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노머신 황제-40화 (40/146)

동시 뇌 활성 영역이 30%를 돌파한 이후.

단순히 세상이 느려지는 것을 넘어, 나는 또 다른 세계에 도달했다.

‘보인다.’

1초 이후의 세계가.

포션은 뇌의 영역을 일시적으로 넓혀줬다.

본래라면 한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 번 넓혀진 영역은 의외로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나노바이오.’

나노바이오로 인해 능률이 올라간 나노머신들 덕이다.

제로는 정확히 포션에서 나노바이오만을 추출해, 그 대부분을 뇌를 담당하는 나노머신들에게 먹였다.

이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다른 이들은 포션을 붓거나, 섭취한 그 부분의 재생만 빨라진다.

나처럼 뇌가 향상되는 경우는 없었다.

다른 사람에겐 제로가 없기 때문이다.

아쉬운 건 포션을 더 마셔도 30% 이상에서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한 번 느끼고 경험했으니 충분하다.

잔상처럼 모든 1초 이후의 움직임이 보였다.

이것을 뭐라고 해야할까.

‘초감각.’

나는 이 감각을 초감각이라 칭했다.

모든 뇌 영역을 활성화하는 건 기껏해야 수초. 하지만 목숨이 오가는 전장이나, ‘증강현실’ 속이라면 보다 길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Lv 110.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각성하기 전의 크로프트가 눈앞에 있다.

마나샤워를 겪고 젊어진 모습이 아닌, 주름 자글한 노인의 모습으로.

하지만 저런 상태임에도 그는 최강이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전투보조 프로그램’을 활성화합니다.]

전투보조 프로그램. 제로가 새롭게 짠 프로그램의 이름이었다.

권한의 레벨이 높아지며 자신이 짤 수 있는 프로그램의 영역도 넓어졌다는데, 내 움직임에 따라 체내의 나노머신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필요한 곳의 세포를 크게 활성화시켜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여태껏 전투보조 프로그램을 활용해도 크로프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보이지도 않는 걸 막아낼 순 없는 탓이다.

‘지금이라면.’

30%, 초감각의 영역에 들어섰다.

이윽고 크로프트가 움직였다.

‘보인다.’

보였다.

크로프트의 잔상이.

그가 움직일 경로가!

검을 뽑았다.

스팟!

[사망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종료합니다.]

보인 경로 그대로 검이 날아왔는데, 피할 수가 없었다.

반응이 느렸다.

‘움직이면서 피해야한다.’

1초 안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반응하면서 피해야 한다.

나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몸이 먼저 위험을 감지하며 움직일 때 나는 초감각으로 그 움직임의 방향성을 설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보인다면 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보이기만 하면 연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최강인 크로프트의 검을 최약체인 내가 받아낸다.

과거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그저 떠받들어 지는 채로 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나 스스로 증명하고, 올라설 것이다.

그 과정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시.”

[Lv 110.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사망했습니다.]

“다시.”

[Lv 110.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사망······.]

“다시!”

*

“······.”

크로프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처음의 카이첼처럼 얼음기둥에 얼어버린 것 같다.

‘검을, 막았다고?’

오랜만의 검술지도.

라인하르트의 부탁으로, 대련을 진행했다.

그런데 그의 일격이 막혔다.

아무리 천재를 뛰어넘는 재능이라도 너무 빠르다.

검을 배운지 기껏해야 한 달.

하물며 최근에는 검을 가르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검을 막아냈다.

‘내 움직임을 미리 예상하고 움직였다.’

게다가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 경로를 먼저 확인하고 움직인 것도 아니다.

미리 예측하고, 정확히 그곳으로 검을 뻗었다.

전력을 다한 검이 아닐지언정 크로프트는 예전의 수준에서 봐주지 않고 있었다.

그의 사전에 봐준다는 단어는 없었다.

애당초 라인하르트가 검을 막는다는 조건은 없었다.

그저 강자의 움직임에 익숙해지라고 지도를 했을 뿐이다.

‘육감을 개통하신 건가?’

오감을 뛰어넘은 육감.

소드마스터에 오른 자들은 그 감각이 고도로 발달되어있다.

하여 미리 예측하고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육감을 얼마나 개발하느냐에 따라 정밀도에 차이가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움직임이었다.

‘한 치의 미세한 차이도 없이, 정확히 예측하며 움직인 것이었다. 육감을 그 정도로 발달시키려면 그만한 고행이 필요한 법이건만.’

