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50화 (50/146)

황제, 데우스는 고민에 빠졌다.

“라인하르트 황태자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요구합니다.”

“리겔 왕께선 해당 사안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리겔 왕국의 귀족들이 찾아와 항의했다.

기회를 줘보자고 생각한 지 불과 하루 만에 라인하르트가 사고를 친 것이다.

황룡기사단을 부활시키고, 정령 검을 뽑았으니 ‘자리 굳히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플릭 왕자였다.

리겔 왕의 둘째 왕자인 플릭의 혀를 두 동강 내버렸다.

그도 모자라 바닥을 질질 끌어, 궁 밖으로 쓰레기처럼 내동댕이쳤다.

수많은 귀족과 평민들이 이를 보았으니 왕자의 명예 또한 곤두박질친 것이다.

‘광증이 아직 다 낫지는 않은 건가?’

예전이라면 강제로 황룡궁에 칩거시켰을 테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데우스는 황태자와 황자들을 제대로 경합시킬 생각이었다.

카를로스 대공과의 거래로 인한 주먹구구식 책봉이 황실에 얼마나 큰 반항을 샀는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제대로 능력을 보이고, 황자들과 경합하여 결과를 낸다면 힘을 보태줄 생각도 하는 중이었다.

물론 이 모든 가정은 라인하르트의 광증이 나았다는 걸 전제로 한다.

하지만 크로프트의 말이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자신의 앞에서 기죽지 않고 의견을 피력하던 라인하르트의 모습도 떠올랐다.

만약, 다른 황자가 같은 일을 저질렀다면 그는 어찌 했을까.

“황실의 재산을 감히 궁 내에서 훼손한 죄, 제국의 황태자를 모욕한 그 죗값을 리겔 왕이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게냐?”

“그, 그게 아니라 왕자님을······.”

“짐 또한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목을 잘라내도 성치 않을 일을 고작 그 정도에서 끝낸 황태자의 자비에 감사해야할 터.”

리겔 왕국의 귀족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황태자를 두둔하며 감싸는 모습은 이례적이었다.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도리어 목을 자르지 않은 황태자의 자비에 감사하란다.

“한 번 더 같은 일로 소란스럽게 군다면 리겔 왕국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것이다.”

“······!”

귀족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리겔 왕국은 제국과의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수교가 끊기면 손해를 보는 건 리겔 왕국이지 제국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화의 수호자라 불리는 데우스가 이 정도로 강경하게 나올 줄은 그들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직감한 귀족들이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아, 아닙니다, 폐하. 다시 생각해보니 라인하르트 전하의 아량이 감격스러울 지경입니다.”

“리겔 왕께서도 그 정도의 처분으로 끝내주신 걸 필히 고맙게 여기실 것이옵니다.”

*

“······ 언제까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닐 셈이냐?”

일정을 끝마치고, 궁으로 복귀하는 도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아렐은 아무말 없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채로.

한 번도 벗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다크엘프는 화장실도 안 가는 건가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

대답이 없다.

무려 소드마스터의 호위.

든든해야 정상이다.

허튼 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용갑주로 막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크로프트가 자리에 없는 지금 지근거리에서 그녀를 막을 존재는 없었다.

기사단 전원, 혹은 에디스가 있어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수준.

그럼에도 나는 그들 모두를 물렸다.

지금 내가 이곳에 아렐과 둘만 있는 건 의도한 것이다.

“네 보호가 필요할만큼 내가 약해보이더냐?”

“예.”

이번만큼은 즉답이었다.

아렐은 지금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내가 약해서, 강한 자신이 보호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크엘프의 습성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고양이처럼 다크엘프는 공동육아를 한다. 자신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새끼를 보면 보듬고 지켜주는 것이다.

지금 아렐의 행동은 새끼를 대하는 어미고양이의 자세였다.

혹시 몰라 확인했으나 답을 듣고 확신했다.

제국의 황태자를 새끼고양이 취급하다니.

페르세포 대공의 영향인가, 아니면 그녀 자체의 의중인가.

‘나를 지키려고 강력한 호위기사를 선물로 붙였다.’

강력한 소드마스터. 심지어 아직 다 성장한 상태도 아니다. 끝없이 먹어치우며 강해질 괴물을 내 옆에 둔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단순히 목을 따기 위해서라면 다른 방법이 많을 것이다.

감시하고자 했다면 사람을 매수하면 그만이다.

아니, 이미 궁 내에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사람은 차고 넘칠 터.

정말로 나를 지키려고, 내가 누군가에게 죽는 걸 방지하고자.

페르세포 대공은 내 옆에 아렐을 두었다.

‘나 자체를 지켜야할 이유가 있다. 차기 황제 같은 이유가 아니라. 내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아렐의 적의 없는 대답.

진심으로 나를 새끼고양이처럼 대하는 태도.

이건 연기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아렐은 그다지 연기를 잘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궁에서 살아남기 힘든 타입이다.

이런 우직한 타입의 아렐을 붙여준 건, 오직 나만을 지키는데 모든 신경을 쏟기 위함이리라.

‘정령을 깨우는 건 눈가림이다. 다른 의도가 있다고 봐야겠지.’

내가 정령을 소환하는 것을 보며 페르세포 대공은 연기를 했다.

보상을 약속하고 부탁을 하였다.

과거 전쟁 때의 그를 알지 못했다면 깜빡 속아넘어갔을 것이다.

정령 자체는 눈속임이다.

정령을 빌미로 내 가치를 시험하고 있다.

그 가치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어서 절대로 허투루 죽으면 안 된다.

