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들었어요?”
“정령의 주인이 황태자였다는 이야기요?”
제국과 수도는 시끄러워졌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졌던 만큼, 이 주제는 평민과 귀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황태자가 검을 뽑았다는 사실은 모두의 공통된 뜨거운 감자였다.
그가 일반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처음이거니와, 등장하자마자 몇 달간 초유의 관심사이던 검을 단박에 뽑아냈으니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 년만에 등장한 정령의 주인이 황태자라니, 쯧쯧.”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황실에서도 난리가 났겠지. 막말로 황태자를 꽁꽁 감춰두고만 있었지 않나?”
“그럼 차기 황제로 황태자가 확정된 건가?”
“그건 아직 모르지. 책봉 때도 온갖 말이 많았으니······.”
황태자로 책봉한 이상, 어지간해서 그 직위가 박탈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누가 봐도 엉성한 황태자였다.
사람들은 모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라우넬이나 카잔이 황태자로 책봉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황태자로 책봉된 건 라인하르트였다.
영석하지도 않고, 나쁜 소문만 가득하던 그가 책봉되자 제국 전역에선 온갖 구설수들이 흘러나왔다.
책봉된 이후에도 라인하르트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하여 검을 뽑은 것이다.
자신을 뽑는 자는 왕이 된다고 앵무새처럼 말하던 게 정령이었다.
“후작님. 정령의 말처럼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보십니까?”
일반시민들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귀족들이었다.
지금까지 황태자에게 줄을 댄 귀족은 없었다.
침몰하는 배.
어차피 황태자의 자격은 박탈당할 거라고 은연중 생각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힘 없는 자격은 독이다.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될뿐이다.
그것을 현황 데우스가 모를 리 없었다.
허나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황태자가 급부상한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나 왕의 증명이라 지껄이던 정령검을 뽑아버렸다.
“단순히 정령의 주인이 되었다고 황제가 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황룡기사단을 함께 부활시킨 건 황태자가 귀족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조심해야할 때다. 황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심상치않아. 줄을 잘못 서면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건 우리의 목이다.”
줄을 갈아타는 건 특히 그렇다.
제국의 중진급 귀족들은 모두 다른 황자와 황비들에게 줄을 대고 있다.
솔직히 황자들보다 무서운 건 황비들이다.
그녀들만큼이나 현재의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줄을 갈아탔다는 이야기가 들릴면, 바로 목줄을 채우고 재갈을 물리겠지. 아니면 죽이거나.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제였다.
“어찌한다······.”
수도에 모인 귀족들이 깊은 시름에 잠도 못 이루던 그때.
이는 정치에 별 관심 없는 귀족여식들에게도 재밌는 가십이었다.
“그런데 황태자도 잘생겼대.”
“라우넬 황자님처럼? 내가 듣기로는 검은머리 악마 그 자체였다던데?”
“라우넬 황자님에게는 없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직접 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
“그거 그냥 개새끼라는 말 아니야?”
“쉿, 너도 잡혀가서 인육으로 먹히고 싶어?”
“잘생긴, 나쁜남자! 그런 분에게 먹히는 건 소녀의 로망이지!”
“미친년······.”
*
“······ 카르넬.”
2황비가 황비궁에서 카르넬 황녀를 불렀다.
보는 사람을 얼려버릴 것만 같이,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카르넬 황녀.
‘황실의 마지막 꽃’이라 불릴 정도로 단순히 아름다움이라면 모든 황녀들 중 으뜸이라 칭해질만큼 화사한 미모의 여인이다.
그 화사함과는 대비되는 연노랑빛의 머리와 가냘픈 몸,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그녀를 보고자 전국각지에서 귀족들이 모여들 정도였다.
얼마 후 있을 성인식.
정령의 도전자들 중 갑자기 귀족이나 왕족들이 늘어난 것도, 그 영향이 컸다.
“절대 안 돼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잔뜩 화가 난 기색으로 2황비의 앞에 서있었다.
오늘 아침 하달된 황제의 명 때문이다.
라인하르트를 그녀의 성인식에 참가시키라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
“황제폐하의 명이시다. 일전 베르사유 백작가에서의 혼담이 무산된 탓이겠지.”
베르사유 백작가.
변방백인 그 가문의 위세는 황실명가에 비하면 부족함은 있을지언정, 라인하르트에게는 나름 적합한 곳이었다.
라인하르트에게 쓸데없이 큰 힘을 실어주지 않고, 적당히 구색을 갖추게 하는 곳으로 베르사유 백작가만한 곳이 없었다.