이건 정말로 ‘보였다’고 밖에 설명이안 되는 구조다.

미래를 읽지 않고서야.

‘보였다고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을 터인데.’

신체능력 또한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정예기사의 수준은 진즉에 뛰어넘었다.

검의 천재라 불린 이들이 10년간 쌓은 실력에 비견된다.

온갖 변수까지 더하면, 1황자와도 대결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알게 된 이상 두 번 당하진 않는다.

미리 움직인다면, 그에 따라 다시 반응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처음 당하는 경우라면 소드마스터라도 상당히 당황할 수 있겠다.

요행은 아니다.

적어도 크로프트의 앞에서 요행은 존재할 수 없었다.

“성장하셨군요.”

“아직 두 번은 못 막겠군.”

“한 번으로도 충분합니다, 전하.”

머리가 어지러운지 라인하르트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만하면 됐다며 바닥에 검을 던져버리는 저 행위는 도저히 기사도를 느낄 수 없는 행위지만, 생각해보면 라인하르트는 기사가 아니지 않은가.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성장하신다. 마치 신화 속 대영웅들처럼.’

신화 속의 존재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제스스로 강해지고 증명한다.

그런 존재를 보는 기분이었다.

‘초대황제의 피를 가장 진하게 받으신 거다.’

라인하르트의 초고속성장은, 그 외의 말로는 설명이 안 됐다.

초대황제, 절대자라 불린 존재.

그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았음이 분명하다. 다른 황자들과 다르게.

‘스스로 북방의 신이 되셨다. 신분상 공식적으로 공론화할 수는 없겠으나, 결국은 알려지게 될 터.’

크로프트는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증명하는 중이다.

제국의 황태자가 북방의 신이 됐다.

이게 알려지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제국의 황태자가 북방 오랑캐의 신인 게 말이 되느냐’며 역으로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은은하게 여지를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걸 착각시키고 망상을 부풀리게 만드는 게다.

‘카를로스와 그의 귀족들을 제외하면, 친황태자파는 전무하다. 허나······.’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을 실패한다면?

그리고 카를로스 대공이 황태자와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원래라면 폐위하고 새 황자를 황태자로 즉위시키겠으나, 라인하르트 스스로 격을 쌓아 힘을 갖추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카를로스대공의 곁에 선 귀족들 중에 분명히 이탈자가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선을 대고자 분명히 움직일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황실, 황가의 힘이지만, 황자와 황비들이 라인하르트에게 힘을 실어줄지는 솔직히 미지수였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옆에는 크로프트가 있었다.

그가 황제를 설득시킨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황제가 진심으로 황태자의 자격을 인정하고 인증하면 그 지위가 흔들릴 일은 없으리라.

‘무엇이 되었든, 결국 주머니를 뚫고 나오시겠지.’

라인하르트의 행보는 크로프트도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때 라인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준비해라. 온다.”

“무엇이 온다는 말입니까?”

“시체들.”

라인하르트의 말을 듣고 크로프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체가 온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말을 듣고 크로프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데드 군단이 몰려온다. 모든 군주를 소집하도록.”

*

데이몬의 오른쪽 눈을 해킹한 이후, 나는 제로를 통해 그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데이몬은 리치였다.

단순히 살아있는 것들의 정신을 빼앗는 게 아니라, 죽은 시체 역시 언데드로 만들어 부릴 수있었다.

카를로스 대공이 리치와 손을 잡은 게 확실시된 상황.

‘악마교단의 잔재.’

리치는 악마교단의 잔재다.

악마의 죽음을 만들고, 교세를 넓혔다가 제국에게 먼지 한 톨까지 털려버린 그곳.

흑마법사들이 주류를 이뤘으나 그들은 리치를 신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다 제거한 줄 알았는데, 데이몬은 다른 리치와 달리 살아있는 것의 몸도 빼앗을 수 있어서 생존한 것 같았다.

아니면 카를로스 대공이 몰래 빼돌렸거나.

소문이 사실이었다. 대공의 뒤에 리치가 있었다.

‘리치는 인간이 아니다.’

제로가 해킹한 게 그 증명이다.

인간은 해킹할 수 없다.

데이몬이 A.I라는 뜻이다.

만약 데이몬이 인간 흑마법사인 상태에서 리치가 된 거라면, 해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킹이 가능했다는 건 처음부터 그가 A.I였다는 의미였다.

