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군주가 국경을 넘었다.
갑작스럽게 제안된 휴전협정의 내용을 정하기 위함이다.
그가 국경을 넘어 제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자 병사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 1군주?!”
“저놈이 북방에서 보낸 협상자라고?”
“휴전을 할 생각이 없는 거 아니야?”
불신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당연한 일이다.
1군주는 전선에서 가장 많은 제국의 병사들을 도륙한 장본인이다.
전장 곳곳에서 솟아나는 용오름에 천명은 족히 죽었다.
척살대상 3순위 안에 들어가는 제국의 적을 북방에선 협상자라고 내세운 것이다.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간도 큰 놈이군. 혼자서 뭘 하려고 온 거지?”
“‘협정단’이라고 하지 않았어? 신성군주는?”
가장 중요한 신성군주는 보이지도 않았다.
휴전의 협상을 주도하는 건 북방의 우두머리일 줄 알았다.
그런데 고작 많은 군주 중 한 명일 뿐인 그가 대표자격으로 나섰다.
제국을 무시하는 처사다.
그렇다면 그 처사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마땅했다.
“카를로스 대공이 협상자로 나설 줄 알았다만, 네놈은 누구냐?”
협상의 자리.
거대한 영주성의 중심홀에 차려진 테이블 위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에 1군주가 묻자, 남자가 답했다.
“나는······.”
“됐다. 별로 궁금하지 않다. 네놈과는 할 말 없으니 썩 꺼져라.”
귀족무리 중 그나마 직위가 높은 이가 나섰으나 1군주는 단호했다.
어중이떠중이와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무시의 태도다.
“무엄하다! 감히 누구 앞인 줄 알고!”
기사들이 위협을 가했다.
1군주는 콧방귀를 꼈다.
“성 째로 날아가고 싶거든, 덤벼보거라.”
그는 혼자였지만 군단이었다.
충분히 1인군단이라 칭할 수 있는 강자다.
그의 눈빛에,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사자 앞의 순한 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를 죽이려면 병사 천 명이 희생하거나 소드마스터를 여럿 데려와야 한다.
1군주가 자리에 앉은 채 테이블 위로 발을 올렸다.
“전쟁 총괄자를 데려와라. 그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 휴전은 무효다.”
*
쓸데없는 기싸움이다.
카를로스 대공은 북방의 협상자로 보내온 1군주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제대로 협상을 진행할 생각이 없다.’
휴전을 먼저 북방에 제안한 건 그다.
이 전쟁을 통해 얻을 게 없어졌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북방에 나타나, 셋째 아들인 테베우스를 죽이며 자신의 의지를 알렸다. 그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노라 선언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지의 용은 어떠한가.
그것도 신성군주가 차지해버렸다.
혼자 일을 처리해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데이몬은 또 어떻게 되었는가.
신성군주와 북방에 밀려 뼛조각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데이몬이 직접 나서서 실패해버린 탓에 궁지에 몰린 건 카를로스 대공이었다.
북벌의 야만인들이 데이몬의 성에서 뭘 찾아냈을지 몰랐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신성군주가 라우넬을 살려보냈다는 것이다.
‘··· 신성군주가 용을 타고, 라우넬을 황실로 돌려보냈지.’
라우넬을 잡으라고 지시한 건 그다.
죽이고자 데이몬에게 보냈건만, 살아서 돌아갔다.
만에 하나 리치, 그리고 악마교단과의 연관성이 파헤쳐지면 전쟁에서 이겨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덮어야 한다.
라우넬도 라우넬이지만, 북방의 야만인들이 데이몬의 성에서 뭘 찾아냈을 지는 그조차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하루빨리 처리하고 싶으나 야만인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는 통에 발만 구를 수밖에 없었다.
‘약의 유통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리치는 악마교단이 숭배하는 신이다.
약의 유통 따위야, 제국의 그 누구도 자신에게 책을 잡지 못한다.
하지만 리치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황은 반전된다.
필사적으로 부정해도 의혹만으로도 입지가 좁아질 건 자명했다.
그러니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덮고자 하였다.
광맥이 포함된 땅까지만 얻어낼 수 있다면 충분히 성공적인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었으니.
‘오냐, 그리 원한다면 직접 나서주마.’
귀족들을 보내고, 자신의 자식들도 나서서 협상을 제안했지만 1군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지지부진하게 끌려다닐 순 없었다.
비록 치욕이고 굴욕이나,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카를로스 대공은 이를갈며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
생환한 일곱의 그림자.