헌데 며칠동안 그 가문의 영애를 데리고 다니더니, 혼담이 무산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제 성인식을 그 녀석의 데뷔식으로 만들라는 말인가요?”
그 녀석.
라인하르트의 사교계 데뷔다.
하필이면 그것을 자신의 성인식에서 치룰 줄은 꿈에도 몰랐다.
2황비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쓸데없이 혼인을 파기시켜서 그런 것 아니냐.”
“카툴루 왕국의 왕자라는 그놈, 진짜 두꺼비처럼 생겼다고요.”
파기된 이유는 간단하다.
첫대면에서부터 ‘정말 소름돋게 못생기셨네요’ 등의 악담을 쏟아냈으니 왕자 쪽에서는 어이가 없을만 하였다.
카르넬 황녀의 얼굴에 대한 편력은 이미 유명했다.
덕분에 이 아름다운 얼굴에도 혼담자리가 파멸되다시피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카르넬 황녀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형제들만 봐도 얼굴에 대한 편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얼굴 보고 결혼하는 황녀가 세상 어디 있더냐. 네 언니들도, 동생들도 전부 사람이 아니라 가문을 보고 갔다.”
“······ 제가 직접 따져야겠어요.”
“아서라. 성인식 날까지 감금당하고 싶지 않으면.”
“라인하르트에게 오지 말라고 따지겠어요. 그럼 되는 거죠?”
황제 데우스에게 따질 순 없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성인식에 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순 있다.
허나 2황비는 부정적이었다.
과거의 라인하르트라면 그럴 구실을 만드는 것쯤은 쉽다.
광증의 황태자를 황녀의 성인식에 참가시켜 망신을 줄 셈이냐며, 자신이 직접 황제에게 언질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라인하르트의 최근 행보가 눈에 밟힌다.
‘검을 뽑고, 황룡기사단을 부활시켰다지.’
황자들은 모두 하나씩 기사단을 갖고 있다.
자신의 얼굴이며 분신인 게 바로 그 기사단이다.
하지만 황태자의 황룡기사단은 이름만 존재할뿐, 실체가 없었다.
모두 탈퇴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검만 뽑았다면 별 감흥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룡기사단을 부활시켰다는 건 완전히 이야기가 다르다.
기사단의 부활은, 라인하르트의 부활과도 같았다.
게다가 시연식 이후로 라인하르트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허무의 속성, 거기다가 정령까지. 화제라는 화제는 전부 몰고 다니는구나.’
수많은 마탑에서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마탑만이 아니라 황실 전체가 주목하게 되었다.
황룡기사단을 부활시킨 저의를 모두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사교계 데뷔까지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하물며 이번 성인식은 온갖 귀족과 왕족들이 모인 자리다.
3황비 조세핀의 인맥은 생각보다 넓어서, 예술이나 정재계 거물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현재 제국의 수도로 모이고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라인하르트에 대한 소식도 귀에 들어갔을 터.
아무래도 귀족들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어야할 시기 같다.
“어디 한 번 해보거라. 내 거기까지 말리지는 않겠으니.”
*
카르넬은 기세등등하게 황태자기 기거하는 황룡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를 만날 수는 없었다.
“전하께선 황제폐하를 알현하는 중입니다, 카르넬 황녀님.”
제르민이 정중하게 문전박대했다.
정령의 건으로 라인하르트는 고작 하루만에 다시 황제에게 불려갔다.
황제를 알현하고 있다는데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카르넬의 고집은 꺾지 못하였다.
“그럼 어디서 기다리면 되겠느냐?”
“이후 스케쥴이 이미 꽉 차 있어서, 따로 약속을 잡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스케쥴이 꽉 차있다.
이미 약속이 잡혀있다는 뜻이다.
‘뭐야. 라인하르트 주제에 왜 이렇게 바빠?’
궁에서 놀고먹던 황태자를 보고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까짓 약속 철회하면 그만 아니냐. 아니면 설마 나를 보는 것보다 다른 약속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는 황녀다.
황제가 아닌 이상에야 우선순위가 뒤로 밀릴 리 없는.
“알겠습니다. 페르세포 대공께 말씀드려보지요. 황녀님께서, 일정을 다음으로 미루라 하셨다고.”
“······ 페, 페르세포 대공?!”
딸꾹!
저도 모르게 카르넬 황녀가 딸꾹질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지닌 두 명의 대공.
한 명은 카를로스 대공이며, 또 다른 한 명이 바로 페르세포 대공이다.
