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47화 (47/146)

황룡기사단이 부활했다.

그리고 기사단이 부활했음을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보여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 나서기만 해도 소문은 퍼진다.

하물며 칩거중인 황태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소문의 확산 속도는 더없이 빨라질 것이다.

그리고 현재,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며 소문의 온상이 된 곳은 다름아닌 황궁이었다.

궁안에 소환된 정령의 주인이 되고자 온갖 이들이 도전하고 있었다.

신분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서.

누군가에게는 인생역전의 기회가, 어떤 이에겐 자신의 증명이 될 수 있는 도전이었기에 대륙 전역에서 모여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주인이 정해져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바위에 꽂힌 검, 정령 칼리번.

나는 칼리번을 뽑는 것으로 나의 부활을 알리려고 하였다.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준비해놓은 안배였으니까.

‘리겔 왕국의 왕자라······.’

눈앞에서 사색이 된 왕자라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

리겔왕국이라면 제국 동쪽에 붙어있는, 그쪽에선 나름 패권을 다투는 나라다.

제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꽤 괜찮은 위인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기억에 없군.’

이런 왕자가 있었던가?

“제, 제가 위대한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못 알아 뵙고 말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너른 아량으로 용서······.”

퍼억!

왕자가 주먹에 맞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은 채 당황하며 녀석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설마 자신을 때리리라곤 전혀 상상조차도 못한 모습이다.

“사람을 무는 개는 때려죽여야한다고 들었다. 정령지기, 내 말이 틀린가?”

“그, 그건······.”

왕자를 개로 비유하자 정령지기도 당황해했다.

심지어 때려죽인다니.

다른 황자라면 모르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건 황태자였다.

황태자가 죽인다는 말을 단순한 위협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황태자 전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설마 위대한 제국 황실의 황태자 전하께서 일개 평민을 감싸고 도시는 겁니까?”

왕자가 악에 받쳐 외쳤다.

그의 말마따나 정령지기는 평민이다.

정령지기는 칼리번이 직접 고른 사람이다.

원래 마굿간을 담당하는 자인데, 궁에서 나갈 때 제르민이 마차를 빼돌리기 쉽게 만들고자 수를 쓴 것이다.

“개가 아직도 짖는군. 여봐라, 저 개가 한 번 더 짖으면 혀를 자른 뒤 시궁창에 던져라.”

“예, 전하.”

그 즉시 황룡이 수놓아진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찬란한 은빛의 투구와 붉은 망토를 두른 도합 일곱의 기사.

그림자였던 그들 모두가 다시 단원으로 돌아온 것이다.

숫자는 적지만 그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데이몬이 탐을 낼만큼 완성된 자들이었으니, 고작 동쪽에 있는 작은 나라의 기사 따위가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리겔 왕국의 왕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왕자의 기사들도 단번에 격의 차이를 깨닫곤 움직이지 못했다.

“정령지기.”

“예, 예, 전하. 부르셨습니까.”

“내가 검을 뽑아보려하는데, 얼마나 기다려야하는가?”

“줄을 선 순서대로 하라는 폐하의 명에 따라······.”

정령지기가 고개를 돌려 줄을 바라봤다.

끝도 없이 이어진 행렬.

하지만 앞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귀족이다.

평민들은 개방시간이 거의 끝날 때가 돼서야 기회를 얻었다.

자신의 앞에 평민이 있는 걸 가만이 넋놓고 기다려줄 그들이 아니었기에.

신분의 차이로, 계급의 위아래로 순서가 정해지고 있엇다.

정령지기의 시선이 닿자, 왕자의 뒤에 섰던 남자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령지기의 눈에 닿은 줄의 귀족들 전부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어댔다.

아예 뒤로 물러나거나, 등을 돌려버리는 이도 있었다.

‘멍청한 정령지기 녀석. 나를 죽일 셈이냐?’

