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감이 적중했다.
아렐.
멸종직전의 다크엘프이자, 페르세포 대공의 양녀.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지닌 그녀를 선물이라 말한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독이 든 성배다.’
성배다. 하지만 독이 든 성배였다.
과거에는 없었던 행동이다.
애당초 그가 나를 찾아온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는 지독한 실리주의자인 탓이다.
페르세포 대공은 관심 없는 것에 절대로 자신을 낭비하지 않는다.
자신의 시간, 에너지, 심지어 눈길 한 번조차도.
그렇다고 그의 관심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의 관심을 받은 이는 보통 망가지며 파멸한다.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문제지.’
독이 든 성배라는 걸 알면서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굳이 ‘선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것도 십년여만에 다시 만난 나를 보자마자 그리 말했다.
이걸 받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는 완곡한 뜻이다.
완곡이라 했지만, 사실 대놓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웃으며 건네는 선물을 거절하는 건 네가 싫다는 의미와 같았으므로.
그래. 받았다고 치자.
설령 페르세포 대공이 원하는 게 없더라도 그 자체가 ‘빚’이 된다.
200년을 대공으로 지낸 노괴.
황제가 여섯 번 바뀔 동안 그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빚은 내가 황제에 즉위하고, 죽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대대손손 고혈을 짜낼 수도 있다.
그래서 페르세포 대공에게는 빚을 지면 안 된다.
그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도 달랐기에.
그가 다크엘프라는 사실을 잊었다간 그대로 코가 꿰일 터.
“부담되십니까?”
······ 된다.
부담이 안 된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이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내 그릇의 작음을 증명하는 꼴이다.
“이런 선물은 처음이라, 잠시 고민중이었소.”
“무슨 고민입니까?”
“무엇으로 돌려줘야할지 말이오.”
“괜찮습니다. 제 호의로 생각하십시오.”
호의라 말하지만 결국 빚이다.
마음의 빚. 언젠가 그가 마지못해 부탁해오는 걸 들어줄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빚.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결국 그 빚을 받아갈 것이다.
하여 나는 말했다.
“흐음, 단순한 호의의 선물이라 하여도 그냥 받을만큼 내가 염치 없는 놈은 아니오. 그래서 말인데, 내 특별히 다음 ‘사업’에 대공을 포함시켜주겠소.”
“사업······ 이라니요?”
전혀 예상 외의 말이었는지 대공이 살짝 뜸을 들였다.
제국에서 재신이라 불리는 게 그다.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을만큼 넓은 영역에서 돈을 빨아들이고 있는 그에게, 감히 ‘특별히’ 사업안을 제시한댄다.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어이가 없다고 해야할까?
“대륙 남단과 동서를 잇는 대운하를 건설할 생각이오. 내 생각대로 된다면 운송비용과 시간을 절반 이상 줄일 수 있을 게요. 페르세포 대공이 나와 공동으로 진행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테지.”
“······.”
듣고보니 더 가관이다.
할 말이 없을만큼 허무맹랑한 소리다.
운하건설이라는 건 국가사업이다.
제국 전체가 움직여야하는 대공사였다.
대륙 남단과 동서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돈과 시간, 그리고 전쟁이 필요하다.
몰라서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니까 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일개 황태자가 진행하겠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미친 건가?
아니면 미친 척을 하는 건가.
‘후자군.’
자신의 호의를, 마찬가지로 호의로 받아쳤다.
거절할 수밖에 없는 호의 말이다.
일부러 터무니없는 제안을 해서 거절을 유도하다니.
의도적으로 던진 것이라면 상당히 고단수다.
마음의 빚마저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전하.”
“아쉽군.”
아쉽다곤 했으나 내심은 한결 가벼워졌다.
무거운 납덩어리가 가벼운 깃털이 되었으니 일단 한시름은 놓았다.
―페르세포 대공에게는 절대로 빚을 지지 마라. 그것이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가 신발 한 쪽을 사주면 50년 뒤 성을 내놓으라 할 것이다.
그를 표현하는 격언이다.
신발 한 짝도 아닌 한 쪽으로 성을 받아가는 기적의 교환.
제국 황실이라고 피해갈 순 없었다.
오히려 제국의 황실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큰 빚을 진 곳이었다.
현황제가 죽자 황실의 기반 대부분은 페르세포 대공에게 흘러들어갔다.
별 능력도 없었던 내가 황비와 황자들을 손쉽게 숙청할 수 있던 원인이다.
특히 과도하게 빚을 졌던 조세핀 황비는, 모든 친인척이 포함된 가문들이 다 빈털터리가 됐다고 들었다.
‘내가 황제로 즉위하면 대륙을 상대로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걸 예상했겠지.’
국고가 바닥나기 전에 미리 털어간 것이다.
데우스라는 태평성대에서 이자를 최대치로 키우고 수확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가 내게 관심이 없었던 게 나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내게 관심을 가져버렸다.
‘긍정적인 신호로 봐야겠군.’
직접 찾아올만큼의 가치가 생겼다는 뜻일 테니.
그것도 양녀를 선물로 줄만큼 내 가능성을 크게 봤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선물 자체에 의도가 있겠지만.
“정령의 주인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주제를 돌렸다.
선물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것이 본론일 것이다.
“고맙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 검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건 없지.”
“계약을 맺었다면 부르실 수도 있겠지요?”
정령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이점은 굉장히 의외였다.
아무리 장수하는 다크엘프라도 정령은 천 년 전에 사라진 신비.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시피하였다.
후에야 시동어의 존재가 밝혀지긴 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진대.
‘속이는 것도 소용없겠군.’
알고 왔다면 속일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또한 빚이다. 그에게 반대로 빚을 지울 절호의 기회였다.