카를로스 대공은 강력한 군사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재패하는 무신이었다.
그리고 페르세포 대공은 재신이었다. 어마어마한 재력을 바탕으로 제국의 경제를 주물럭거리는 거물 중의 거물 말이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무섭느냐 묻는다면, 카르넬 황녀는 주저없이 페르세포 대공을 고를 것이었다.
페르세포 대공은 너무나도 음침하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눈은 앞에 앉아있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게다가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세계에 극소수만이 존재한다는 다크엘프.
이백년 전, 제국의 유일무이한 여제와 결혼하며 대공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후 수많은 내전, 전쟁 따위를 거쳐 부를 축적한 그는 제국 제일의 재상이 되었다.
역대의 황제들 모두가 페르세포 대공을 어려워하는 이유다.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 귀족의 작위를, 그것도 대공의 작위를 갖고 있는 건 역사를 뒤져봐도 이례적인 경우였다.
황녀의 직위는, 페르세포 대공의 직위 앞에 반딧불과 같았다.
“아, 아니다. 내일 찾아오마.”
“내일은 신성교의 아마르 추기경님과 약속이 있습니다.”
“모레! 모레는 괜찮겠지?”
“모레는 빛의 마탑주 안드로센님과 다른 마탑주님들의 공동 선약이······.”
“······.”
카르넬 황녀는 할 말을 잃었다.
성인식 전까지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
“도착해 계십니다, 전하.”
궁으로 돌아오자 이미 페르세포 대공이 도착해있었다.
황룡궁의 입구에서 이기 그의 기사들이 자리잡고 있는 중이었다.
제르민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페르세포 대공은 제국을 200년간 호령한 거인이다.
200년 전 여제와 결혼하여 슬하에 자식은 없다지만, 황제가 여섯 번 바뀔 동안 굳건했던 대공의 직위가 갖는 권력은 또 다른 황제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이종족 다크엘프지만 그를 무시하는 인간은 이곳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전히 위세가 대단하군.’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를로스 대공보다 더 어려운 게 페르세포 대공이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숨겨진 재산, 군사력 따위는 말이 안 될 정도라고만 알고 있었다. 도저히 그 끝을 알 수가 없기에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결국 말피엘에게 목이 잘리긴 했지만······ 말피엘이 등장한 이후 가장 큰 관문이었던 게 페르세포 대공이었다.
‘가장 먼저 말피엘의 광기를 알아본 거겠지.’
귀족들 중에는 가장 먼저 말피엘을 거부했다.
그의 눈은 모든 걸 꿰뚫어 본다는데, 말피엘의 본성까지 꿰뚫어 본 것인지.
나는 천천히 제르민을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끼이익-.
문을 열자, 그곳엔 이미 페르세포 대공이 앉아있었다.
그의 뒤로 웬 기사가 한 명 있었다.
갑옷과 투구를 써서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관리자 권한 등급이 격상함에 따라 타인에 대한 스캔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마스터께서 필요한 정보를 스캔 후 제공합니다.]
【종족 : 다크엘프(인간의 DNA와 99.69% 유사)】
【성별 : 여성】
【Lv. 98】
엄청난 강자다.
레벨이 98이라면 소드마스터 중급의 수준이다.
페르세포 대공만이 아니라, 저 여기사도 다크엘프였다.
그런데 인간과 유사한 DNA라는 건 무슨 뜻인지.
‘다크엘프 여기사라.’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다크엘프는 멸종해가고 있었다.
페르세포 대공은 멸종해가는 다크엘프들을 찾아, 거둬들여 양자로 삼았다.
그들의 능력은 하나같이 대단해서, 기존의 무력양상을 단번에 바꿔버렸다.
물론 이는 훗날 정복전쟁 이후의 이야기다. 지금 이 시대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그렇다면 저 여기사도 페르세포 대공이 거둬들인 양녀라는 뜻인데.
“오랜만이오, 페르세포 대공.”
“어릴 때 뵙고 처음이니 실로 오랜만입니다, 전하.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기억을 해주어서 영광이라는 듯.
도리어 나를 높히며 추켜세우는 반응이다.
그러나 방심해선 안 된다.
가장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 그였으니까.
“날 보자는 연유가 무엇이오?”
“단도직입. 좋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의 재회이니 제 선물부터 받으시지요.”
“선물이라니?”
“아렐.”
스윽.
호명하자, 뒤의 여기사가 투구를 벗었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과 피부.
다크엘프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선물이라는 게 설마?
페르세포 대공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전하.”
< 황태자를 찾는 사람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