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데우스는 지난 며칠간 기다리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를.
북방에서의 오랜 방황을 끝내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니 제알아서 기별을 넣고 찾아올 줄 알았건만 감감무소식이다.
혹시 몰라 알아보라 지시하자, 태평하게 방에서 책이나 읽고 있다고.
데우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책이라니!
책이라는 건 끈기가 있어야 읽을 수 있는 물건이다.
어렸을 때부터 활자조합물만 보면 비명을 내지르던 게 라인하르트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평소 하지 않은 일을 하여 관심을 끄는 거라고 여겼다.
본래라면 아무런 고지 없이 궁을 나서 북방으로 향한 건 경을 치고 벌을 줘도 이상하지 않을 일.
제아무리 크로프트가 동행했다고는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움직임은 정치적으로 작용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농후했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와 잘못을 빈다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였다.
이후 겸사겸사 북방에서의 소식도 들으려고 했건만.
‘되었다.’
하기야, 무슨 기대를 한 건가.
잘잘못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면 그건 광증이 아니다.
데우스는 관심을 접었다.
북방의 소식은 크로프트에게 들으면 그만이므로.
“······ 크로프트의 숨겨둔 자식인가? 그의 젊은시절과 아주 판박이로구나.”
크로프트를 불렀는데 웬 젊은이가 나타났다.
그것도 굉장히 익숙한 얼굴의.
데우스의 말을 듣고 젊은녀석이 고개를 숙이며 진중하게 말했다.
“제가 크로프트입니다, 폐하.”
“뭐라?”
데우스가 놀라며 더욱 자세히 크로프트를 살펴봤다.
흰 머리와 주름이 자글하던 크로프트의 외관은 사라지고, 이십대의 풋풋함마저 엿보일 수준으로 변신을 일구어냈다.
그와 함께 젊음을 보냈으니 잘못 알아보았을 리는 없었다.
숨겨둔 자식인 줄 알았건만, 본인이라 말한다.
확실히 자식이라도 이정도로 똑같이 생기진 못할 것이다.
“짐 몰래 북방에서 좋은 거라도 먹고 온 겐가?”
“좋은 거라고 하긴 그렇지만, 뭘 먹긴 먹었습니다.”
“남은 게 있나?”
“안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주가 강해 대부분은 죽더군요.”
성지의 저주.
그것을 먹고 극복하며 강해졌으나 남에게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데우스가 쯧, 혀를 찼다.
“이제는 흰머리가 늘었다고 놀리지도 못하겠군.”
아쉬웠다.
소드마스터도 세월은 이길 수 없다는 말로 장난을 쳤는데.
마나샤워를 겪은 검사나 마법사는 흔치 않지만, 황궁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들이 모이는 장소.
심심찮게 봐왔기에 그다지 놀랍진 않다.
허나 크로프트는 오래전부터 마나샤워를 겪었음에도 젊어지지 않았다.
황제를 놔두고 혼자 젊어질 순 없다고 생각해서다.
성지에서 겪은 마나샤워는 워낙 정신없이 이루어졌기에 선택할 틈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허. 자네가 짐에게 미안할 게 무엇이 있겠나. 도리어 축하해 마땅한 일이지. 그대가 젊음을 되찾았으니, 제국의 위세가 더 드높아질 터.”
과거 최강이라 불리었던 크로프트다.
나이를 먹으며 그 위세는 전보다 떨어졌지만, 다시금 젊음을 되찾았다면 전성기의 회복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데우스가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북방에서의 일을 듣고싶군.”
심어둔 그림자들과의 연락이 죄다 끊기며 황실은 눈과 귀를 잃었다.
제대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니, 황제의 입장에선 답답하던 참이다.
카를로스 대공은 철저하게 귀족들과 병사들을 제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전황이 변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기세의 카를로스 대공이 전략상의 후퇴를 결정했다.
그러나 휴전에 대해 아직 데우스는 승인하진 않았다.
어떻게 된 된 건지, 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아무렇게나 승인할 수는 없는 노릇.
크로프트는 북방에서 겪은 일 중 하나를 입에 담았다.
“억류된 그림자들을 찾아내 풀어주었습니다. 스물여섯 중 생존한 건 일곱뿐이더군요.”