‘지금 상황에서 순서대로 했다간 순서대로 목이 날아간다.’

‘그냥 제발 뽑으라고 해! 순서는 얼어죽을!’

귀족들의 얼굴 또한 사색이 되었다.

황태자 라인하르트.

그가 이런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이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대륙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인다.

말대꾸를 해도 죽이고, 자신의 앞을 막아도 죽인댄다.

오죽하면 황태자의 궁에는 날카로운 물건이 아예 없다고 한다.

너무 많이 죽여서, 물대신 피로 목욕을 하는 악마라고 그랬다.

인간을 산채로 불에 익혀 먹는다거나, 살점을 하나하나 떼어 수만조각으로 회를 쳐 먹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지금 바로 뽑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흐음, 그래?”

천천히 칼리번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칼리번. 위대한 왕의 정령. 나를 뽑는 자만이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갖추리라.

칼리번 처음 본 자들에게 으레 그러듯 말했다.

피식 웃으며,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검을 뽑지 못하면 그것은 짖은 개 때문에 부정을 타서이니, 그땐 그 개의 목을 잘라버리거라.”

“······!”

리겔 왕국 왕자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은 전부 같은 반응이었다.

셀 수없이 많은 이들이 도전하고 실패했다.

황태자가 칼리번을 뽑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말인 즉, 그는 지금 리겔 왕국의 왕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예, 전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황룡기사단은 주저함이 없었다.

검을 뽑고, 벌써부터 목을 잘라버릴 준비를 하였다.

‘아니, 뭐라는 거야. 지금 나를 죽이겠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라고 해도 타국의 왕자를 죽일 권한은 없다.

게다가 리겔 왕국은 제국의 동맹과도 같은 곳이었다.

동맹국의 왕자를 그저 말실수 한 번 했다고 죽인다면 그건 전쟁을 하자는 것과 같았다.

제국의 힘이 강성하다 한들, 현재 제국의 황제는 성왕으로 이름이 드높은 그 데우스 아니던가.

‘그래. 허세일 거다. 일개 평민과 왕족의 목숨값이 어찌 같겠나.’

황태자가 막 나가도 그건 평민들에 한해서다.

귀족을, 왕족을 죽이면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손을 뻗는다.

이에 왕자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자, 잠깐! 대체 제가 뭘 잘못했······?!”

푸악!

입안이 터졌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별다른 고통은 없었다. 입 안에서 물기가 가득 차고 터지는 느낌만 받았을 뿐이다.

‘혀가?’

감각이 없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느낀 뒤에야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플릭 왕자님!”

“내, 내 혀어··· 내 혀어! 꺼억!”

왕자, 플릭은 지금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단순한 굴욕을 넘어서서 일국의 왕자의 혀를 잘라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혀를 보자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시궁창에 던지는 건 내가 검을 뽑은 뒤에 하거라. 뽑지 못하면, 목을 자르고.”

미친 새끼!

플릭은 이를 악물었다.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진짜 미친놈이었다.

고작 말실수 한 번 했다고 혀를 자르다니, 그것도 리겔 왕국의 왕자의 혀를!

“그리하겠습니다.”

“머하으 거냐! 날 지키안 마이다!”

플릭이 혀가 잘린 채 소리쳤다.

플릭의 기사들은 총 열 다섯이었다.

리겔 왕국의 정예기사인데다 두 배가 넘는 숫자다.

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황룡기사단은 그보다 더 빨랐다.

“이, 이게 무슨?”

검을 뽑기 무섭게 그 검이 두동강났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강철이 강철을 이처럼 말끔하게 베어내는 건 검술의 달인도 힘들다.

오러, 혹은 그 비슷한 양의 마나를 검에 덧씌울 수 있는 자.

최소 소드익스퍼트 상급은 되어야 함이었다.

‘일곱 전부가 최소 그 수준이라고?’

플릭의 기사들과 기사단장은 당황했다.

