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넬은 깊은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질척이는 수렁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집으로 가자고.
이제 다 끝났으니, 집에서 좀 쉬자고.
라우넬은 자신을 이끄는 이의 얼굴을 보았다.
‘라인하르트?’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우넬은 그제야 이것이 꿈임을 자각했다.
언제나 인상만 찌푸리고 있는 라인하르트가, 누군가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 따위를 지을 리 만무했으니까.
저런 표정 살면서 본 적도 없다.
명령하고, 으스대며 자신 외의 모든 걸 깔보는 악귀에겐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꿈일 것이다.
“라우넬님. 깨어나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며 라우넬이 정신을 되찾았다.
눈을 뜨자 푹신한 침상이었다.
궁이다.
그것도 자신의 방이다.
“내가 여전히 꿈을 꾸는 모양이로군.”
“아닙니다. 이십오일만에 눈을 뜨셨습니다.”
지근거리에 있는 집사장을 쳐다봤다.
지긋하게 먹은 나이 때문인지, 긴장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평한 대답이었다.
이십오일만에 눈을 떴으면 으레 난리를 쳐야 정상이거늘.
“정말인가? 이십오일만에 눈을 뜬 게?”
“예. 영원히 못 뜨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 황비님께서 아시면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라우넬은 최대한 진정하며 물었다.
“······ 내가 왜 궁에 있는 거지?”
가장 궁금한 건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였다.
분명히 라우넬은 북방에 있었다.
피닉스 기사단과 함께 탐색전을 벌이다가, 카를로스 대공측에 붙잡혔다.
이후 지하감옥에 갇힌 채 겨우 빠져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더라?’
이마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기억이 안 나십니까?”
“누군가와 싸운 것 같은데. 그게 리치였는지, 다른 누군가였는지······.”
아아.
어렴풋하게 기억이 돌아왔다.
“그래.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는 어디에 있나?”
“그야 황룡궁에 계시겠지요.”
“그럴 리가 없다. 녀석은 북방에 있어. 분명히 칼리번을 들고 휘둘렀단 말이다.”
집사장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정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령은 아직도 바위에 꽂힌 그대로입니다.”
“뭐······?”
잠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라인하르트도 황태자 궁에 있고, 정령 칼리번도 그대로 꽂혀있다고?
그럼 자신이 본 건 뭐란 말인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뜨문뜨문 라인하르트와 검을 나눈 잔상이 분명히 뇌리에 박혀있건만.
“라인하르트가 신성군주라는 소리도 들었다. 내 몸을 차지한 리치가 그리 말을 했지.”
“신성군주요? 아, 그 본 드래곤을 타고 온 분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장관이긴 했지요. 라우넬님을 구한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라인하르트 전하란 말씀이십니까?”
무언가가 이상하다.
본 드래곤은 대관절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집사장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얼굴을 봤으면 알 것 아닌가.”
“용투구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요. 그 대신 선전포고 비슷한 걸 하고 가긴 했는데.”
“선전포고?”
“북방에서 지금당장 철수하라더군요. 안 그러면 악마교단과 손을 잡은 정황을 대륙 전역에 까발리겠다고. 정말 살떨리는 광경이었습니다.”
집사장이 당시를 떠올렸다.
이십오일 전, 본드래곤을 타고, 궁의 결계를 뚫고 찾아온 남자.
그는 자신을 신성군주라 칭하며 북방의 신이라 말했다.
감히 제국의 황궁에서.
때려죽여도 시원찮지만 그는 라우넬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수천의 병사와 기사가 둘러싸 공격할 준비를 함에도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목소리는 라인하르트 전하가 아니셨습니다. 다만, 라우넬님을 풀어주시며 이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 라우넬님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 내가? 무엇을 말이냐?”
“카를로스 대공을 재판에 세우는 일, 인 듯했습니다.”
현기증이 났다.
카를로스 대공.
그를 재판에 세우다니.
지엄한 제국의 법을 어긴 죄, 악마의 죽음을 취급한 죄로 사형에라도 처하게 만들라는 건가?
잘잘못을 따지려고는 했지만 그를 재판에 세우는 일은 그와는 비교가 안될만큼 큰 일이었다.
자칫하면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북방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습니까?”
“아니······.”
찾긴 찾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아니다.
기껏해야 하위 귀족들 몇몇 정도와의 연관성밖에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고개를 턴 라우넬이 말했다.
“북벌은 그럼 어떻게 되고 있는가?”
“철수했습니다만, 일시적인 휴전상태입니다. 차후 사절단이 도착하면 정식적인 협정을.”
“라인하르트를 보러 가야겠다.”
“쉬셔야 합니다. 아직 회복이······!”
집사장이 말을 더 하기 전에 라우넬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일단 라인하르트부터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
쿵! 쿵! 쿵!
라우넬의 발걸음이 무겁다.
“라우넬 전하, 사전에 언질 없이 오시면······!”
“함부로 들어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비켜라!”
하지만 발만 동동 구를 뿐, 라우넬을 막아설 수 있는 간 큰 이는 없었다.
다만 라우넬의 얼굴과 흰색 소복을 보고 ‘큰일이 났다’라는 것만 짐작할 따름이었다.
‘얼마나 급하셨으면 채비도 하지 않고.’
‘칼부림이라도 나는 거 아니야?’
오랜시간 잠들어있던 라우넬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라인하르트를 찾는다.
적잖은 파장이 예상되었다. 만약 큰 일이 벌어지면 라우넬을 막지 못한 그들이 문책을 받을 것이다.
평상시라면 그런 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릴 터이나.
