하께서 수도로 나오셨다고 들었어요. 양복점에 갔다고 했나?”
“아, 월계수 양복점이요?”
영애들의 이야기를 듣고 황녀의 표정이 재차 굳었다.
수도로 행차했다니.
게다가 월계수 양복점?
처음들어본다.
황실 재단사보다 뛰어난 실력의 재단사라도 있는 건가?
“그 이야기,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야기를 꺼냈던 영애가 어깨를 으쓱했다.
“평민 재단사가 주인으로 있는 허름한 가게라고 하네요. 그곳에 황태자 전하께서 발걸음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영애들이 맞장구를 쳤다.
“달빛 양복점의 오스컬이 훨씬 실력이 좋을 텐데, 이상하긴 하네요.”
“오스컬은 재단 실력만으로 준남작의 작위를 얻은 사람이니까요. 실력은 확실하죠.”
“평민 재단사의 옷을 입고 파티에 가는 건 상상도 하기 싫어요.”
오스컬은 유명한 재단사였다.
황실에까지 영향력을 미칠만큼 그의 옷은 유행을 선도한다.
수도에서도 어지간한 고위층 귀족이 아니면, 그의 옷을 입을 수조차 없다. 직접 재단하여 맞춤옷을 제작하는 건 황실의 사람조차도 순번을 기다려야 할 수준이었다.
옷 한필이 전투마 한 마리 값이다.
제대로 된 전투마 한 마리의 값은 수도의 저택 하나 값과 같았다.
‘굳이 이름 없는 재단사를 찾는다?’
이상하다.
황실의 유능한 재단사들을 놔두고, 평민이 운영하는 가게에 몸소 행차했다
‘옷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찾은 거겠지.’
애써 부정했다.
양복점을 찾았다는 건 짝이 있다는 의미인데, 그녀가 알기로 초대한 귀족영애 중 라인하르트의 짝이 된 이는 없었다.
이곳에서도 못을 박았으니 더더욱 없을 예정이다.
“이사벨라. 준비한 디저트가 입에 안 맞나요?”
황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맞은편의 이사벨라에게 말했다.
비록 수도와는 거리가 있지만 영지 규모가 큰 변경백의 영애다.
무엇보다 얼마전 라인하르트와 오찬까지 했던 유일한 인물이니, 황녀로선 더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디저트를 탐하던 이사벨라의 손이, 라인하르트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기점으로 멈췄다.
이사벨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배가 불러서요. 입에 너무 맞아서 탈이었나봐요.”
“역시 검을 쓰는 자답게 소식을 하나보군요.”
“아······.”
이사벨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기사가 되겠다고 가문에 엄포를 놓았지만 그게 벌써 황녀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검이요? 레이피어가 아니라?”
“검은 남자들이나 다루는 흉악한 무기 아닌가요?”
영애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화의 시대.
레이피어는 몰라도 검은 남자나 다루는 흉악한 무기라는 인식이 강하게 잡혀있었다.
이사벨라가 뜸을 들이며 답했다.
“기사를 동경해서요.”
가문에서도 확정되지 않은 일이다.
귀족의 영애가 기사가 된다는 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을 것이다.
실력이 부족한 자신이, 바깥에서 일을 그르칠 순 없는 노릇.
황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손뼉을 치며 모두의 주의를 모았다.
“이사벨라가 기사를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그런 의미에서 그럼 오찬이 끝나면 ‘피닉스 기사단’을 견학해볼까요?”
“아! 라우넬 황자님의 기사단, 맞죠?”
“혹시 라우넬 황자님께서도······?”
단번에 주제가 바뀌었다.
라우넬 황자가 누구와 함께 성인식에 참가할 것이냐가 영애들에게 있어선 가장 뜨거운 감자였기 때문이다.
*
앤드류의 눈 밑에 그늘이 졌다.
혼자선 3일 밤낮을 재단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제대로 된 옷 한 벌을 재단하는 데에도 일주일은 걸리는 게 기본이다.
재료도 부족하니 넉넉하게 두 달은 잡아야 두 벌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은 황태자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황실로 옮겨와, 다수의 재단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최상급의 재료로 옷을 완성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문제는 디자인이었다.
옷을 짜고 만드는 것보다 진짜 재단사의 실력은 구상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걱정은 없었다.
‘설계도면은 머릿속에 있다. 오랫동안 그려왔던 디자인을 완성시키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 아닌가.’
오랫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서 도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디자인.
황태자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는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할 터.
‘약간의 변형은 필요하겠지. 맞춤형이니까 내 욕심만 담을 순 없다.’
중독자였던 그가 술을 끊었다.
길게 자란 덮수룩한 수염을 밀어내고, 긴 머리를 묶은 채 재단을 시작했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으로 수천, 수만 번 되뇌며 옷과 황태자를 일치시켰다.
‘옷은 누가 입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누가 입느냐. 황태자에게 입히려면 그에 맞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자신의 욕심만 밀어붙이면 도리어 옷은 죽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그 자태에 걸맞은 디자인은 좀처럼 구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렐 역시 마찬가지다.