그들은 살아돌아왔으나 정상이 아니었다.
모진 고문으로 인해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법 말끔해진 모습으로 그들은 연무장에 모여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동자엔 의구심만 가득했다.
‘크로프트님이 소집하신 게 아니었나?’
‘왜 황태자가 이곳에?’
살아남은 그림자들의 소집을 명한 건 크로프트다.
그런데 막상 연무장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라인하르트 황태자.
바로, 나 말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군.”
그럴 만 했다.
그림자는 절대 신분이 노출되어선 안 되는 비밀요원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모인 일곱은 그림자이며 동시에 황룡기사단이었다.
데이몬의 지하감옥에서 발견했으며, 다른 그림자들은 데이몬이 건 악몽의 저주를 이기지 못한 채 죽어서 언데드가 되었다.
기존 황룡기사단의 단원이었던 이 일곱은 끝까지 저항한 것이다.
실력만큼이나 정신력도 발군인 자들.
나는 그들에게 선언했다.
“그대들을 부른 건 황룡기사단의 부활을 위해서다.”
황룡기사단의 부활!
모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든 그림자가 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크로프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룡기사단은 황태자가 탄생했을 때 조직된 곳.
다른 황자들의 기사단은 보통 황비가 직접 뽑았지만, 황룡기사단은 황제 데우스와 크로프트가 고르고 고른 인재들로만 채용된 최정예 집단이었다.
라인하르트의 광증으로 인해 실망한 기사들은 전출하거나, 기사단을 나가는 척 그림자의 일원으로 활동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황룡기사단을 부활시키겠다니.
“그대들이 황룡기사단을 떠나, 그림자로 활동해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여태껏 그대들을 방치한 것도 인정하고 사과하마.”
순순히 인정했다.
그간 방치하고 실망만 주었음을.
하지만, 황룡기사단은 주춧돌이다.
주춧돌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법이었다.
이제 그들을 다시 감싸 안아야 할 때였다.
하여 나는 소집령을 내렸다.
이곳의 일곱만이 아니라 외지에서 활동 중인 모든 ‘전’ 황룡기사단원들에게.
그들이 다시 모여, 음지의 그림자가 아닌 양지의 기사단으로 다시 발돋움 시키기 위해서였다.
“전하. 저희는 공식적으로 기사단을 탈퇴한 자들입니다. 다시 기사단에 들어가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림자 중 한 명이 대표로 말문을 열었다.
한번 탈퇴한 곳을 다시 들어가는 건 그림이 좋지 않다.
하물며, 그들 모두가 황태자에게 실망해 나간 자들 아니던가.
“이얄츠 경, 억지로 따르라는 게 아니다.”
“······!”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이얄츠가 움찔했다.
기사단을 나간지 벌써 5년이 훌쩍 넘었건만.
그 전에도 기억못하던 자신의 이름을 어찌 입에 담는단 말인가.
“지켜보라. 시험을 해보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다. 강제성은 없으나, 조금이라도 내게 믿음이 생긴다면 그때 다시 충성을 맹세해도 좋다.”
“······.”
불신의 눈빛.
하지만, 그들 모두 느끼고 있었다.
‘달라지셨다.’
광증으로 미쳤던 과거의 황태자가 아니다.
북방에서도 자신들을 구한 게 크로프트와 황태자인 건 알고 있었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마차 안이었다.
하물며, 황태자에게 가장 모질게 굴던 그 크로프트가 인정했다.
그냥 이름만 다시 부활시키려는 게 아니다.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과거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황룡기사단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크로프트에게 시선이 몰린다.
하지만 크로프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기사단의 주인은 내가 아닌 황태자 전하이시다. 전하의 말을 따르겠다면 복직할 것이고, 그러지 못하겠다면 남아있어라. 남아있는다 해도 내 이름에 맹세컨대 부당한 처우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크로프트가 호언했다.
자신을 따르려고 입단하지 말라고.
오직, 황태자에 대한 충성심으로만 입단의 단락을 결정하라고.
지금 당장이 아니라 지켜보며 선택하라는 게다.
말을 꺼냈던 이얄츠가 라인하르트를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발언들이다.
다시 한 번 희망을 걸어봐도 될는지.
수많은 부당한 대우에도 이얄츠는 기사단을 나가지 않았었다.
그가 탈퇴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몇년이나 따랐는데도 이름 한 자 기억해주지 않으셨지.’
