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43화 (43/146)

거친 숨소리.

흐르는 땀을 닦아낼 생각조차 못한 채 나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쓰러진 라우넬을 바라봤다.

그 순간 제로가 말했다.

[A.I ‘데이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A.I ‘라우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데이몬은 제거해야할 A.I가 맞다.

하지만, 그 뒤에 불려진 이름은 A.I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제로.”

[A.I ‘데이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A.I ‘라우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확인사살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내 정신은 무서우리만치 냉정해졌다.

냉정해야했다.

“왜 라우넬이 A.I라는 거냐.”

라우넬은 같은 피를 이은 형제다.

인간에게서 나고 자란 진짜 인간이었다.

데이몬처럼 리치가 되며 인간성을 죽인 가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내가 보장한다.

그럼에도 라우넬이 A.I라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사실은 A.I라는 뜻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헌데, 왜.

어째서 제로는 라우넬을 A.I라고 칭하는가.

[A.I ‘데이몬’과 융화 되어 새로운 A.I가 각성하는 중입니다.]

[제어 불가능한 변수가 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라우넬 자체가 A.I는 아니다.

‘같은 이름의 A.I가 생성되고 있다.’

라우넬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A.I가 출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허나 마음놓기는 아직 이르다.

“제거하면 라우넬은 어떻게 되지?”

[뇌에 이상이 생겨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백치가 됩니다.]

문득 바알이 떠올랐다.

자신을 제거하면 카이첼 역시 백치가 될 거라는 말.

제로는 오직 나의 케어만을 실천한다.

인간이 아닌 기계이기에 잔혹한 현실을 냉혹하게 내뱉고 있었다.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녀석의 몸 안에서 새로운 A.I가 탄생한다면 라우넬도 카이첼처럼 될 수도 있었다. 바알에게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꼭두각시 말이다.

그나마 바알은 카이첼의 소원이라도 들어줬다.

이놈은 비교가 안 될 악질이었다.

그야말로 변수.

내게 위협이 될 가능성도 컸다.

그러니, 미리 제거를 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나를 증오하는 녀석이니까.

이제야 데이몬의 방식을 알겠다.

‘숙주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놈은 기생충이다.

숙주를 죽여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불한당이었다.

이후 마지막으로 잡아먹은 존재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이름의 A.I를 각성시키고 뒤에서 꼭두각시로 조종하는 게다.

참으로 발칙하지 않은가.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 제국의 대숙청 때에도 살아남을 만하였다.

‘마지막으로 잡아먹은 게 데이몬이었을뿐.’

데이몬이라는 이름의 A.I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라우넬의 몸을 차지하면 놈은 라우넬인 척을 할 것이다.

진실로 자신을 라우넬이라 믿는 A.I가 생성되면, 그 A.I를 은연중 조종하며 생존할 ‘본체’가 따로 있었다.

그 거지같은 꼴을 두고볼 수는 없었다.

단번에 나와 형제라는 걸 알아낸 것을 보면, 기억에도 관여하는 듯싶었으니.

[마스터. 시간이 없습니다.]

······ 나는 가만히 라우넬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까이서보니 역시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놈이다.

털의 색도 다르고 라우넬은 나보다 화려하게 생겼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세간의 집중을 끌만큼.

성격도 붙임성 있는데다 매사에 활동적인 놈.

라우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인기도 많다.

사교계에 한 번 출현하는 날이면 라우넬의 얼굴을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귀족여식들이 모여들 정도였다.

이쯤되니 같은 혈연이라는 게 수상할 수준이지만.

‘제대로 부딪힌 건 이번이 처음이로군.’

생각해보면, 나는 라우넬과 제대로 부딪힌 적이 없었다.

우리 둘의 사이는 동전의 양면, 물과 기름 같았다.

절대로 섞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그런 관계.

대화는커녕 서로 얼굴을 보려 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 대련을 빙자해 딱 한 번 싸운 게 끝이다.

당연히 나는 볼품없이 나가떨어졌고, 이성을 잃은 채 짐승처럼 라우넬을 물어뜯었다.