다크엘프의 옷이라니. 생전 처음 도전해보는 영역 아닌가.
“우리보고 평민 재단사를 따르라니······.”
“아무리 전하의 명이라지만 너무하는군.”
물론 황실의 재단사들이라고 불평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령이 떨어진 이상 따라야 한다.
아무리 실력이 없어 형편없는 물건이 만들어져도, 그 책임은 앤드류에게 있다.
그러나 앤드류가 재단을 지휘하고 시작하자 황실 재단사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손이 왜 저렇게 빨라?”
“저러다 손 다치면 어쩌려고······!”
빠르다.
재단의 실력이 속도가 전부는 아니라지만, 재단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손과 손의 감각이었다.
다칠 수도 있기에 재단을 할 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앤드류는 다른 재단사보다 재단속도가 족히 다섯배는 빨랐다.
과감하다. 그 성격이 디자인에도 고스란히 드러나있었다.
그렇게 열 명의 재단사가 달라붙어, 고작 3일만에 두 벌의 의류를 전부 완성시킬 수 있었다.
“허.”
“이걸 뭐라고 해야할지.”
“대단하긴 하군.”
의류를 완성한 재단사들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재단사로서의 실력은 그들보다 앤드류가 위였다. 평민이면서도, 그 감각과 속도 하나만큼은 타고났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성 된 디자인은 지금의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이 옷을 소화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마침내 완성된 의류를 들고, 앤드류가 라인하르트를 찾았다.
꿀꺽!
평생에 있어 이 정도로 긴장한 적이 있었던가?
“완성 되었습니다, 전하.”
“흐음.”
천천히, 완성된 의류를 살폈다.
재단의 솜씨는 두말할 것 없다. 완벽했다.
고작 3일만에 완성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나 그보다 중요한 건 디자인이다.
어딘가 익숙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옷.
‘약간 변형시켰군.’
과연.
왜 익숙한가 했더니, 이 디자인으로 앤드류는 처음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다시 없을 불후의 명작이라 칭송이 자자했던 그것이다.
다만 디자인은 내게 맞게 약간 변형시킨 모양이다.
하지만 아렐의 옷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훌륭하다.’
옷은 이미지다.
색깔이고, 메시지였다.
특히 황족의 옷은 더더욱 그렇다.
많은 이들이 내 옷을 보며 영향을 받을 것이다.
거침없이 나아갈 내게 있어서 모두에게 보이는 옷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었다.
“앤드류.”
“예, 옙!”
“앞으로는 내 전속 디자이너로 지내도록. 보상은 넉넉하게 해주마.”
전속의 디자이너. 재단을 포함한 내 모든 스타일을 맡긴다는 의미였다.
장인의 실력은 죽지 않았다.
도리어 지금이 전보다 더 좋은 것도 같다.
제약없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기회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만하면 황실 재단사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나는 가만히 앤드류의 얼굴을 보았다.
해탈한 표정으로, 지긋이 눈을 감고 있는데.
“선 채로 기절했군.”
아무래도 기절한 것 같다.
*
궁 내의 거대한 홀을 통째로 사용한 연회장.
끝이 보이지않을만큼 거대한 홀로 속속들이 귀족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가면을 쓴 채 한껏 멋을 뽐내고 서로를 탐색한다.
귀족의 성인식은 기본적으로 가면무도회였다.
특수제작된 초대장을 보여주고 입장하면,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 춤을 추는 등 자유로움이 기본전제가 된다.
초대된 귀족만 삼백이 넘는다.
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축하하고자 대륙 전역의 귀족들이 너나할것없이 찾아온 것이다.
“휘유.”
“설마 황녀님이신가? 소문보다 더······.”
“얼굴을 가렸는데도 아름다움이 흘러넘치시는군.”
모두가 한껏 멋을 부린 가운데도 튀는 사람은 있기 마련.
나비모양의 가면을 쓰고 화려한 자색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 카르넬 황녀는 단번에 시선의 중심이 되었다.
자정이 될 때까지 그녀 역시도 즐길 생각이었다.
워낙에 독보적인 존재감이라 바로 들켜버린 건 좀 아쉽지만.
자정이 되면 성인이 된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마지막 유희인 셈이다.
‘나보다 눈에 띄는 사람은 없네, 역시.’
아직 모두가 도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이후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일년 전부터 달빛 양복점의 오스컬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드레스와 가면이었다. 자색의 신비한 색감과 알알이 박힌 자수정은 시선을 잡아끌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보석들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코르셋과 함께 안 그래도 좋은 몸매를 더 부각시키니 주목받을 수밖에.
‘완벽한 것도 문제야. 남자들이 다가올 생각을 못하잖아?’
코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카르넬 황녀였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웅성웅성.
“누구야, 누군데?”
“와······.”
“둘 다 장난 아닌데?”
< 황녀의 성인식(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