마왕 가프의 ‘폭식’이 아예 처음부터 지배불가였던 건 그가 A.I가 아닌 인간인 상태로 권능을 얻었기 때문이다.

제로는 인간의 것은 해킹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

반대로 A.I의 것은 모조리 해킹하고 지배할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을 계승한 A.I가 바로 리치다.’

흑마법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리치화.

정작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인간은 진짜로 죽고, 그 자리를 A.I가 본인을 인간이라 착각하여서 되는 게 리치였다.

리치 자체가 하나의 에픽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흑마법사는 금기를 어겨가며 리치가 돼서 영원불멸을 꿈꾸지만, 정작 그 리치 자체가 영원불멸은 없다는 증거와도 같지 않나.

자신의 기억과 능력을 A.I에게 계승해줄 뿐이라니.

‘흑마법과 A.I간에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겠군.’

흑마법은 나노머신의 A.I를 각성시키는 방법일 수도 있었다.

후에 필히 알아봐야겠다. 지금 당장은 데이몬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게 먼저였다.

“죽음의 군단이 성지를 노리고 있다. 위대한 전사들이여, 놈들을 모조리 짓밟고 죽여라.”

시체들이 뭉치기 전에 각개격파 한다.

데이몬이 언데드를 만드는 모든 위치는,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는 말밖에 나오지가 않았다.

‘언데드를 만드는 위치가 모두 공격받았다.’

특히 파간들이 광전사처럼 밀려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위치를 알고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언데드를 만들기 위한 영역을 전개해두면 귀신같이 찾아와 눈 깜빡할 사이에 모조리 분쇄시켜버린다.

북방에 넘쳐나는 시체들.

그 시체들을 되살리면 성지를 흔들 수 있다.

그런데, 미처 다 살아나기도 전에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다.

‘위치를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모르겠다.

진짜 신성교의 성황이라도 저기에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성황 같은 존재는 없었다.

그 특유의 걸쭉한 신성력을 지닌 존재가 성지에 있었다면, 자신이 못 알아볼 리 만무했다.

“낭패군.”

카를로스에게 거래를 제시하며 큰 소리를 뻥뻥 쳐놨다.

그러나 시작도 못하고 죄다 실패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가지고 있던 것들을 쓸 수밖에.’

그가 수백년간 모아온 강자의 시체들.

언데드로 만들면 최소 나이트 급인, 아껴둔 시체들이 있다.

언데드의 유통기한이 길지 않아 모아두고만 있었지만.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최후의 최후에나 사용해야할 보물들이다.

고작 카를로스와의 거래를 위해 쓸 수는 없었다.

‘아니, 아니지. 내 보물을 이런 일에 쓸 수는 없다.’

잠시 생각한 데이몬이 좋은 수를 떠올려냈다.

‘마침 오늘 카를로스가 가둬둔 놈들이 있었지. 일단 그놈들을 써볼까?’

그의 지하감옥에 갇혀있는 자들.

아직 확인은 안 했는데 제법 강한 놈들이라고 들었다.

지하감옥으로 내려가 확인하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오호.’

피닉스의 표식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마나의 질이 확실히 뛰어난 놈들이다.

카를로스가 마음대로 쓰라고 했으니, 저 녀석들을 언데드로 만들어 부린다면 제법 괜찮은 성과가 나올 것 같았다.

‘최소 한놈은 데스나이트로 만들 수 있겠군.’

상당히 강한 놈들도 있었다.

소드마스터는 아니지만 그 바로 아래 수준인 강자들.

그중 한 명은 거의 소드마스터에 필적한다.

소드마스터의 시체로 언데드를 만들면 데스나이트가 되어 전성기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소드마스터가 아니어도 잠재력이 충분하다면 데스나이트로 만들 수 있었다.

“······.”

감옥 안에 있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빛이 죽지 않았다.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이분이 누구신줄 줄 아느냐. 어서 풀지 못할까!“

“황제폐하께서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기사들이 시끄러워졌다.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제가 정말 너희를 구할 것 같으냐? 이곳에 있는 줄도 모를 텐데?”

꽈득!

데이몬과 눈이 마주친 기사 한 명이, 제스스로 목을 꺾어버렸다.

순식간에 감옥이 조용해졌다.

데이몬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포기해라. 너희를 구해줄 구원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끝장을 보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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