“으음, 안타까운 일이다. 장례는 신경써서 치르고, 살아남은 이에겐 크게 보상할 것이다.”
목숨을 걸고 북방으로 침투한 스물여섯의 그림자.
그들은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다.
평범하게 빛을 보고자 했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이들.
그들의 죽음은 제국의 큰 손실과도 같았다.
이후 크로프트는 북방에서의 이야기를 데우스에게 전해주었다.
악마의 죽음이 대량으로 유통되는 것.
북방에 신성군주가 나타나며 전황이 뒤바뀐 것.
악마교단의 리치를 신성군주가 토벌한 것 등등.
“헌데, 그게 끝인가?”
하지만, 대략적으로 아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데우스가 바라는 건 더 자세한 정보다.
예컨대 신성군주의 정체나, 카를로스 대공과 악마교단의 이음새 같은.
“저는 그저 라인하르트 전하의 곁에서 도왔을 뿐입니다.”
“그대가 라인하르트를 도왔다······?”
앞의 이야기는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데우스는 크로프트가 라인하르트를 부를 때의 어감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걸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내용도 간과할 수 없다.
‘억제한 게 아니라, 도왔다고?’
라인하르트가 변덕으로 인해 북방으로 떠난 줄 알았다.
정치적인 문제로 번지지 않게끔 크로프트가 알아차리고 따라간거라 생각했다.
겸사겸사 그림자와 북방의 정보를 수집하고자 크로프트가 주도적으로 움직였다고 여겼건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주도적으로 움직인 건 라인하르트이며, 크로프트는 그 곁에서 도움을 주었을 뿐이라는 말이었다.
북방에 가기 전과 후의 차이가 역력하다.
대체 북방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크로프트가 라인하르트에게 이러한 신뢰를 보낸단 말인가.
“폐하. 라인하르트 전하에 대한 편견을 거두셔야 합니다.”
“편견이라면, 광증을 말하는 것인가?”
“그저 다른 황자님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보아달라는 뜻입니다.”
“짐이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경은?”
데우스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이다.
본래의 크로프트라면 여기서 한 발자국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프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랬습니다, 폐하. 편견으로 전하를 대했으나 정작 전하께서 무엇을 잘하는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지요.”
그저 그 직책에 맡는 모습을 보이길 바랄 뿐이었다.
황태자가 가져야할 규범에 대해서만 강하게 요구하고 압박했다.
그 자리가 사실은 라인하르트의 의도에 의해 가져진 게 아님에도.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겐가?”
“전하께선 변하셨습니다.”
“······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럼 정정하겠습니다, 폐하. 전하께선, 가고자 하는 길을 정하셨습니다.”
길을 정했다.
그동안은 길을 정하지 못해 방황했을 뿐이다.
길고 긴 방황이 끝났으니, 이제는 마주하라.
데우스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라인하르트가 변했다. 크로프트가 그리 말한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와서 변한들 달라질 건 없는데.
“한 번 대화를 나눠보시지요.”
“내가 직접 찾으란 말인가?”
크로프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후 정중하게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두분께서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줄 압니다. 부디 너른 아량을 보이시옵소서.”
크로프트의 입장에서 지금 이 대치는 부모자식간의 기싸움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변화를 보인 지금, 이 싸움은 무의미하다.
서로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더 큰 것을 견제하고 노릴 수 있었다.
크로프트가 첨언했다.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만, 부모자식간의 싸움은 부모가 먼저 아량을 보여야 후사가 편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이는 자라고 부모는 늙는다.
이대로 서로가 미워만 한다면 아무리 변하고 바뀌려고 해도 제자리일 것이다.
아니, 더 나쁜 쪽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불신이라는 것은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다.
‘그가 이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건 처음보는구나.’
문제는 크로프트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다. 오직 황실을 위해서만 움직여왔다.
황자들간의 구도 싸움에도 낀 적이 없었다.
방관자의 위치였던 크로프트가, 라인하르트를 필사적으로 두둔하고 있었다.
살아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한 건지.
“··· 좋다. 라인하르트를 들라하마.”
한 번 확인해봐야겠다.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모든 이들을 물리고 궁 내에는 황제 데우스와 라인하르트만 남았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가만히 인사를 올리자 데우스가 한 손을 들었다.