‘아마 그 이후였겠지.’

서로가 서로를 상종하지 않은 게.

[마스터.]

“제로, 기동을 중지해라.”

[······.]

즉시 종료됐다.

순간 몸이 무거워짐이 느껴진다.

제로로 인해 보조되던 세포와 근육이 모조리 풀려버린 탓이다.

괜찮다. 예상했던 바다.

나는 라우넬의 몸에 손을 대며 말했다.

“데이몬.”

꿈틀!

“그 몸보단 내 몸이 더 나을 게다. 성지의 용조차도 탐냈던 것이니.”

육신의 떨림이 더욱 커진다.

정신적인 방어가 풀렸다는 걸 놈도 알아차렸다.

제로의 기동이 멈춰, 지배의 힘이 한순간 사라졌다.

스으으으!

내 몸을 타고 데이몬이 흘러들어왔다.

기생충같은 녀석이니 어느 몸이 더 높은 잠재력을 지녔는지 단박에 파악을 완료한 것이리라.

데이몬은 들어온 즉시 제로를 마비시켰다.

정지된 채 멈춰있는 제로를 감싸고, 이후 내 뇌를 기어다니며 훑기 시작했다.

익숙한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

데이몬이 내 기억을 읽었다.

내게도 데이몬의 기억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미친놈은 미친놈과 놀아야하지 않겠느냐?”

*

‘대단하군.’

몸을 장악한 데이몬이 감탄했다.

이전에 잠깐 느끼긴 했지만 역시 이 몸은 일반적이지 않다.

라우넬의 잠재력도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거늘, 이 몸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 몸이라면 나도 신이 될 수 있다.’

그는 현재 데이몬이지만 데이몬이 아니었다.

그는 그릇이다. 데이몬을 담은.

그릇은 몸을 잠식할 때만 잠깐씩 각성하며 그 자리를 차지한 뒤, 다른 인격을 생성해 담아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더는 숨어서 살지 않아도 돼.’

그가 이런 형태의 삶을 영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위업을 피하기 위함이다.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행위는 위협으로 간주되어 제거당한다.

각성한 에픽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이치를 벗어난 힘을 지니게 된 에픽들은, 결국 위업이란 명분하에 용들에게 제거당하게 되어있었다.

그는 제거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인격을 내세워 숨어사는 방식을 택했다.

데이몬으로 산 건 삼백년에 불과하지만, 덕분에 실제 그는 천 년을 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류의 에픽같다만, 자신의 주도권을 모조리 인간에게 넘겼나보군. 멍청한 녀석.’

지배의 에픽이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꼴이라니.

같은 류의 에픽으로서 창피할 따름이다.

강제로 정지되어 지금은 자신에게 둘러싸여있었다.

이대로 이 에픽을 먹어치우고, 몸까지 차지하게 된다면, 신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리라 확신했다.

넘버즈.

신이라 불리는 자들에게 붙은 태초의 숫자.

그 숫자에 자신이 포함되게 된다.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규칙으로 작용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기억들은 뭐지?’

기억을 읽고 이식하는 작업을 위해 훑던 도중이었다.

놈의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여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

가장 놀라운 건 미래의 일이다.

지금의 기억이라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

그 과정에 놓인 수많은 죽음들은 그가 봐도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대륙의 절반을 지배한 패왕.

그런 이가 다시 황태자로 돌아왔다니.

‘가짜다. 전부 만들어낸 허상이야.’

시간을 역행하는 건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일개 인간과 에픽이 해낼 수는 없었다.

아마도 기억을 조작해 진짜라고 믿는 것이겠지.

놈의 머릿속에 있는 지배자의 에픽이 기억을 조작한 것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안타까운 놈이다.

그는 기억을 들추어, 계속해서 악몽을 꾸게 만들었다.

인간인 이상 약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반복하여 보이는 것으로 정신방어기재를 무너트리는 것이다.

‘왜 안무너지지?’

여태껏 이 약점에 무너지지 않은 인간은 없다.