“칼리번.”
시동어를 외우고 이름을 부르자, 빛의 입자가 내 손 위로 모여들었다.
빛을 인도하는 자라 불리는만큼 그 위용은 절로 감탄이 나온다.
“정말로······ 계약을 하셨군요.”
“그럼 거짓이겠소?”
페르세포 대공의 눈에 잠깐 빛이 스쳤다.
“정령을 깨우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깨우는 방법이라.
나름대로 멀쩡한 상태의 정령무기를 제로가 지배하면 깨어난다.
하지만 멀쩡한 상태의 정령무기도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다 이건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글쎄, 검을 뽑은 것 외에 내가 따로 한 일은 없소만.”
“정령과 계약하며 알아내신 것도 없습니까? 대화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왜 이러는 거지?
페르세포 대공답지 않은 관심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화는 가능하지만, 아직 자유롭진 못하오.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소.”
“그럼.”
페르세포 대공이 아렐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스릉이는 소리와 함께 아렐이 검을 뽑았다.
“이 검 또한, 깨우실 수 있겠습니까?”
붉은색의 저 검.
가운데에 눈이 그려진 저 검이, 무척이나 눈에 익었다.
‘버서커.’
버서커라 불린 다크엘프 기사가 저 검을 사용했다.
그제야 나는 저 여자 다크엘프가 버서커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도륙내어버리는 미친 괴물!
페르세포 대공의 휘하 다크엘프 군단은 비록 그 숫자는 적지만 인간이 세운 무력의 판도를 단번에 뒤집어버릴만큼 강했다.
버서커는 그 중에서도 발군이었다.
지금의 크로프트와 견줄 수 있을만큼.
[해당 ‘비인가 나노머신’의 보안해제를 위한 관리자 권한 등급이 충분합니다.]
[보안을 해제하시겠습니까?]
풀 수 있다.
칼리번처럼 멀쩡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풀어줄 순 없었다.
“당장은 힘들 것 같군.”
“당장은 힘들다는 건?”
“시간을 주면 가능할 것도 같소.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는 한데.”
귀를 기울이는 척 검에 머리를 갖다댔다.
내 연기가 먹혔는지 페르세포 대공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후에 이 검의 봉인을 풀어주신다면, 충분히 사례토록 하겠습니다.”
“노력해보겠소.”
그게 끝이었다.
할 말은 그게 전부였다는 듯, 페르세포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신 전하의 시간을 너무 뺏어먹은 것 같습니다. 황녀의 성인식에서 뵙지요.”
짧게 인사한 그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렐은 그대로 남았다.
‘쉽지않군.’
그야말로 폭풍같은 여운이었다.
차라리 검을 맞대고 싸우는 게 편할 것 같다.
나는 의자에 앉아, 준비된 차를 홀짝이며 마셨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땐 차마 차를 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른 귀족을 대하는 것과 역사의 산증인인 페르세포 대공을 대하는 건 하늘과 땅의 차이다.
‘선물이 버서커라.’
나는 무표정한 아렐에게 시선을 옮겼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인형 같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도륙하던 버서커 답다면 다운 표정인데.
나를 감시하고자 놔둔 선물이자 감시역이리라.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기회이기도 했다.
적은 가까이 두라는 말처럼 페르세포 대공의 의도를 더 확실히 관철할 수 있게 되겠지.
카를로스 대공을 이미 적으로 돌린 이상, 페르세포 대공까지 적으로 돌리는 건 너무 리스크가 큰 행동이었다.
사교계에 데뷔하는 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삶이라는 게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은 거였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후회로 점칠된 과거보단 똥밭을 굴러도 지금이 낫다.
물론 진짜 똥밭을 구르지 않기 위해선, 조금 더 가속도를 내야할 것 같았다.
예컨대 다른 신비나, 숨겨진 보물, 혹은 황궁비고 같은 것들을.
*
‘뭔가를 숨기고 있군.’
궁을 나선 페르세포 대공은 생각했다.
라인하르트가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니.’
그는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인간’이라면 얼마나 강하든, 약하든 모조리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라인하르트의 생각은 읽히지가 않았다.
인간이 아니어서?
아니다. 그는 분명한 황제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라인하르트의 생각은 쉽게 읽혔다.
하지만 지금의 라인하르트는 생각을 읽을 수 없다.
광증이 너무나도 심화되어 생긴 현상일까?
제대로 미친놈의 생각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읽히지 않을 때가 있긴 있었다.
리겔 왕국의 왕자를 처리한 걸 보면 아직 완치가 되지는 않은 듯한데.
게다가.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이 정도로 심장이 뛰는 느낌은 반백년만에 처음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이다.
라인하르트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 힘은 그가 반백년간 느낀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강력했다.
‘이 느낌은······ 넘버즈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과도 같군.’
반백년 전 그는 넘버즈라 불리는 신을 만난 적이 있다.
12주신 중 한 명.
그 압도적인 힘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라인하르트를 볼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12주신과 라인하르트가 관계가 있다면, 아렐의 투자는 아깝지 않다.
정령을 깨운다는 건 주신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뜻이었으므로.
잃어버린 고대의 신비들.
그것을 깨우고 다룰 힘은, 오직 12주신에게만 있는 탓이다.
‘한 번 지켜보도록 하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억지로 발걸음해 만나길 잘했다.
후에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부탁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고, 무슨 보답을 요구해올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물론 그의 호의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기대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그 누구보다도 무서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정말로 12주신의 힘을 이었다면.
‘주신의 힘을 가진 자만이, 다크엘프를 번식시킬 수 있다.’
멸종직전인 다크엘프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직 번식만을 위한 도구, 종마로써.
< 다크엘프 아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