“인사치례는 되었다. 짐이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을 터.”
고개를 들어 마주본다.
예전과 달리 전혀 주늑 든 기색이 없다.
시연식에서도 느꼈지만 기백 자체는 확실히 달라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북방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제가 북방에 갔습니까?”
뻔뻔하게 시치미를 뗀다.
허나, 맞는 말이다.
공식적으로 라인하르트는 북방에 간 적이 없다.
만약 곧이곧대로 고개를 끄덕였어도 데우스는 실망했을 것이다.
‘생각이 없진 않군.’
누가 물어도 같은 대답을 해야한다.
라인하르트는 궁을 나선 적이 없어야 했다.
“갔다면, 짐이 알아야 할 것들이 있느냐?”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북방에서의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라인하르트가 북방에서 저지른 일, 혹은 당한 일로 인해 자신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있는지 물었다.
황태자가 북방에 갔다는 흔적이 될만한 것들.
그로써 생길 문제들.
그제야 라인하르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없습니다.”
없다.
완벽히 처리했다.
혹은 문제가 있다 하여도 문제삼지 못한다.
일말의 주저함이 없는 태도.
다른 이라면 저 자신감을 타박했을 터다. 그러나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자신있게 주장하는 건 처음보았다.
허세인지, 아니라면 정말 자신이 있는 것인지.
“북벌에 참가한 다수의 귀족들이 휴전을 원한다. 짐이 승인해야겠느냐?”
데우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떠보는 거다.
귀족들이라 했지만 결국 카를로스 대공의 의지다.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승인하시지요.”
“이유는?”
“실패하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즉, 계속해서 싸우면 실패할거라는 의미다.
그 카를로스 대공이 20만이 넘는 병사를 이끌고 시작한 북벌이다.
북방에서 상황을 지켜본 라인하르트는 무게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실패할 거라고 확신하느냐?”
“전쟁을 장기화하면 제국의 필패입니다.”
전쟁은 돈 먹는 괴물이다.
장기화하면 2년 뒤 대흉년이 닥쳤을 때 버텨내질 못할 것이다.
‘제국의 패배라.’
데우스도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카를로스 대공이 아닌 제국 자체를 논한다.
제국의 패배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 도중 죽었으면 싶지만, 요원한 일이라는 건 데우스도 잘 알고 있었다.
“신성군주 때문인가?”
신성군주. 그 오만한 놈은 제국의 황궁에까지 쳐들어왔다.
라우넬만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사살했을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의 의지를 잃은 영향이 더 큽니다.”
북벌의 의지를 잃었다.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인하르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북벌을 강행한 이유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라인하르트를 황태자에 책봉시키는 일.
그것을 위해, 카를로스 대공을 북벌을 강행했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성지의 용도, 데이몬까지도 잃었으니 의욕이 사라질 만하였다.
‘전부 알고 있다.’
데우스는 라인하르트가 그러한 이유들을 모조리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을 시작한 것도, 황태자의 자리를 위해 황제와 거래를 한 것도 모두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말해준 적 없는 거래를 안다.
도리어 자신에게 묻는다. 잊었느냐고.
이제는 그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평생을 광증으로 보내온 게 황태자이지 않은가.
이만큼 총명한 모습은 오늘 처음보는 것이었다.
크로프트가 만나서 대화를 해보라는 게 왜인지는 알겠다.
“카를로스 대공은 협정을 주도하려 한다. 그의 주도로 협정이 이루어지면 황실의 권위는 보다 작아질 터. 그래도 승인을 하라는 말이냐?”
“주도하지 못할 겁니다.”
“왜지?”
“신성군주를 비롯한 북방의 민족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북벌을 통해 얻을 게 모조리 사라진 카를로스 대공은 빠르게 휴전을 맺고 싶어한다.
자신이 주도하여 휴전협정을 통해 극한의 이득을 챙기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휴전이란 쌍방의 동의가 필요하다.
협정이 지지부진해지고 늦어지면 카를로스 대공도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발이 묶이면 묶일수록 허점이 드러나게 되어있었으니.
“그것을 어찌 확신하느냐?”
“신성군주에게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게 그 증표입니다.”
“······!”