몇 개의 궁을 지나온 라우넬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칼리번이 진짜로 꽂혀있었다. 젠장.’
바위에 꽂힌 검, 정령 칼리번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젠 정말 꿈이라도 꾼 것 같다.
허나 자신의 기억이 모조리 잘못 되었을 리는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분명히 북방에 있었다. 벌써 돌아왔을 리가 없어.’
라인하르트가 황태자궁에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있었다.
그러니 라인하르트가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만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면 일단락 될 일이다.
없으면 북방일 테고, 있으면······.
쾅!
닫힌 문을 열어젖히며, 라우넬이 소리쳤다.
“라인하르트!”
“시끄럽다.”
··· 있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북방은 험준한 로카리 산맥을 아무리 빨리 주파해도 한 달은 족히 가야 할 거리다. 돌아가면 세 달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것을 이십오일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돌아왔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천하 태평하게, 라인하르트는 너른 의자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윤작법’이라니, 설마 지금 농법 관련 책이라도 읽고 있는 건가?
“무슨 용무냐. 이른 아침부터 천둥벌거숭이처럼.”
“진짜로 몰라서 묻는 거냐?”
“몰라서 묻지 않느냐? 우리가 서로 눈만 봐도 통하는 사이는 아닌 듯한데.”
그건 동의한다.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언제 도착한 거지?”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나는 계속 여기 있었다만.”
“거짓말하지 마라. 네가 북방에 있었던 건 나도 알고 황제 폐하께서도 아시는 사실이니.”
“그래? 나는 모르겠으니, 그럼 황제 폐하에게 가서 물으면 되겠군.”
“진지하게 묻는 거다.”
책을 내려놓은 라인하르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온 건 며칠 안 되었다.”
“며칠?”
라우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이십 오일 만에 깨어났으니, 라인하르트도 그쯤해서 도착한 줄 알았다.
라인하르트는 별 걸 다 물어본다는 듯 반응했다.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겠느냐. 이곳에 있는 식솔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금세 들통날 거짓말이다. 하여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라우넬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네가 신성군주라고······.”
“내가? 하하!”
진심으로 웃어버렸다.
이쯤되자 라우넬은 할말을 잃었다.
“오래 침상에 누워있어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나보군.”
정말 그런 걸까?
자신이 본 게 전부 꿈이라고?
‘하긴······.’
이제야 조금 안정이 된다.
생각해보면 라인하르트가 신성군주고, 리치를 압도할 힘을 지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작 수십여일만에 북방을 이끄는 신이 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신성군주가 리치와 언데드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구해진 거라고 여기는 편이 이치에는 들어맞는다.
하지만, 그럼 왜 자신은 그를 라인하르트라고 착각한 걸까.
신성군주는 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봤는지.
“······ 아침부터 소란을 떨어서 미안하다.”
입술을 깨물며 한 차례 고개를 숙이곤 라우넬이 물러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책에서 시선이 떼어지질 않는다.
라인하르트가 책이라니. 농법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이 정도면 충분히 정상적인 대화의 범주였다.
‘광증이 괜찮아진 건가?’
분위기가 바뀐 건 확실했다.
마음같아선 북방에 간 이유와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묻고 싶지만, 일단 한 발자국 물러났다.
확인해야할 것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물고늘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났다.
‘잘 넘어간 것 같군.’
당장은 내가 신성군주임을 밝힐 수 없었다.
어찌됐든 북방과 제국은 전쟁 중이었다. 카를로스 대공과 그 휘하 귀족들이 내가 신성군주임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난 이십여일 간 수차례 부딪히고, 죽고 죽인 이가 황태자라니.
후퇴시킨 병력들을 이끌고 수도를 장악해 나를 매달아버려도 시원찮을 일이었다.
‘아무리 카를로스라도 악마교단과의 접점은 피하고 싶었겠지.’
악마교단은 제국이, 대륙 전역이 척살해야할 악의 근원이다.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게 드러나면 아무리 카를로스 대공이라도 무사하진 못하다.
하여 데이몬을 죽인 게 결정타가 된 건 분명했다.
라우넬이 궁에서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북방도 정복될 기미가 없자 결국 후퇴하여 일시적인 휴전을 결정했다.
오랜시간 싸우기엔 북방의 환경은 제국민에게 너무나도 열악했던 탓이다.
꽤 현명한 선택이었다.
지지부진하게 계속 싸웠으면 양쪽 다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아직 휴전협상과 포로교환이 남았다. 그것을 누가 주도하느냐가 쟁점이 될 터.’
카를로스 대공이 처리하고자 할 것이나, 과연 그의 생각대로 될는지는 두고볼 일이었다.
북방에서 사절단을 보내오면 아마 군주 중 한 명이 올 텐데.
그들이 나와 협상하고 싶어할지, 아니면 카를로스 대공과 협상하고 싶어할지는, 뭐.
아무튼 간에.
“황제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전하.”
제르민이 밖에서 말했다.
나는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예상보다 조금 더 빨랐다. 며칠은 더 걸릴 줄 알았거늘.
돌아온 이후 직접적으로 황제를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평생을 일컬어 제대로 대면해본 적이 없었다.
무슨 말이 오갈지는 알 수 없으나 북방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묻고자 하는 것일 터.
한 번도 호출한 적 없던 그가 나를 직접 이리 부른 걸로 봐선,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가겠다 하여라. 아직 씻지도 못하였느니.”
라우넬같이 천둥벌거숭이처럼 오갈 순 없었다.
채비를 완전히 끝내고서, 흠 없이 다 준비 되면 출발할 것이다.
급한 건 내가 아니었으니.
< 황제와의 대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