몇 년이 지나, 황태자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는 데에 실망하여 기사단을 탈퇴한 것이다.
그런데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 황태자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었다.
정말 작고, 어찌보면 별 거 아니지만.
때로 그렇게 작은 것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감동 받을 때가 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만큼 사소한 것들이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일 때도 있었다.
“신, 이얄츠. 용서하신다면, 라인하르트 전하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이얄츠가 무릎을 꿇었다.
“환영한다, 이얄츠 경.”
나는 웃었다.
황룡기사단의 부활!
그것은 곧, 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으므로.
*
정령.
천 년만에 칠대 신비 중 하나가 제국의 황궁에 출현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정령의 주인을 찾고자 궁은 문을 개방했고, 황실에선 검을 뽑는 자에게 귀족의 작위와 영지를 약속했다.
엄청난 인파가 제국의 수도로 몰려들었다.
제국 각지에서, 각 나라들에서, 검을 뽑고자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검을 뽑은 사람은 없었다.
일반 평민도 많았지만 귀족들도 너나할 것 없이 도전하고 참패했다.
이제는 다른 왕국들도 ‘누가 검을 뽑느냐’가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검을 뽑으면 소유권은 어찌 되는가부터 시작해서, 다른 왕국들도 정령의 주인이 된 자에게 보상금을 하나, 둘 걸고 있는 상황이었다.
왕국들도 그럴진대 신비라면 사족을 못쓰는 마탑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온갖 집단과 집단이 맞물려 구경오는 진귀한 현상이었다.
정해진 시간에만 문을 개방하지 않았다면 궁은 사람들로 넘쳐서 터져버렸을 것이다.
“이건 거짓말이다!”
멋들어진 제복을 입은 남자가 검을 뽑지 못하자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왕의 자격이 없다는 말이냐? 이 빌어먹을 가짜가!”
쾅!
바위를 차고, 씩씩대며 분풀이를 한다.
새치기까지하며 비집고 들어왔지만 아무도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리겔 왕국의 왕자였다.
그것도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
제국과 우호적인 왕국의 왕자가 가신들을 이끌고 찾아와 검을 뽑는데 도전했다.
검을 뽑아 자신이 차기 왕임을 증명코자 한 것인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패했으니 성이 차지 않는 것이다.
보다못한 정령지기가 말려세웠다.
“왕자님. 정령에게 손상을 입히시면 안 됩니다. 엄연한 제국 황실의 소유물······.”
쫘악!
장이 박힌 장갑에 뺨을 맞은 정령지기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지금 누구에게 그딴 소리를 내뱉는 거냐. 내가 누군지는 알고 그러는 것이냐? 리겔왕국의 왕자가 우스워 보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한 마디만 더 내뱉으면 혓바닥을 잘라 개에게 먹여버릴 테다. 애당초 고작 이딴 가짜 정령이 감히 나를 판단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네놈도 이를 방관했으니 죄가 없지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을해? 혓바닥을 잘라라.”
억지다.
기사들은 멈칫했다.
이곳은 제국의 수도, 그것도 황궁이었다.
섣불리 검을 뽑았다간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다.
평민에게도 기회를 부여하고자 개방적인 장소에 정령을 놔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병사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왕자님.”
긴장감이 흘렀다.
일개 제국의 병사가 리겔 왕국의 왕자를 제지하긴 어렵지만, 더 시끄러워지면 윗계급의 지휘자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 고작 이딴 거렁뱅이 한 놈 죽인다고 나를 어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도리어 왕자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이놈의 잘못이 더 크다 여길 터. 그러고도 너희가 나의 기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도 기사들이 머뭇거리자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오냐, 내가 직접 잘라주마.”
“제,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정령지기가 눈물을 글썽였다.
왕자가 그의 입을 잡고, 혀를 잘라내려는 그 순간.
“웬 미친개가 한 마리 들어왔군.”
“··· 뭐?”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왕자는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했냐, 내게.”
왕자의 불호령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정령지기여. 검을 뽑을 기회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었나?”
“화, 황태자 전하!”
정령지기가 호명하자, 순식간에 좌중이 시끄러워졌다.
“황태자?”
“저분이 황태자 전하시라고?”
“뭐야, 멀쩡하게 생겼는데?”
“쉿!”
병사들도 하나, 둘 무릎을 꿇었다.
베일에 싸인 황태자가 직접 정령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태자라고?’
악귀 같던 왕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했다.
< 검을 뽑는 자(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