데우스의 눈에 한순간 경련이 일었다.
품에서 꺼낸 건 푸른 물병이었다.
신성군주가 파간을 치료하고자 만든 바로 그 물약이다.
신성군주가 파간들에게 추앙받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물건.
카를로스도, 그리고 황실도 알고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겠군.’
신성군주를 안다. 게다가 비전의 물약을 받아낼만큼 가깝다.
그렇다면 북방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에 라인하르트가 깊게 개입되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그들이 협정을 거부하며 시간을 끌 때, 신성교를 움직이면 됩니다.”
“신성교를 움직여 악마교단과 엮자?”
“움직임만 보이면 됩니다. 라우넬을 주축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나선다면 카를로스 대공도 황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중간에 악마교단의 조사차원에서 신성교를 조금만 움직여도 움찔할 테다.
악마교단의 숙청은 제국과 신성교의 합작이었으므로.
결국 북방의 요구에 따라 협정단이 새로이 꾸려지리라.
라우넬은 산증인이었다.
수많은 외압으로부터 견뎌낼 강인함도 지녔다.
문제는 신성교를 움직인다 하더라도 북방이 이를 용인하느냐인데, 북방을 일통한 신성군주와 약속을 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허······.’
자신이 아는 라인하르트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이렇게 극적으로 변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데우스가 심신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이걸 각성이라고 해야할까.
크로프트의 말마따나, 가야할 방향을 정한 것 같았다.
녀석은 요구하고 있었다.
‘새롭게 꾸려지는 협정단에 넣어달라는 거로군.’
의도대로 되어 협정단을 새로 꾸려야 한다면, 그 안에 자신을 반드시 포함시켜달라고 말이다.
제국의 황태자가 직접 협정을 주도한다······.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겠다는 의미다.
라인하르트가 선택을 했듯이, 그도 선택해야만 했다.
믿고 승인하든가, 승인하지 않든가.
승인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카를로스 대공의 입지만 늘려주는 꼴이다.
허나 라인하르트가 정국을 주도한다면 전쟁 배상의 책임 따위를 카를로스 대공에게 입힐 수도 있었다.
‘경의 말이 맞았다, 크로프트.’
대화를 나눠보라는 말.
다른 황자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라는 말.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해가 되었다.
‘날뛰어 보겠다는 것이냐.’
움츠렸던 기지개를 켜고 라인하르트는 날뛰고자 하고 있었다.
라우넬도, 카잔도, 다른 황자들도 갖지 못한 종류의 패기다.
반대해야겠지만 계속해서 크로프트의 말이 귓속에 아른거린다.
그의 변화가, 믿음이.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날뛰어 보거라.’
*
긴 이야기 끝에 바깥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황제 데우스와 평생 나눈 말보다 오늘 나눈 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궁을 나서, 바람을 쏘이며 방금 전 들었던 말을 복기했다.
―7일 뒤, 조세핀 황비의 주도하에 성대한 파티가 열릴 것이다. 그곳에 참석하거라.
바로 사교계에 데뷔하라는 말이었다.
베르사유 백작가와의 혼담도 무산된데다 혼기가 가득 찼으니, 직접 한 번 골라라도 보라는 말일까.
‘무슨 파티가······ 아.’
이 시기 궁에만 칩거하던 내가 무슨 파티가 있는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열린 ‘성대한’ 파티에 대해선 들어본 바가 있었다.
이맛살이 절로 구겨졌다.
‘그렇군. 카르넬 황녀의 성인식이었나.’
카르넬 황녀.
다른 황녀들은 전부 타국에서 시집살이를 하고 있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유일한 황녀가 바로 카르넬이었다.
황녀가 궁에 성인이 될 때까지 남는 건 꽤 이례적인 일이다.
2황비의 딸의 성인식을 왜 3황비인 조세핀 황비가 주도하는 건지는 몰라도, 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보고자 제국 전역에서 몰려들 건 자명한 일이다.
그런 곳에 내가 갔다간 찬바람이 쌩쌩 불 건 더욱 자명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군.’
하지만 황제 데우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나 역시도 한 가지를 요구했으니, 들어줄 수밖에 없을 듯싶었다.
참석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카르넬 황녀의 성인식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진심으로.
< 황제와 거래하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