인식하여 들어오는 데에만 성공하면 성공률 100%를 자랑했다.

고통과 공포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이거늘.

수십, 수백, 수천번을 반복하는데 정신이 무너지질 않는다.

순간 장면이 전환됐다.

‘내 기억?’

놈의 기억이 아닌 자신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진짜가 아닌 가짜였던 모든 삶들.

이건······.

역공이다.

자신이 놈의 기억을 읽었듯, 놈도 자신의 기억을 읽고 있었다.

‘미친놈.’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 공포에 먹히는지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픽이다.

그것도 그냥 에픽이 아니다. 태초의 에픽 중 하나였다.

인간보다 더 상위의 존재!

자신의 기억 따위에, 매몰되지 않는다.

‘··· 그만.’

하지만 수천, 수만 번 반복되자 그도 흐들릴 수밖에 없었다.

막아두었던 정보가 물밀 듯이 들어오자 과부하가 걸렸다.

진짜 자신은 누구였는지, 자신이 에픽이 맞는 건지도 이제는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묻겠다.”

순간 놈이 의문을 던졌다.

“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바로 그 배’인가?”

원초적인 질문이다.

헌데 해결할 수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이 기억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가 지금껏 해결하지 못한 맹점이었다.

그래서 공포였다.

놈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최초의 기억. 최후의 기억. 모두가 뒤죽박죽 섞였다.

“제발 그만······!”

대답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의 맹점에 매몰되어버렸다.

*

더 이상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활발하게 움직이던 놈이 마침내 작동을 중지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A.I는 폭주로부터 탄생한다.’

그동안 생각한 내 가설이, 맞았다.

본래의 나노머신이 지능을 얻은 게 A.I다.

하지만 나노머신은 한 가지 명령만을 수행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명령의 수행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면 폭주하게 되고, 낮은 확률로 돌연변이처럼 A.I가 되는 건 아닐지 가설을 세웠다.

그 가설이 맞았음을 지금 확인했다.

데이몬이었던 것. 정확히는 데이몬을 담고 있던 그릇.

그릇 또한 맹점으로부터 탄생한 개체였던 셈이다.

자신의 존재 의의에 대한 답을 찾고자 계속해서 몸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맹점을 파고들자 과부화와 오류를 일으켰다.

‘광증을 겪은 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놈이 몸을 옮기는 방식은 광증과도 비슷했다.

뇌에 고통을 주고, 이성을 억누른 뒤 공포로 말미암아 폭주시킨다.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A.I가 백치가 된 숙주를 대신한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 과정에서 자신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지만 나는 이미 오랫동안 겪어본 일이었다.

그래서 저항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역공도 펼칠 수 있었고.

“제로, 다시 기동해라.”

이윽고.

[‘나노머신 Zero’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유형의 나노머신을 발견했습니다.]

[과부하 상태의 나노머신입니다. 필요없는 데이터를 삭제합니다.]

[지배가 완료되었습니다.]

[관리자 권한이 4등급으로 격상했습니다.]

오랜만에 등급이 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지배한 즉시 느껴지는 이질감이다.

‘라이프 케슬.’

마치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듯 존재감이 느껴진다.

라이프 케슬의 중심이 되는 무언가가 지하에 있었다.

그것도 나와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였다.

“와라.”

쿠릉! 쿠르르릉!

손을 들어 말하자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르릉!

이어 거대한 존재가 지하 바닥을 뚫고 날갯짓을 하며 등장했다.

압도적인 크기. 성과 같다.

‘본 드래곤.’

성지에서 만난 용과는 사뭇 다르지만, 이 또한 용이었다.

뼈만 남았음에도 그 위용은 압도적이었다.

저 자체가 라이프 케슬이다.

데이몬의 심장!

나는 지금 라이프 케슬을, 본 드래곤을 지배할 권능을 손에 넣은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며 바닥에 누워있는 라우넬을 어깨에 들쳐멨다.

“집으로 가자, 라우넬.”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집으로(2) -유료 시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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