그 정도면 정예 기사단의 단장급 실력이다. 그 숫자가 일곱이니, 단순히 머릿수가 많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플릭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죽는다.’

죽는다. 진짜로 죽는다.

저 미친 황태자의 눈에는 평민과 왕족의 목숨이 같은 게다.

신분의 차이?

아니, 같은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가.

‘내가 저 평민놈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다.’

뺨을 때리고, 개 취급하며 혀를 자른다고 엄포를 놓은 것 그대로를.

이해할 수 없다.

고작 천한 평민이지 않은가.

죽으라면 죽고, 기라면 기어야하는.

그런데 왜.

대체 왜 저딴 평민 한놈 때문에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절대로 검을 뽑게 놔둬선 안 된다.

어차피 검은 뽑히지 않을 테고, 그리되면 자신의 목은 잘려나갈 것이다.

“데, 데송합니다. 사려, 주십시오.”

지척까지 다가간 플릭이 애원했다.

잘린 혀 때문에 발음이 어렵다.

하지만 황태자는 거침이 없었다.

플릭이 그러거나 말거나, 손을 뻗어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아··· 아아······.”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황룡기사단의 기사 한 명이, 검을 뻗어 플릭의 목에 갖다대었다.

플릭의 몸에서 힘이 쭉 풀렸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검을 뽑으려고 힘을 주는 순간.

플릭의 방광 역시 함께 풀려버렸다.

“흠, 운이 좋은 녀석이구나.”

잘못 본 건가?

환각인가?

어쩌면 이미 목이 잘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느낄 새도 없이, 플릭은 그대로 졸도해버렸다.

“냄새가 심하군. 굳이 시궁창까지 갈 필요도 없겠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쥐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잔인한 장면 때문에?

아니면 졸도한 플릭 때문에?

아니다. 내가 든 검 때문이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정령무기 칼리번과 내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궁 밖으로 치우거라.”

플릭을 향해 말하자, 기사들이 플릭의 발을 붙잡고 바닥에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오물이 바닥에 긁히며 자국을 만들었다.

나는 혀를 찬 뒤 고개를 돌려 멍한 얼굴의 정령지기를 쳐다봤다.

“그리고 정령지기여.”

“······ 아, 예! 전하.”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정령은 궁의 보물이니, 그것을 지킨 그대도 같은 대우를 받아 마땅할 터. 원하는 게 있느냐?”

“어, 없습니다. 오히려 영광이었습니다. 제 인생에 다시 없을.”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그 말을 듣고서 정령지기가 잠시 고민했다.

“저······ 그럼.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냐.”

“마지막으로 정령님께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겨우 그것이냐?”

맥이 빠질 정도로 허무한 부탁이다.

하지만 정령지기의 얼굴은 홀가분했다.

“예, 저 같은 천민에게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정령님께서 저를 선택해주신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르민이 몰래 마차를 빼돌리고자 억지로 맡긴 직책이다.

그것을 사명을 다해 해낸 것이다.

왕자와 같은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닐진대.

까탈스러운 귀족들을 수없이 상대했을 텐데도, 도리어 고맙다는 표정이다.

재밌는 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은보화나 호화로운 저택 따위를 원할텐데.

“이름이 무엇이냐?”

“할버트입니다.”

“할버트, 마지막 인사는 되었다. 앞으로도 너는 내 궁에서 칼리번의 관리를 맡아라.”

“예······?”

“제르민의 밑에서 집사일을 배우도록.”

할버트는 아예 넋을 놔버렸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제대로 안 되는 듯했다.

나는 칼리번을 쥔 채, 그대로 들어올렸다.

빛에 반사하며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 검의 주인이 내가 되었음을, 이쯤하면 모두 알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칼리번을 뽑으면 신분을 상승시켜준다는데, 내가 오를 신분은 하나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그것을 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말 고민이었다.

무엇을 달라고 해야할까?

< 검을 뽑는 자(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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