아마도 아렐은 페르세포 대공의 의도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비밀은 적게 알수록 좋은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아렐의 보호를 받지 않아도 될만큼 강하다는 걸 일깨워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네가 소드마스터이기 때문인가?”

그제야 약간의 반응이 있었다.

침묵은 했으나 미묘한 떨림마저 막아내진 못했다.

역시 연기를 잘하는 타입은 아니다.

어찌 알았느냐는 눈빛이지만 내게는 보였다.

【Lv. 98】

증강현실 딥드림이 현실로 이전됐다.

레벨 80정도가 소드마스터로 분류됐는데, 98이면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상당한 강자다.

100을 넘는 건 크로프트와 북방의 1군주 정도였다.

그 둘을 제외하면 내가 본 자들 중에선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은 강자는 제법 많다.

신성교의 ‘삼성좌’나, 수르트만 왕국의 ‘천랑’······ 페르세포 대공의 다크엘프 군단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일어나자 숨겨져있던 강자들이 대거 튀어나온 것이다.

대영웅, 뇌신 말피엘도 그 중 하나였으니, 말은 다했다.

어쨌거나.

나는 사이오닉 에너지를 발생시켰다.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곧 내 주변으로 미리 준비해둔 검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 오러?”

아렐이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오러는 소드마스터의 증표다. 하지만 오러는 눈에 보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데 검이 떠올랐다.

그럼 마법인가? 무영창?

타인의 흔적, 또 다른 마나의 흐름도 느끼지 못했다.

이 주변에 있는 건 그녀와 라인하르트뿐이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소드마스터,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놀랐느냐?”

···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라인하르트 황태자의 실력은 그녀가 보기에도 볼품이 없었다.

제법 단련한 흔적은 있지만 강자 특유의 느낌은 받지 않았다.

“나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호위를 자처하는 꼴이 우습지 않느냐?”

고작 그 정도로 자신의 호위를 자처하냐는 비웃음 가득 담긴 말.

아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힘이라니.

다크엘프는 상대의 진심을 구분할 수 있다.

더 심화하면 상대의 생각조차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읽히지 않는다.

자신보다 강한 강자이기 때문에?

심연같이 깊은 눈.

그것은 연기할 수 없는, 진정으로 강자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이다.

고로 거짓이 아니다.

“호위는 필요 없다. 그저 지배당할 뿐인, 자신의 생각조차 없는 인형은 더더욱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

박대하며 몸을 돌려 떠나갔다.

아렐은 이번만큼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발이 떼지지 않았다.

챙! 채엥!

바닥에 떨어지는 검들만을, 주먹을 쥔 채 쳐다볼 뿐이었다.

*

다음날.

문을 나서자, 입구에 아렐이 있었다.

새벽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이 아렐이었던 모양이다.

호위는 필요없다고 한 게 어제였거늘.

가만히 바라보자, 아렐이 말했다.

“황룡기사단에 입단하겠습니다.”

오호라.

이틀간 들었던 아렐의 말 중 가장 긴 문장이었다.

나름대로 생각이라는 걸 한 듯싶었다.

단순 호위가 아니라 기사단에 입단하여 보좌하겠다는 의미다.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돌아갈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온 건 의외다.

‘자기 의지가 있기는 있었군.’

생각 없는 인형을 받은 게 아니었나보다.

가만히 턱을 쓸었다.

꺼림칙한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만한 강자가 황룡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한다면 그것은 선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필요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는데도 찾아왔다는 건 자신이 단순히 인형이 아닌 쓸모있는 존재임을 어필하는 것과 같았다.

내게 쓸모있는 존재가 되겠다는데 쳐내는 것도 이상하다.

“견습부터 시작하라. 차근차근 올라와서 증명한다면,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굴리다보면 본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크로프트가 직접 관리한다면 만에 하나의 상황에서도 대처가 가능하리라.

“··· 감사합니다.”

아렐이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정말로 안 더운가?

배뇨현상은 둘 째 치고, 땀이 차면 습하고 더울텐데 갑옷은 절대 벗지 않는다.

투구 위로 드러난 얼굴에도 땀 한 점 없다.

제로가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A.I나 기계도 아닌 것 같은데.

옛날 이야기에 전승되는 것처럼 다크엘프는 정말 요정이란 말인가?

“전하. 카르넬 황녀께서 편지를 남기셨습니다.”

“읽어보마.”

제르민이 넘기는 편지를 받아, 내용을 읽었다.

뭐라뭐라 길게 적혀있는데 요약하자면 엄청 짧았다.

“음.”

“뭐라고 적혀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귀족 남녀로 짝을 이루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하다는군.”

“······ 황녀께서 묘수를 내었군요.”

대놓고 오지말라 할 수가 없으니, 조건을 걸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짝을 맞춰 입장하지 않으면 입장자체가 불가능하게끔.

격에 맞는 남녀가 함께 입장해야 주목될 테니, 내게는 아주 어려운 숙제라고 할 수 있었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나와 함께 입장하고픈 귀족여성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지간히 내가 오는 게 싫은 모양인데.

‘어찌한다.’

황제와의 거래를 무시할 수가 없어 반드시 참가해야만 했다.

“···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아렐이 한 발자국 물러나며 물었다.

“아렐. 너는 페르세포 대공의 양녀이지 않느냐?”

“명목상은··· 그렇습니다.”

페르세포 대공의 양녀라면, 출신이 어쨌든 귀족이다.

인간이 아닌 여성의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조건은 없었으니.

“제르민, 마차를 준비하거라. ‘월계수 양복점’으로 갈 것이다.”

“예, 전하.”

“······?”

아렐은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복잡한 눈빛만 보일 따름이었다.

< 황녀의 성인식(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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